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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Jun 19. 2023

로또 1등보다 간절하게 기원했던 다이어트 성공

꽃중년 부부의 국립공원 투어 NO.3_변산반도국립공원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 결심했었다. 부부 여행의 아름다운 완주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겠노라고. 중대한 발표를 했으니, 그날의 약속을 책임져야 했다. 5월 첫날, 구체적인 다이어트 계획을 주방 벽에 붙였다. 역시나 식구들은 환호했다. 그랬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진 건 없었다. ‘쫄쫄 굶는 다이어트는 못 써!’ 나는 여전히 내 몸에 관대했다. 다이어트는 원래 내일부터 하는 거라며 미루기를 반복했다.      

  

5월은 바쁘고 지독했다. 계절의 여왕답게, 열두 달 중 기념일도 가장 많았다. 신경 써 챙겨야 할 일투성이라 예민했다. 가족과 지인들 생일까지 적고 보니 내 다이어리 속 5월은 개미지옥 같았다. 밤이 되면 빨간펜을 들고 ‘도장 깨기’ 하듯 날짜 위에 커다란 엑스자를 그었다.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표시이자, 지옥 탈출을 향한 의지 같은 거였다. 보통날에도 마음이 바빠 다이어트 따위에 에너지를 쏟을 수 없었다.      

  

어린이날이 가고 어버이날도 갔다. 낯부끄럽고 어색한 스승의 날도 무사히 넘겼다. 5월을 절반쯤 지날 때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숨 돌리며 살고자 결심했던 ‘부부 여행’을 잊고 지낸 탓이었다. 완주를 위한 다이어트 계획까지 발표하고선 너무 무책임했던 것 같아 마음이 뜨끔했다.

  

힐끗 달력을 봤다. 남아 있는 빨간 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19일, 부처님 오신 날이다. 마침 부부의 날도 다가오고 있었다. 잠자던 여행 욕구가 불뚝 깨어났다. 여행하기 딱 좋은 날이야! 마음에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자기야, 부처님 오신 날! 콜?”

남편에게 세 번째 부부 여행을 알렸다. “콜!” 남편은 ‘갑자기?’라고 묻지 않았다. 나는 계획적인 사람이지만 가끔 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이 좋다. ‘무작정’, ‘훌쩍’ 그렇게 떠나는 건 그냥 좀 멋져 보인다. 국립공원 여권을 쓱 훑어보고는 “젓갈 정식 먹고 싶어.”라고 했다. 천재 남편은 대답했다. “갑시다, 부안 변산으로!”     

  

2021년 5월 19일, 우리는 ‘변산반도국립공원’으로 세 번째 여행을 떠났다. 지리산에 다녀온 지 25일 만이다. 그날처럼 먹거리를 바리바리 싼 배낭은 짊어지지 않았다. ‘홀가분 여행’이라 이름 붙였으니, 카메라도 되고, 카드 결제도 되는 똑똑한 스마트폰 하나면 충분했다.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기운찼다. 지난 스승의 날 밤, 나는 큰마음을 먹었었다. 매일 만 보씩 걷자! 지리산에서처럼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싶지 않았다. 고작 나흘을 걸었을 뿐인데 몸이 가벼워졌다. 마치 다이어트에 성공한 ‘유지어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드라마 <미생>의 명대사가 절로 떠올랐다.   




“자, 변산반도국립공원은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국내 유일의 반도형 공원으로 산악 지역인 내변산과 해안가를 중심으로 하는 외변산으로 나뉩니다. 내변산은 의상봉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과 10여 개 직소폭포를 품고 절경을 자랑하며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외변산의 채석강과 적벽강 등은 바다의 향기를 발산합니다. 특히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변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아는 체를 하며 ‘커닝페이퍼’를 꺼내 술술 읽었다. 우리가 떠나는 여행지에 대해 늘 친절히 설명했던 남편처럼.     


“첫 번째 코스는 내소사! 일단 연등부터 걸고 시작합시다.”

“오케이! 그리고?”


보조석에 앉아 음악 감상을 하거나 침묵하면 안 됐다. 이번 여행의 책임자는 나니까. 하지만 남편의 물음에 당황한 나머지 놀란 자라 머리처럼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계획 없는 여행이라는 게 바로 들통났다. “변산은 추천 여행지가 너무 많아. 대부분 다 가본 곳이고.” 나는 변명했다. 


“곰소 가서 밥 먹고 해안 탐방코스로 돌자. 낙조도 보고, 어때?” 남편이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멋진 오빠처럼 나를 쳐다봤다. ‘헐, 뭐야? 왜 또 멋있고 난리야.’ 눈이 마주치면 반할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돌려 외쳤다. “와, 내소사다!”   

  

내소사 일주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하며 일주문을 들어섰다. 눈앞에 고대하던 전나무 숲길이 펼쳐졌다. 하늘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은 전나무가 600미터가량 늘어선 울창한 숲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은 바닥을 도화지 삼아 그림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미술관이 따로 없었다. 몽글몽글 연애 세포가 되살아났다. 슬그머니 남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늦봄의 푸른 숲을 지나 내소사로 향했다. 

내소사 수호신 느티나무

내소사 앞마당에 들어 사찰 수호신인 느티나무를 마주했다. 품위 있는 수형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수호의 기운이 느껴지는 자리를 찾아 ‘가족의 안녕’을 바라며 노란색 연등을 걸었다. “로또 1등 되게 해 주세요.”라고 적으려던 욕심을 버렸다. 걸린 연등마다 만사형통을 바라는 진지한 궁서체, 물욕을 보이다간 부처님께 혼날 것 같았다. 곱게 합장하고 마음속 소원을 빌었다. ‘다이어트 성공하게 해 주세요. 이 여행을 지속하고 싶거든요.’      

  



긴 여행이 아니라도 때가 되면 멈춰서 배를 채워야 한다. 특별한 일 아니면 삼시세끼를 걸러본 적 없는 나는 밥때에 민감하다. 서둘러 곰소항 3대 맛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싸! 그냥 백반 먹자.” 내 말을 듣지 못한 듯 남편은 비싼 한정식 세트를 주문했다. “부부의 날 선물이야. 맛있게 먹어.”라며 쓸데없이 윙크를 날렸다. 나는 젓갈이 가득한 한정식 한 상을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부부의 날 선물치고는 좀 짰다.       

밥 한 그릇 뚝딱 사라지게 하는 젓갈, 틀림없는 밥 도둑.

젓갈과 아이스아메리카노는 환상의 궁합이다. “얼음 가득 주세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카페에서 나는 라떼가 아닌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일기에 기록할 만큼 엄청난 일이다.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남편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채석강에서도, 격포항에서도, 모항해수욕장에서도 커피잔을 붙잡고 걸었다. 그러느라 내 손잡는 걸 잊은 듯했다. 낭만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나 잡아봐라.” 놀이에 빠져 모래밭을 뛰어다니며 혼자서도 잘 놀았다.


종일 에너지가 식지 않았다. 여러 번 보았어도 채석강 책 바위 앞에서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해 아이처럼 흥분했다. 밤을 기다렸다 강물에 비친 달이라도 잡고 싶었다. “서 여사, 내일은 빨간 날 아니야.” 남편은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아쉬웠다. 떼라도 써볼까 싶었지만, 나는 말 잘 듣는 순둥이처럼 방글거리며 남편 뒤를 따랐다.     

  

해안일주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하며 석양을 보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조금은 덜 아쉬울 듯했다. 내내 들뜬 표정으로 찰나를 기다렸다.

석양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려 노을을 맞이했다. 붉게 물든 하늘과 바다는 찬란했다. 남편이 팔을 올려 가만히 내 어깨를 감쌌다. 지금 우리의 뒷모습은 어떨까? 문득 궁금해졌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했다. “어쩌면 눈부시게 아름다울지도 몰라. 연예인이라면 파파라치라도 붙어 사진 한 장 남겨줄 텐데. 아, 아쉽다.” 


“여보, 우리 변산에 오길 참 잘한 것 같아.” 돌아오는 길, 남편에게 말했다. 무작정 떠난 하루치 여행에서 느끼는 희열이 무척 컸다. 뜻밖의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거창한 여행을 꿈꿨다. 유명한 목적지가 있어야 하고, 멀리 가야만 진짜 여행이라 착각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마음이 통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어느 곳이라도 훌륭한 여행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국립공원 여행’을 마음먹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이 여행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신비한 에너지가 쌓인다. 겨우 세 번의 여행을 함께했 뿐인데 조금씩 단단해지고, 한 뼘씩 자라는 느낌이다. 멈추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 

나는 이 여행이 참 맛깔스럽고 달다. 

2021.05.19  NO.3 변산반도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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