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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May 30. 2023

지리산 노고단에서 결심한 이것,
남편과 딸은 환호했다

꽃중년 부부의 국립공원 투어 NO.2_지리산국립공원

예사로운 일상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자주 들뜨고, 자주 기뻤다. 첫 소풍을 기다리는 1학년 아이처럼 한밤, 두 밤 손꼽아 날짜를 세는 습관도 생겼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스탬프 투어를 다녀온 후부터다. 

하루 끝, 잠자리에 누워 청산도를 떠올렸다. 깔 말춤 한 듯한 파란 하늘과 바다, 노란 유채꽃이 마음에 닿으면 고단한 하루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청보리밭을 스치는 청명한 바람 소리는 어릴 적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 같았다. 오랜 불면증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여행의 마력’이었다.      


“여보, 다음은 어디로 가? 어디야? 응?”     


퇴근한 남편의 꽁무니를 졸졸 쫓으며 채근했다. “어디로 가? 어디?” 의젓함이 사라진 나는 만화 주인공 ‘짱구’처럼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배고파!”였다. 맞다. 배고프면 친절할 수 없지. 나는 잽싸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껴둔 두릅을 꺼내 데치고, 봄나물도 네 종류나 무쳤다. 고등어를 굽고, 상추 겉절이, 달래 된장찌개도 끓였다. 잘 대접해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 것 같았다.      


“이번 여행은 산! 지리산으로 갑시다.”     


대접받은 남편은 금방 상냥해졌다. 4월 24일에 지리산 갈 거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이 남자 ‘점쟁이 빤스’를 주워 입었나 보다. 마침 산으로 가고 싶던 참이었다. 나는 저승사자를 대접하고 수명을 연장한 설화 속 사람처럼 두 손 모아 기뻐했다. 하지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지는 않았다. 피곤한 몸으로 구첩반상을 차리느라 똥 빠지는 줄 알았으니까.


그날 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다정해졌다. ‘썸’ 타던 1998년 2월을 떠올렸다. 

부캐가 ‘산악인’이었던 남편은 좋아하는 여자를 무작정 지리산으로 데리고 갔다. ‘미끄러지면 창피할 것 같은데…….’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이었던 나는 지리산 성삼재에 쌓인 눈을 보고 골똘히 생각했다. ‘그래, 눈 딱 감고 한쪽 손만 내어주자.’ 꽁꽁 언 산에서 살아 돌아올 유일한 방법이었다. 손을 잡고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그로부터 8개월 후.     


“많이 변했겠지? 다시 가면 진짜 새로울 것 같아.”

“내려오는 길에 끝말잇기 했던 거 생각나?”

“나지, 나지! 내가 자기 국문학과 나온 거 맞냐고 놀렸잖아.”

“크크크, 생각할수록 웃겨. ‘스위스, 스틱…… 틱 꺼져!’ 그랬잖아.”     




25년 전, 눈 덮인 산에서 멋없이 “틱 꺼져!”를 외쳤던 남편은 ‘끝말잇기 고수’ 앞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재생했다. “됐고! 지리산 갈 계획이나 브리핑해 보셔.” 정색하며 말했다. 남편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고 우리는 성삼재를 넘어 노고단에 오를 거라고.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자 “하나도 안 힘들어. 지리산 코스 중에 가장 쉬워!”하고는 이불속으로 줄행랑쳤다.     


망했다! 등산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동네 뒷산 오르는 것도 버거워하는 ‘저질 체력’이다. 30대 중반, 월출산 야간산행을 끝으로 높은 산을 가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8할이 지방 덩어리인 중년의 아줌마다. 숨쉬기 운동도 버거운 마당에 등산이라니. 이런 여행이라면 안 가고 싶었다. 실은 옷 걱정이 더 앞섰다. 산에 입고 갈 만한 등산복이 없었다. 있긴 있다. 작아져서 지퍼가 안 올라가는 오래된 바지 하나. 그 밤, 나는 느닷없이 옷장 정리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현실 자각 타임’이었다.     


“국립공원으로 놀러 가자며? 이건 계약 위반이야.” 

“걱정하지 마! 등산이라고 할 수도 없어. 그냥 산책이야, 산책.”     


날짜는 다가오는데 등산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편은 초보자도 쉽게 올라가는 최단코스라며 “자기는 뛰어갈걸!” 하고 안심시켰다. 병아리 눈물만큼 마음이 놓였다. “엄마 아빠, 기쁜 소식! 이번 여행 나도 따라가요.” 방에서 화상 강의를 듣던 큰딸이 카톡을 보냈다. “이건 부부 여행인데?” 하려다 특별회원을 영입하기로 했다. 사람이 많으면 왠지 더 신날 것 같았다. 저녁 먹고 기운이 넘쳐서 마트로 달려갔다. 여행의 즐거움은 먹는 거니까.   

  

금요일 밤, 배낭을 꾸렸다. 등산 장비 하나 없는, 먹거리만 가득한 배낭 3개가 현관 앞에 줄을 섰다. 드레스 코드는 청바지와 바람막이 점퍼. 25년 전의 썸녀 콘셉트이다. 선글라스를 추가했다. 산에 오는 사람들이 뭘 입었는지 절대 보지 말기로 했다. 아차, 제일 중요한 국립공원 여권을 깜빡했다. 그게 없으면 ‘스탬프 투어 인증’은 꽝이다. 노고단 탐방은 사전 예약이 필수다. 예약확인까지 마치고 나니 모든 게 완벽했다. 제법 산에 가는 기분이 들었다.

   

토요일 아침, 딸과 함께 두 번째 부부 여행을 시작했다. 섬진강 철쭉 길을 따라 ‘지리산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천은사를 지나 ‘시암재’에 도착했다. 봄 햇살을 받으며 마시는 시암재 휴게소 커피는 환상적이었다. 산행 들머리인 ‘성삼재’로 이동했다. 배낭을 메고 신발 끈을 조이는 순간 지리산에 왔음을 실감했다. 좌 남편, 우 딸의 손을 잡고 노고단을 향해 첫걸음을 뗐다. 마치 종주라도 할 것처럼 비장했다. 

노고단에 올라 25년 전 추억을 떠올리는 우리 부부_ 오길 잘했다!

지리산의 유명세는 여전했다. 탐방로 입구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등산 열풍이 불고 있다더니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 지리산에 모인 것 같았다. 

걱정과 달리 길은 수월했다. “오를 만하네? 괜히 겁먹었어.” 슬슬 겸손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체력적 한계에 직면하고 말았다. 종아리에 신호가 오기 시작하더니 숨이 차고, 무릎 관절이 욱신거렸다. 갈림길에서 남편과 딸은 잘 닦인 탐방로 대신 가파른 돌길을 택했다. 몸에 ‘뚱보균’을 키워본 적 없는 두 사람은 오르막에서도 사뿐거렸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죽을 것 같은지 알 수가 없다. 뒤따라가다 심통이 나서 “윽, 재수 없어.”라고 욕할 뻔했다. 

나는 인내심 빼면 시체.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보란 듯이 올라가기로 했다. ‘봄나들이 삼아 천천히 걷는 거지 뭐.’ 최면을 걸며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그렇게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다.



“밥 먹자!”

우리 셋,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대피소 쉼터는 밥 먹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형 야외 식당 같았다. 사람들은 거리를 유지한 채 말없이 밥을 먹고는 규칙처럼 다시 마스크를 쓰고 자리를 정돈했다. 코로나가 바꿔놓은 등산 문화였다. 배꼽시계가 요란을 떨었지만, 만원이라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배고플 때 옆집 밥상을 보며 우아함을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점찍어 둔 테이블이 우리 차지가 됐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우아하게 버틴 보람이 있었다. 점심 메뉴는 김밥과 컵라면. 라면이 익어가는 3분을 참는 건 고역이었다. 김밥 꽁다리를 잽싸게 삼켰다. 꿀맛이다. 남편과 딸은 배고픔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컵라면 그릇에 코를 박고 면발을 흡입하다 이벤트를 발견했다. ‘뚜껑과 수프의 행운 메시지를 연결하여 자신만의 메시지를 만들어 인증사진 이벤트에 참여해 보세요!’라고 적혀있었다. 타고난 공짜 복이 없으니 응모 같은 건 안 한다. 단지 궁금해서 메시지를 합쳐봤다. ‘올해 안에 운동한다.’ 헉! 뭔가 들킨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온몸이 엑스레이 찍힌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먹었던 컵라면 속 행운 메시지. '올해 안에 운동을 한다'는데 나는 과연...


노고단 전망대가 코 앞이다. 우리는 다시 힘을 내 산길을 올랐다. 배를 채우는 동안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리가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1km도 못 되는 거리를 파김치처럼 축 처져서 올라갔지만, 정상에 들어선 순간 가슴이 벅찼다. 이 맛에 산에 오르는구나 싶었다.

25년 만에 찾은 노고단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저 멀리 보이는 능선을 따라 감동이 파도를 탔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반야봉은 웅장했다. 언젠가는 그 봉우리에 올라 일출도, 낙조도 맘껏 누리고 싶다는 욕망이 차올랐다. ‘그러자면 살 좀 빼자!’ 마음의 소리가 귀를 뚫었다.     


하산길, 성삼재 탐방센터에서 국립공원 인증 스탬프를 획득했다. 짜릿했다. 겨우 두 번 만에 ‘도장 깨기’의 매력을 알아버렸다. 나는 남편에게 “남은 스무 번의 여행에 내 인생 올인할게.”라고 말했다. 남편은 그 중대한 발표에 그냥 웃었다. 

2021년 4월 24일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두 번째 인증, 지리산 성삼재 탐방센터 

얼마나 느리게 걸었던지 3시간이면 다녀올 길을 4시간이나 걸렸다. 너무 좋아서 사진 찍느라 그랬다는 핑계를 댔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연둣빛 나뭇잎이, 분홍빛 진달래가 자꾸만 유혹했으니까. 보면 안 될 것도 보긴 했다. 다음번 산행에는 곁눈질로 슬쩍 본 것들을 내 방식대로 해석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니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리산 종주를 다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중대한 발표를 했다.

 “오늘부터 할 겁니다. ……다이어트!” 남편과 딸은 나의 새 목표에 환호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당당히 요구했다. 지금 당장 닭가슴살과 샐러드용 풀떼기를 사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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