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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Aug 07. 2023

이게 바로 등산의 맛

국립공원 투어 NO.7_내장산국립공원

‘휴가철 타지역 방문으로 확진자 폭증. 휴가는 가급적 집에서.’     

  

2021년 여름, ‘재난안전문자’가 폭주했다. 코로나 확산과 동선 확인은 기본이고 변이바이러스, 호우주의보와 폭염경보, 태풍 소식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하루에 10건이 넘는 날도 있었다. 

‘108번 확진자 발생, 〇〇식당 이용자는 선제 검사 바랍니다.’ 확진자는 번호표를 달고 재난 문자에 등장했다. 어딜 갔는지, 얼마짜리 밥을 먹었는지도 공개됐다. 사람들은 도마 위에 생선만 올리지 않았다. 쥐 죽은 듯 사는 게 상책이었다.

설레는 휴가철이지만, 여행은 점점 멀어졌다. 날은 평온한 듯 지나갔어도 속에서는 부글부글 거품이 일었다. 다행히 딸들과 함께한 강원도 여행의 여운은 오래갔다. 여름 내내 그때의 추억을 뜯어먹고 살았다. 잘 삶은 옥수수처럼 달큼하고 쫄깃했다. 

자주 휴대폰 속 사진을 들여다봤다. 장맛비로 우울한 날에도 불볕더위에 타 버릴 것 같은 날에도 사진을 보며 여행을 추억했다. 그날의 하늘과 바다색, 식구들의 표정과 웃음소리까지 또렷하게 살아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속 거품이 가라앉고 기운이 차올랐다. 여행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     

추억을 곱씹으며 5개월을 살아냈다. 여전히 소란스럽지만, 그 틈에도 계절은 오고 갔다. 독감 예방접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너무나 좋아하는 계절, 가을을 만났다.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어 햇살에 반짝였고, 담쟁이 잎은 발개져서 늦가을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처음 보는 풍경처럼 설렜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가을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평소 다니지 않던 아파트 뒷길로 발길을 옮겨 산책하듯 천천히 걸었다. 좀 센티해 보이고 싶어서 부러 주사 맞은 팔을 감싸 안고 걸었다. 무심코 들어선 길에서 만난 풍경은 여행처럼 스며들었다.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휴대폰 플레이리스트를 돌려 ‘잊혀진 계절’을 들었다. 어쩜 그렇게 딱 내 마음 같은 노랜지. 10월의 끝자락에 어울리는 이 노래, 명곡이다. 반복해서 흥얼거리는 동안 지난봄 시작했던 국립공원 여행이 떠올랐다. 

초여름까지 남편과 여섯 번의 여행을 함께하는 동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갈 수 없는 날들이 많아 주춤하는 동안에도 여행은 곁에 남아 일상을 충만하게 했고, 다음을 기대하게 했다. 문득 너무 조심하며 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제약하는 행동이 많았다. 밖으로 나가 여행을 즐겨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나만의 방식대로 여행을 즐기면 된다. 멀리 가지 않아도 거창하지 않아도 되니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기쁨을 누려보자. 


서두르지 않으면 먹었던 마음이 발에 밟힌 낙엽처럼 바스러질 것 같았다. 곧장 집으로 돌아와 국립공원 지도를 펼쳤다. ‘어디로 갈까? 어떤 여행을 하고 싶어?’ 남은 16개의 국립공원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물었다. 

‘뚜렷한 목적을 가져야겠어. 산, 산에 오를 거야. 제대로 된 등산을 하고 싶어!’ 

노고단에서 했던 ‘지리산 종주’의 다짐이 떠올랐다. 6번의 여행을 다녀오고 5개월간의 긴 휴식 끝에 여행을 향한 마음이 또렷해졌다. 2021년 11월, 때마침 ‘위드 코로나’를 위한 ‘일상 회복 거리두기 완화’가 단계적으로 시작됐다. 남편에게 본격적으로 등산하고 싶다고 알렸다. 그이는 며칠간 말없이 등산 장비를 하나둘 챙겼다. 

곧 내장산이 다가왔다. 산을 좋아하고 단풍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내장산. 그 산 정상에 올라 가을을 만끽하며 첫 완등의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11월 6일 새벽, 잠옷 입은 채로 주방으로 들어가 부산을 떨었다. 다시 시작하는 여행을 자축하며 도시락을 준비했다. 마음이 들떠 재료를 준비하는 손길이 막춤 추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고슬고슬 밥을 짓고, 전날 밤 미리 준비해 둔 채소를 꺼내 김밥을 말았다. 보글보글 된장국을 끓이고 과일도 넉넉히 쌌다. 커피를 보온병에 담을 때는 코를 벌름대다 한 모금 마시고 말았다. 빈속에 커피를 절대 마시지 않는 규칙은 깨졌다. 김밥 꽁다리를 주워 먹으며 등산 배낭을 꾸리는 남편의 표정도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떴다. 여행은 이렇게 마음먹은 순간부터 행복이다.     

  

남편과 나는 내장산으로 향했다. 첫 등산이라 바리바리 챙긴 행동식과 등산 장비의 무게가 상당했지만 설렘과 떨림으로 견딜 만했다. ‘내장산국립공원’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서야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다. 한편으로는 이 산을 무사히 오를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지만, 내장산은 호남 5대 명산답게 활기 넘치고 붐볐다. 바닥에 떨어진 단풍이 사람들 발에 깔리기 전에 걸음을 재촉했다. 

단풍 터널을 지나 우화정에서 잠시 휴식하고 연자봉을 거쳐 주봉인 신선봉에 오르기로 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가을볕은 다정했다. 단풍이 들어 산도 붉고 우화정 앞 연못 물도 붉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얼굴도 울긋불긋, 온통 ‘붉은 가을’이었다. 흥분한 채로 산을 오르느라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독서하기 마땅치 않은 계절이다. 아름다운 가을 정경을 모른 척하고 궁둥이 붙이고 앉아 책장만 넘기고 있는 건 가을에 대한 실례다.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신선봉까지 763미터를 오르는 동안 남편은 든든한 페이스메이커가 돼주었다. 내 컨디션을 체크하며 한 발 한 발 기운을 북돋아 준 덕에 잔뜩 긴장한 몸과 마음을 펴고 정상까지 거뜬히 올랐다. 환희의 순간이었다. 

정상석 주변은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포기할까 싶었지만, 첫 완등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마스크를 고쳐 쓰고 긴 줄에 합류했다. 포토존의 분위기는 마치 축제 현장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부끄러워 소심한 브이를 그리며 겨우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당당하고 멋진 자세로 산을 즐겼다. 개성 넘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왠지 모르게 계속 산을 타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고운 단풍을 배경 삼아 점심상을 차렸다. 김밥과 된장국이 다인 소박한 도시락이지만 내장산 정상에서 만추를 즐기며 먹는 밥은 고급 한정식집 못지않은 최고의 식사였다. 지리산에서 다이어트를 결심한 후 커피믹스를 끊고 걷기 운동으로 6개월을 버텨냈다. 7kg을 감량했으니 조심스럽게 ‘다이어트 성공’을 발표할 참이었다. 그런데 산에서 먹는 밥이 꿀맛 같아 이성을 잃을 뻔했다. “아, 맛있지? 많이 먹어!” 남편 입으로 부지런히 김밥을 날랐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위기였지만 나는 유연하게 대처했다. 빈 도시락을 보니 배부르고 행복했다.      

  

내장사로 하산하기로 했다. 남편은 스틱 길이를 조절해 주며 내리막길에서의 사용법을 설명했다. 전문가 포스가 느껴져 살짝 설렜지만 “넌 선생이고 난 학생이야!” 영화 대사를 외치며 앞서 걸었다. 뒤를 지켜주던 남편이 무사히 하산하면 첫 산행 기념으로 쌍화차를 쏘겠다고 했다. 산 위로 향하던 때와는 다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다음날이 입동이니 단풍 구경은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천천히 눈에 담으며 산을 내려왔다.      

  



시내 번화가 보다도 복잡했던 ‘단풍 맛집’ 내장사를 빠져나와 정읍으로 향했다. 땀 흘린 후 마시는 쌍화차 맛이 어떨지 기대됐다. 잘 구워진 가래떡과 함께 나온 쌍화차는 보약 냄새가 났다. 건강한 기운이 목을 타고 들어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싹 훑어 마셨다. 뻐근했던 첫 산행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고 다리도 풀렸다.

바깥세상의 스위치를 다시 켜고 보니 자연 속에 있었던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숨이 차고 체온이 올라가던 그 느낌, 두 다리로 땀 흘려 오르던 그 순간을 떠올리니 감격스러웠다. 힘들었어도 정상에서 맞이한 눈부신 순간이 좋았다. 계속 산에 오르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산행 후 정읍 '쌍화차 거리'에서 마셨던 보약 같은 쌍화차 

“자기 체력 엄청나게 좋아진 것 같은데? 곧 지리산도 종주하겠어!”

“여보, 나 국립공원에 있는 산은 다 오를 거야. 다음 산은 어디로 갈까? 한라산?”


집으로 오는 길, 나는 남편의 칭찬에 으쓱해서는 다음 산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산은 또 다른 산을 부르는 마력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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