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중년 부부의 국립공원 탐방기 NO.1_다도해해상국립공원
평온한 듯하지만 삶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무작정 열심히 사느라 마음에 헛헛했다. 인생 2막을 잘 살아내기 위한 ‘리셋’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여행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날, 월출산 아래서 남편과 ‘부부 여행’을 약속했다. 비행기 타는 해외여행도, 명품 여행도, 호캉스도 아닌 자연 속에서 힐링하는 ‘녹색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목적지는 우리나라 국립공원이었다.
‘작심삼일’이 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첫 여행은 어디로 갈까? 특별히 가고 싶은데 있어?”
남편이 방바닥에 펼쳐놓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실은 국립공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재빠르게 여권을 가져와 목차 페이지를 열었다. ‘헐, 다 돌아다니려면 2, 3년은 족히 걸리겠는걸.’
서울 북한산을 시작으로 제주 한라산까지 국립공원이 스물두 곳이나 됐다. 목차를 훑던 시선이 중간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서 멈췄다. 대부분 일곱 글자 이름을 가졌는데 혼자만 아홉 글자였다. 긴 이름도, 넓은 면적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해상국립공원이라는 사실에 혹했다.
“여기, 청산도!”
“그래, 거기로 가자!”
우리 부부, 죽이 척척 맞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러잖다. 조금 싱겁게 첫 여행지가 결정됐다. 청산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섬으로,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다. 흑산도, 홍도, 여수 밤바다, 향일암 등 쟁쟁한 추천 여행지가 있었지만 오로지 청산도였다. 꽃피는 4월의 청산도! 입이 헤벌쭉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전부터 노래를 불렀었다. 봄이 오면 청산도에 가고 싶다고.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졌다. 2021년 4월 9일 이른 새벽, 나란히 커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여행, 어떠신가요?” 하고 물으려다 너무나 오글거려 도로 삼켰다. 늘 그렇듯 새로운 시작은 설렘과 두려움의 공존이다. 마음이 들떠 의젓한 중년처럼 굴 수 없었다. 그 옛날 첫 수학여행을 떠나던 6학년 소년과 소녀를 소환했다. 두 친구는 달리는 차 안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떠들고 열창했다.
완도항에 도착했다. 배표를 사러 여객선터미널에 들어갔다가 흠칫 놀랐다. 코로나 시국이지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꽃이 피고 봄바람이 살랑거리니 어디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었을 테다. 우리 부부처럼.
마스크를 쓰고 다정하게 말 거는 여행객은 없었다. 누구의 간섭 없이도 ‘거리 지키기’는 완벽했다.
그러느라 표 끊는 시간이 길어져 나는 여러 번 심호흡했다.
지도를 챙겨 배낭에 넣고 배에 올랐다. 아침 8시 30분, ‘청산도호’가 바다를 가르며 출발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어도 바닷바람은 쌀쌀했다. 바람이 온몸으로 파고들어 옷깃을 여미느라 정신이 없었다. 배를 탈 때는 멋 내지 말자 다짐을 했다. 추워도 사진은 찍어야 했다. 몇 해 전 생일 선물로 받은 DSLR 카메라를 꺼냈다. 멀어져 가는 완도항을 찍고, 이름 모를 섬과 갈매기를 찍었다. 스치는 순간을 기억에 남기고 싶어 마치 사진작가처럼 셔터를 눌러댔다. 여행의 기쁨 중 하나였다.
추워도 선실에 들어가지 않고 갑판에서 놀았다. 4월의 해풍이 뺨을 스치는 순간 간질간질했던 연애 시절의 첫 영화가 떠올랐다. 주위를 슬쩍 살피고는 뱃머리에 섰다. 영화 ‘타이타닉’의 여주인공 로즈(케이트 윈슬렛)처럼 양팔을 벌렸다. 부끄러워서 눈은 감지 않았다.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등 뒤에서 나타나 백 허그를 하며 ‘당신을 믿어요!’ …… 명대사는커녕 남편이 겁 없이 뱃살에 손을 올렸다. ‘셀린 디온’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음성지원 되던 영화 OST가 놀라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런 환장할! 이건 '로맨스'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고요! 버럭 화를 내려는 순간 배가 섬에 닿고 있었다.
“다 왔다! 내리자 여보.”
아무리 봐도 운이 좋은 남자다. 드디어 도청항에 도착했다. 청산도를 상징하는 푸른 청보리와 노란 유채꽃이 하늘하늘 춤을 추며 반겼다. 살랑거리는 4월의 섬 바람이 아기 피부처럼 보드라웠다. 말할 수 없이 포근한 섬이었다. 청산도는 2007년 아시아 최초로 ‘슬로 시티’로 지정된 ‘걷기 좋은 섬’이다. 서편제 촬영지와 봄의 왈츠 세트장으로도 유명하다. 꽤 익숙한 모습으로 편안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선택, 탁월했다. 역시 오길 잘했다.
우리 여행의 목표는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으며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 제주 올레길처럼 청산도에도 1코스부터 11코스까지 다양한 ‘슬로길’이 있었다. 우리는 1코스 도청항에서 시작해 최대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맘껏 걸어보기로 했다. ‘걷기 여행’이라는 구체적인 타이틀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무언의 눈빛으로 자연스럽게 그리 합의했다.
남편과 나는 다정히 손을 잡고 걸었다. 연애하는 기분이었다. 함께 나란히 발맞춰 걷는 것만으로도 로맨틱했다. 한산한 청산도 길은 놀멍, 쉴멍 하며 걷기 좋았다. 다랑이 다랑이마다 피어난 노란 유채꽃에 설레고, 밭두렁, 논두렁을 걷다 만난 여린 들꽃에 설렜다. 조금은 삭막했던 중년 부부의 가슴에 ‘봄 멋’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걷다가 힘들면 아무 곳에나 주저앉아 질척거려도 눈부신 바다가 너그러이 안아주었다. 해안을 걷는 매력은 또 다른 힐링이었다.
꼭 들려야 할 곳이 있었다. 지역 어머니들이 운영하는 정겨운 ‘서편제 주막’이다. 다리가 뻑뻑해질 때쯤 주막을 찾았다. 막걸리와 생소한 군소 무침을 주문했다. 군소는 물이 맑은 얕은 연안에 서식하는 육지의 민달팽이와 닮은 ‘바다 달팽이’라고 남편이 알려줬다. 역시, 검색의 달인이다. 비 호감형 새까만 연체동물을 먹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막걸리 한 잔이 들어가니 그런 건 따질 필요가 없었다. 웬걸 새콤하면서 쫄깃쫄깃 맛있다. 평상에 앉아 앞을 보니 시원스레 바다가 펼쳐졌다. “캬!”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걸 보니 최고의 안주는 바다였다.
막걸리 한 잔에 다리가 풀렸다. 미련 없이 술잔을 내려놓고 다시 남편의 손을 잡았다. 내내 따뜻했다. 서편제 길을 돌아 청계리 범 바위와 상서마을 지나고, 돌담마을과 신흥리 풀등 마을도 지났다. 청산도의 바다와 산, 스치는 모든 것이 평화롭고 따뜻했다. 아이처럼 원 없이 웃고 떠들며 걷는 사이 마음이 말끔히 비워지고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평온했다.
여행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은 달랐다. 동화 속 기묘한 시간의 흐름 같은 하루였고, 한 편의 꿈같은 여행이었다. “여보, 진짜 잘 왔다. 그렇지?” 남편의 말에 “응, 다시 태어나도 부부로 만나자!”라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마주 보며 소리 내어 깔깔 웃었다. 청산도항으로 돌아오는 마을버스 안에서도 우리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낭만 가득한 여행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정도리 탐방지원센터에 들렀다. 국립공원 여권에 첫 스탬프를 찍는 의미 있는 인증의 순간을 갖기 위해서다. 꾹꾹 눌러 찍은 도장은 우리 부부의 마음에 다음 여행에 대한 선명한 의지를 새겼다.
‘부부 여행’은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매일 지지고 볶으며 지겹도록 마주하는 사이지만, 신기하게도 늘 함께하는 여행을 꿈꾼다. 거창한 여행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 어디서든 서로에게 다정할 수 있는 소박한 여행이면 좋겠다. 청산도에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