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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Feb 06. 2023

눈 뜨고 코 베이듯 시작된
국립공원 여행

부부 여행의 시작

코로나로 지쳐있던 2021년 4월 4일, 봄비가 내렸다. 

입학식은커녕 1년 내내 학교 한 번 제대로 가보지 못한 둘째가 대학 2학년이 되었다. 곧 끝나겠거니 했지만 2021년 봄에도 어김없이 온라인 수업은 시작되었고, 공부방을 운영하던 나는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소독에 미쳐가는 중이었다. 학생들이 줄줄이 확진되는 바람에 동네가 발칵 뒤집혀 흉흉했다. 사람 간 경계가 극에 달하고 도를 넘어선 확진자 신상털이에 무섭고 화가 났다.      


봄비가 내리니 첫사랑이라도 본 듯 가슴이 뛰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잡념이라도 털어낼까 싶어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비멍을 시작했다.

‘우리 집 청년들을 어찌해야 하나?’

‘이 시국에 공부방을 지속할 수 있을까?’

‘잡념 털이’는 고사하고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답답하고 한숨이 났다. 그러다 울컥 눈물이 났다. 헉! 이것은…… 말로만 듣던 코로나 우울증? 

‘아냐, 그럴 리 없어. 만약 그렇다면 너 따위한테 지지 않을 테야.’


때마침, 주말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내편(이리 불러야 평생 내편으로 착각하며 살 수 있다.)이 나를 찾았다.

“여보, 바람 쐬러 갈까?”

“나가도 되나?”

“마스크 잘 쓰고 드라이브 가자. 가고 싶은데 있어?”

“아무 데나.”

반갑지만 걱정이 앞섰다. 사실, 외출을 자제하며 최소한의 동선으로 살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스스로 애쓰는 중이었는데 그런 나를 답답하게 여기는 지인도 있었다. 생각은 자유지만 드러내 비꼴 일은 아니기에 그 지인은 ‘인맥 다이어트’ 1순위가 되었다. 

   

‘아무 데나’는 곧 나가고 싶다는 뜻. 눈치 빠른 내편은 아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보온병에 가득 채웠다. 봄비, 커피, 드라이브. 환상의 조합이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지만 차는 달리고 있었다. 

“맞다, 월출산 유채꽃!” 

열심히 근교 드라이브 코스를 찾던 내편은 이내 월출산 앞마당에 핀 유채꽃을 떠올렸다. 


한갓진 일요일 오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채밭으로 향했다. 마음은 이미 꽃밭을 나는 나비였다.

제주도 못지않은 드넓은 밭에 온통 노란 물결이 일렁였다. 이번엔 꽃멍이다. 베란다 비멍에 던져놓았던 오전의 시선을 거두어 노란 밭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감성을 자극했다. 침이 꼴깍 넘어가고 입이 쩍쩍 벌어지는 걸 보니 뷰 맛집이 틀림없다.

봄비 내리던 2021년 4월 4일의 월출산 유채꽃밭

노란 밭고랑을 넘나들던 시선이 건너편 웅장한 산에 닿았다. 월출산이었다. 내편의 눈치 센서가 재빠르게 발동했다.

“가볼래? 산 아래 예쁜 카페도 있던데.”

말 떨어지기 무섭게 밭에서 산으로 갔다.

“숲길 좀 걷다 산 아래 카페에 가서 분위기 좀 잡아요.” 하려는데 내편이 뚜벅뚜벅 공원 탐방안내소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입이 귀에 걸린 채 오라는 손짓을 했다. 

“국립공원 여권? 이게 뭔 데?”

“응, 스탬프 투어. 사인해. 국립공원으로 쉬엄쉬엄 놀러 다니자.”

구하기 어렵다는 그 국립공원 여권? 이 사람, 다 계획이 있었다. 출발 전 전화로 여권 잔량 여부를 확인 한 모양이다. 마누라 힐링도 시키고, 바라던 여권도 손에 넣었으니 그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직진남 포스가 좔좔 흐른다.      


“첫 여행은 어디로 갈까?”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는다. 대답 없이 눈만 말똥거리는 마누라에게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를 설명하느라 마스크가 들썩들썩 요동을 친다. 

“그래, 가자 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줄까 싶었다. 실은 어디론가 무척 떠나고 싶던 참이었다. 초록창에게 물었다. 내가 이 여행을 허락해도 되는지, 가면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 

‘뭐야 뭐야, 국립공원이 22개나 된다고? 아름다운 자연 속 힐링? 그렇다면 무조건 Go!’ 친절한 초록창은 순식간에 나를 홀려 놓았다. 더 따져볼 것도 없이 여권을 펼쳐 자발적 사인을 했다. 이 여행 적극 찬성이다.

    



눈 뜨고 코 베이듯 얼떨결에 국립공원 투어를 약속했지만 내심 반가웠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기에 억울할 일도 없는 코로나 생활이었다. 하지만 갑갑한 일상으로부터 탈출이 절실했다. 그보다 준비 없이 맞이한 서먹한 중년의 삶에 리모델링이 필요했다. 연로하신 양가 부모님을 챙겨야 하고, 아이들의 대학 졸업과 결혼, 우리의 노후 생활도 준비해야 하는 굵직한 인생 프로젝트가 남아있으니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하던 차에 선물처럼 단비가 내렸다. 

집으로 돌아와 가장 예쁘게 나온 증명사진을 찾아 여권에 붙였다. 비어있는 스물두 칸의 여백에 둘만의 추억을 새길 생각에 설레고 기뻤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어디가 좋을까? 바다? 산? 빨리 결정하자." 흥분의 도가니탕을 한 솥단지 끓여 벌컥벌컥 들이켰다. 닷새 후 첫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문득 시계를 보니 깊은 밤을 지나고 있었다. 내편과 나는 파워 J형, 마음이 달아올랐으니 망설임은 사치다. 


'아무 데나.'가 아닌 정해진 스물두 곳의 특별한 데이트 장소가 생겼다. 마음껏 수다를 떨고, 마음 밑바닥까지 내 보이며 오롯이 부부만을 위한 진실한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여정이 우리 부부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르지만, 서로를 다독이며 즐겁게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나저나 뭘 입고 데이트 가지? 취미 생활은 장비발, 여행은 옷발.   

“여보, 아웃도어가 필요해!”   

낙조가 아름다웠던 변산반도 국립공원의 해변 (세 번째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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