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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Jul 05. 2023

성인 네 명이서 하는 가족 여행은
처음입니다만

꽃중년 부부의 국립공원 투어 NO.4~NO.6_치악산, 오대산, 설악산

“끝!”

둘째 달이가 노트북을 덮으며 2학년 1학기 종강을 알렸다. 달이는 팬데믹이 만들어 낸 웃픈(웃기고 슬픈) 현실의 주인공, ‘코로나 학번’이다. 신입생 환영회는커녕 강의실 한 번 들어가지 못한 채 비대면 수업으로만 2학년 1학기를 마쳤다. 

캠퍼스의 낭만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었다. 벌써 세 번째 방학이 되도록 동기들과 밥 한 끼 나누지 못했고, 고대하던 동아리 활동도, 설레는 MT와 축제도 경험하지 못했다. 제 방 책상에 앉아 교수님을 만날 때는 상체만 사람 꼴이었다. 달이는 잠옷 바지에 어울리는 화장 기술을 터득했지만, 꿈을 찾아 캠퍼스를 누빌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였다.      

 

“으윽, 진심 휴학하고 싶어!”      


달이는 차라리 군대라도 가고 싶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옆방에 상주하는 또 다른 대학생 별이가 “가자, 가. 여군 좋지!”라며 문을 열고 나왔다. 역시 상체만 예의를 갖췄다. 화장은 수준급이고 헤어 고데기로 연출한 웨이브는 예술이다. 4학년 언니답다.

첫째 별이의 상실감도 만만치 않았다. 팬데믹 전 학생회 활동을 활발히 했던 외향형 별이는 달뜨는 밤이면 마스크를 쓰고 동네 공원을 뛰어다녔다. 이러다 마라톤 선수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안타깝고 속상해서 나도 함께 달렸다. 이 고약한 현실에서 자매의 청춘이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날마다 짠한 마음은 아니었다. 팍팍한 현실 앞에서 가끔 모성 본능을 잃고 사나운 개가 되기도 했다. 하필 그 무렵 나도 집에서 밥벌이 중이었고, 인생 첫 다이어트로 예민했다. 자매의 시간표를 거실 벽에 붙였다. 오디오가 켜지는 수업에는 빨간색 밑줄을 긋고 별표를 했다. 나도 모르게 무단 침입자가 될 수 있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생각 없이 청소기를 돌렸다가 혼이 난 후로는 시간표를 달달 외웠다. 창살 없는 감옥이 이런 건가 싶었다. 그건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쉬는 시간에도 문밖으로 나올 자유를 얻지 못했다. 엄마의 일터가 거기에 있는 이유다.     


내 탓인 것 같아 미안했다. 정신 차리고 주섬주섬 모성애를 챙겼다. 일상을 환기할 방법이 없을까. 최선을 다해 사는 우리에게 너그럽게 여유를 주고 싶었다. 코앞에 개학이 들이닥치고 밀린 숙제로 애간장이 녹아도 방학은 일단 놀고 보는 것. 가출을 결심했다. 남편의 동의를 얻어 다가올 부부 여행을 가족 여행으로 정정했다. 


“선착순 2명! 국립공원에 함께 갈 특별회원을 모십니다.”   

  

가족 채팅방에 회원 모집을 알리는 메시지를 띄웠다. 애쓰지 않아도 순식간에 마감됐다. 


그날 밤, 거한 환영식을 열었다. 숨겨진 목적은 ‘치팅데이’였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한 달, 내 몸에서 3kg의 살덩이가 사라졌다. 경험한 적 없는 ‘상실의 기쁨’이었다. 비싼 양장피와 바삭한 탕수육을 보고도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때야 알았다. 사람이 너무 기쁘면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을. 신입회원들은 눈치 보지 않고 잘 먹었다. 정회원의 ‘꼰대 맛’을 보여주려는 순간, 남편이 숟가락 마이크를 잡았다.     


“아직 비행기 타기는 좀 그렇고 강원도 어때? 각자 원하는 여정을 생각해 보자고.”     


다음 날, 우리 집 호주는 단톡방에 강원도에 대한 정보를 시시각각 올렸다. 원래 목표인 국립공원을 포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휴가 신청을 하고 퇴근했다. 엣티제(ESTJ) 별이는 열성적인 추진력으로 여행의 세부 계획을 세워 브리핑했다. 플랜 B도 있었다. 여행사 프로그램 같아 당장 떠나고 싶었다. 인프피(INFP) 달이는 “정해진 건 재미없어!”라며 별이의 촘촘한 일정에 태클을 걸었다. 해맑은 얼굴로 몽상에 빠진 채 벌써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워드 작업한 준비물 목록을 벽에 붙였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서둘러 가출했다. 제법 여름 냄새가 나는 2021년 유월 중순, 넷이 함께 강원도 여행을 시작했다. 만만치 않게 먼 곳이라 자주 올 수 없으니, 국립공원도 3곳이나 포함했다. 첫날은 국립공원의 자연을 관광하듯 즐기고 나머지 시간은 자매를 위해 쓰기로 했다. 시간에 쫓기는 여행이 될까 봐 걱정됐지만, 이른 새벽 출발한 덕에 ‘치악산국립공원’에 도착하고도 아직 아침이었다.     


보슬비 내리는 치악산의 황장목 숲길은 운치 있었다. 청명한 계곡물 소리에 온갖 시름이 저절로 빠져나갔다. 숲을 좋아하고 비를 좋아하는 나는 금강소나무길을 거닐며 황홀경에 빠졌다. 문득 나만 좋은가 싶어 자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깔깔대며 ‘인생샷’을 남기느라 정신없었다. 구룡사 ‘화석 은행나무’ 앞에서는 우산 속 ‘부부샷’을 찍겠다며 어지간히 괴롭혔지만, 그 덕에 쓸만한 부부 사진을 건졌다. 둘일 때는 불가능한 횡재다.     

2021.06.18. 치악산국립공원_ photo by 쓸모

비로봉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대산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오대산 진고개와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트레킹 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 중 가장 바라던 곳이라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멈춤은 억압이 아닙니다. 멈춘다는 것은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숲에 들어 느린 걸음을 걷다 마주친 글귀에 마음이 말랑해졌다. 굵어진 빗줄기로 가벼운 산책에 그쳤지만, 오롯한 우리만의 평화를 즐겼다.      


마음이 충만해도 배는 늘 밥때를 마다하지 않는다. 자매의 ‘맛집 부수기’ 리스트에 들어있던 산채마을 맛집을 찾아 GPS를 켰다. 조금 늦은 점심이라 기다림 없이 떡갈비 정식과 곤드레 솥 밥을 맛볼 수 있었다. 여행의 기쁨 중 제일은 먹는 재미. “맛있어, 맛있어!”를 연발하며 누룽지까지 싹싹 긁어먹는 자매를 보니 밥 사 먹이는 마음이 뿌듯했다.      

2021.06.18.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곤드레밥과 떡갈비 정식_ photo by 쓸모

배가 차면 활기가 넘치는 법. 우리 식구는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설악산국립공원’으로 금세 이동했다. 마음 같아선 대청봉에 오르고 싶었으나 ‘힐링 여행’이라 이름 붙였으니, 신입회원들을 고생시킬 수는 없었다. 권금성까지 케이블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케이블카는 조금 가벼워진 나를 환대했다. 보답하는 마음으로 때때로 숨을 참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더니 안전하게 권금성까지 데려다줬다.


비가 그친 권금성은 기대 이상으로 붐볐다. 코로나19로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막상 여행을 떠났어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은 웅장한 풍경 앞에서도 크게 감탄하지 못했다. 마스크를 고쳐 쓰고 거리 유지에 신경을 쓰느라 조심스럽게 웃었다. 우리도 외설악의 멋진 풍경을 내려다보며 점잖게 사진을 찍고 속으로만 환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나온 기쁨은 짜릿했다.     


목포를 떠나 원주에서 평창, 평창에서 속초로 숨 가쁘게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3개의 국립공원 스탬프를 획득했다. 총 여섯 번의 국립공원 탐방을 완료한 셈이지만 속성반 수업을 들은 것처럼 애매했다.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그렇더라도 나머지 여정은 이제 딸들의 몫이다. 자매가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할 수 있도록 남편과 나는 기꺼이 매니저와 기사가 되기로 했다.     

 

“고성으로 출발!”

들뜬 달이가 소프라노 톤으로 새 여행을 알렸다. 역시 젊음은 싱그럽다. 숙소로 이동 후 짐을 풀고 새로운 여행을 세팅하기로 했다. 자매가 계획한 여행은 ‘동해안 비치 투어.’ 금요일 저녁, 여행객이 들기 시작한 도로는 서서히 막혀갔다. 어쩌면 새로 시작할 여행은 호젓했던 낮 동안의 여행과는 다르게 가는 곳마다 복닥거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의 걸음을 쫓아가려면 잘 먹어야 한다. 속초 관광 수산물 시장에 들러 유명한 닭강정을 사고 동명항 회센터에서 모둠회를 포장했다. 우리 식구는 밀접 접촉자로 자가격리를 한 경험은 있어도 코로나 확진은 없었다. 돌아가 만날 나의 학생들과 남편의 회사 동료들을 위해 북적거리는 관광지 대신 숙소를 택했다. 다행히 우리가 묵을 ‘켄싱턴리조트 설악비치’는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즐길 거리가 가득했다. 하얀 백사장을 거닐고, 동화 같은 상징물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고 돌아와 시원한 맥주잔을 부딪치며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를 외쳤다. 남편과 나도 20대 청춘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우리는 밤새 수다를 떨다 쪽잠을 자고 일어나 동해의 찬란한 일출을 맞이했다. 밥이 먹힐 리 없지만 치렁한 원피스를 차려입고 까칠한 눈을 치뜨며 우아하게 조식을 먹었다. 계획된 것들은 잘 따라야 불화가 생기지 않는다. “다 먹었지? 양양으로 가야 해. 서둘러.” 별이의 여행 버킷리스트는 사람을 신처럼 움직이게 했다.      


2일 차 여행은 하조대와 낙산사에서 시작했다. 재건된 낙산사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오래전 화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자매가 고대하던 ‘서피 비치’로 향했다. 힙한 청춘들이 가득한 그곳은 마치 동남아 휴양지 같았다. 자매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감성 사진을 찍느라 비치를 누비고 다녔다. 나는 선베드에 누운 사람들의 구릿빛 피부와 파도 타는 서퍼들을 흘깃거렸다. 부러움에 심통이 나 내 청춘 돌려달라며 남편에게 괜한 앙탈을 부렸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남편은 “집에 두고 왔나 봐.”라고 했다.  


“완전 멋져! 진심 서핑하고 싶다.”

“우왕, 휴양지 냄새 솔솔~ 선셋 바도 있는걸.” 


청춘은 청춘을 알아보는 법. 비치의 젊은 열기에 매료된 자매는 흥분했다. 뜨거운 모래밭에서 외발 뛰기를 하면서도 집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근처에 엄청난 막국수 집이 있대. 사람 몰리기 전에 가자.” 소리쳐 불러 내려다 무식한 엄마처럼 보일까 봐 카톡을 보냈다. “네네, 갑니다요, 가.” 자매의 표정에 아쉬움이 뚝뚝 흐른다.

2021.06.19. 양양 서피 비치_ photo by 쓸모

“카페 가서 사진 보여줄게. 엄청난 인생샷을 건진 것 같아.” 

동치미국수로 마음마저 시원해진 자매는 생글거리며 내 팔짱을 꼈다. 체포당하는 범인 같았지만 좋아서 웃음이 났다. 자매는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강릉 ‘안목해변’을 택했다. 긴 백사장이 있는 안목해변은 커피 거리로 유명하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많다는 뉴스를 본 적 있어서 흔쾌히 따라나섰다. 바다를 마주하기 전인데, 푸른 바다향이 밀려오는 듯했다.     


하늘과 맞닿은 동해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향긋한 커피를 마시고, 몸에 힘을 뺀 채 느긋하게 백사장을 거닐었다. 해변에 돗자리 깔고 앉아 일몰을 감상할 때는 가슴이 뜨거웠다. 우리 넷, 해가 기우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앉아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었다. 아마도 각자의 가슴에 여행의 기억을 저장했을 테다. 마음이 부들거리고 솜사탕같이 달았다. 안목해변은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리가 달려온 길이 대략 1,300km 정도라고 남편이 말했다. 먼 길이었지만 서로 챙기며 다정했으니 지루할 틈 없는 여정이었다. 자매와 함께한 여행은 부부 여행과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봄처럼 화사하고 여름처럼 강렬했다. 

가족 여행의 기억은 무수히 많지만 어른 넷으로 함께한 여행은 처음에 가깝다.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세상에 당황하고 휘청거렸어도 그 덕에 떠날 수 있었고, 더 단단한 우리가 되었다. 참으로 쓸모 있는 가출이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여행은 결국 제 자리를 찾아 다시 돌아오는 것. 떠났다가 돌아온 자리는 훨씬 아늑하다. 다를 것 없는 삶이겠지만 내일을 살아낼 용기는 더 커졌다. 오래도록 이 순간을, 우리의 여행을 기억하자.     

여행은.. 결국 제 자리를 찾아 다시 돌아오는 것_ photo by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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