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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Sep 19. 2023

환대받은 무등산에서 전지현처럼

부부가 함께 하는 국립공원 여행 NO.9_무등산국립공원

가을을 환장하게 좋아한다. 바람과 햇살의 온도, 마른 향기와 짙은 빛깔, 바스러진 낙엽까지. 그 계절이 가진 모든 것에 설렌다. 겨울이 오고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는 내내 들떠 지낸다. 남편도 그렇다. 여름이 가기 무섭게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는 카뮈의 말을 카톡 프로필에 띄우고 새 계절을 시작한다.

25년 전, 5월의 신부를 꿈꾸던 나는 가을에 결혼했다. 너무도 좋아하는 계절이라 어릴 적 꿈 하나쯤은 쉽게 포기됐다. 첫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것도 가을. 남편과 나를 부모로 만들어 준 경이롭고 특별한 계절이다. 

해마다 가을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진다. 코로나로 지쳐있었던 2021년에는 못 견디게 그리워 여름부터 국화를 사러 갔다. 그해 가을은 더디게 왔지만 기운차게 스며들었다. 구름이 그린 하늘 풍경은 지붕 없는 미술관이었고, 단풍 빛깔은 어떤 해 보다 고왔다. 필이 충만해져 자주 바바리 깃을 세우던 나는 주말이면 등산복을 입고 남편을 재촉했다. 단풍 든 가을 산에 가고 싶은 이유였다.     


11월 셋째 주, 설악산 대청봉에는 10월에 첫눈이 내렸고, 한 주 전에 다녀온 월출산에도 단풍은 막바지였다. 찬 바람이 불더니 기온이 뚝 떨어지고 나무는 가지를 드러냈다. 

이렇게 가을을 보낼 수 없었다. 뒤늦게 전국 단풍 지도를 검색했다. 아뿔싸! 절정 시기는 다 지났다. 지도 대로라면 국립공원의 산 중 단풍을 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계획대로만 살아지는 건 아니잖아.’ 문득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사람이 예측한 날짜고, 오고 가는 건 단풍 마음이 아닐까. 호남의 산 어디쯤 단풍이 남아있을 것 같아 마음이 부풀었다.  무등산국립공원이라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무등산으로 가자!      


산에 가기로 한 날, 이른 새벽이지만 우리 집 주방은 대낮보다 밝았다. 흑미를 조금 섞어 밥을 짓고, 쌀뜨물에 된장을 풀어 국을 끓였다. 시키지 않았지만, 남편은 커피 물을 데우고 과일을 깎아 간식을 챙겼. 어질러진 조리 도구들도 척척 정리했다. 센스 있는 보조 요리사 덕에 나는 메인 셰프처럼 우아하게 조리대를 오가며 밥 준비를 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신혼부부 같다!”   

식칼로 서걱서걱 김치를 썰며 말하자 남편이 과도로 단감 꼭지를 도려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2006년에 개봉했던 로맨스 코미디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의 포스터 장면 같았다. 한 손에 칼을 쥔 우리는 다른 한 손으로 배꼽을 잡고 폭소했다.

날씨가 쌀쌀하니 보온도시락을 꺼냈다. 오래전 우리 엄마처럼 따끈한 물로 밥통을 한 번 데우고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 밥을 담았다. 4남매 도시락 싸던 ‘젊은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몽글해졌다. 반찬은 계란말이와 갓김치, 오이고추 된장무침이다. 고기반찬 없어도 무조건 맛있을 거다. 산 정상에서 배고플 때 먹을 거니까. 




안개가 자욱한 토요일 아침, 소원하던 단풍을 보기 위해 영산강을 넘어 부지런히 무등산으로 달렸다.     

 

“도착하면 깨울게. 눈 좀 붙여.”

도시락이 담긴 배낭을 꼭 끌어안고 있던 나는 “응!” 대답하고는 눈만 감았다 떴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처럼 신나서 잘 수 없었다. 초콜릿 하나를 까서 운전하는 남편 입에 넣어줬다. 고맙다는 말 대신이다. “당신 덕에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고맙습니다!” 말하려다 초콜릿과 함께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는 사이 무등산 산행의 기점인 증심사 버스 종점에 도착했다. ‘가을 무등산’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붐벼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서너 바퀴를 돌고도 빈자리가 없어 멀리 떨어진 마을에 차를 세우고 다시 버스 종점을 향해 걸었다. 코스에 없던 도심길을 걷느라 힘이 들고 시간이 지체됐지만, 준비운동이라 생각하니 근육들이 기분 좋게 반응했다. 적당히 데워진 몸으로 ‘증심사지구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해 아홉 번째 국립공원 스탬프를 획득했다. 별 아홉 개를 가슴에 단 듯 뿌듯했다. 


우리나라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은 도심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산’이라 불린다.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고귀한 산’,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봄 진달래, 여름 작약, 가을 단풍과 억새, 겨울 설경이 황홀해 사계절 내내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인증을 끝내고 탐방센터를 나오니 산객 행렬이 끝이 없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들 속에 섞여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산행을 시작했다. 


증심교에서 토끼등을 지나 봉황대와 중머리재, 용추삼거리와 장불재를 거쳐 입석대와 서석대에 오르기로 했다. 다시 증심사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다. 하산까지의 목표 시간은 ‘어두워지기 전’이다. 이 산의 목표는 정상 정복이 아니니 정해진 시간에 쫓겨 발길을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원 없이 가을 산의 낭만을 즐길 참으로 서서히 발을 뗐다.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했다. 오른쪽으로 난, 증심교에서 중머리재로 향하는 구간은 비교적 완만한 탐방코스다. 가벼운 평상복 차림으로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 한 병 들고 산책 중인 어르신, 팔짱 끼고 데이트하는 연인, 슬리퍼 신고 펄펄 나는 고등학생 무리, 도시락 싸서 나들이 나온 가족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며 가볍게 산을 오르는 듯해 우리도 바로 중머리재로 갈까 망설였지만 처음 계획대로 토끼등으로 향했다.

토끼등을 지나 봉황대로 가는 동안 ‘등산의 고통’이 슬슬 밀려왔다. 제법 잎이 남아있는 나무 옆으로 빈 벤치가 보였다. 땀 좀 식히며 쉬어가기로 했다. 등에 진 배낭을 내려놓고 시계를 보니 12시를 훌쩍 넘겼다.   

   

“밥 먹고 갈까?”

“그래, 좋아!”     


나는 벤치 위에 준비해 온 식탁보를 깔고, 남편은 도시락을 펼쳤다.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주워 장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분위기가 제법 산다. 센스 있는 남편은 젓가락 대신 내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잘 가르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밥도 국도 뜨끈하다. 앉은자리가 바람골이라 점퍼를 입고도 썰렁했다. “보온도시락, 신의 한 수다!” 통째 들고 국물을 마시던 남편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둘째 수능 치를 때 큰맘 먹고 샀던 도시락이다. “역시, 보온 통은 비싼 게 최고야.” 내내 쓸모없던 게 드디어 제 역할을 한 것 같아 돈 쓴 보람을 느꼈다.

산에서 먹는 따뜻한 밥은 과식을 불렀다. 밥 한 톨, 반찬 한 젓가락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커피도 과일도 끝없이 들어간다. “먹으러 산에 왔네!” 설거지한 것 같은 빈 도시락을 보며 우리 둘은 박장대소했다. 

언젠가 친구가 그랬다. “산에 가는 것도 힘든데, 뭔 도시락이야. 그냥 사 먹어!” 산에서 먹는 밥맛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건 그냥 밥이 아니라 기쁨, 보람, 행복, 충전의 의미를 담아 버무린 영양제 같은 거라서 나는 정성껏 도시락을 싼다.       

무등산에서 펼쳐놓은 소박한 도시락.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한 나름의 노력_photo by 쓸모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몇 걸음 뗐더니 봉황대다.      


“우와, 우와! 말도 안 돼!” 

나는 아이처럼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늦가을 봉황대는 만산홍엽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단풍은 산객들의 알록달록한 옷 색깔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환상의 극치였다. 무등산 단풍나무는 ‘낙엽 비’를 꽃가루처럼 쏟아부으며 우리 부부를 환대했다. 목적지인 서석대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황홀했다. 

단풍 주단이 깔린 봉황대는 마치 축제 현장 같았다. 사람들은 낙엽 방석에 앉아 사진을 찍고 구름이 수놓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행복에 찬 웃음소리가 온 산에 메아리쳤다. 호젓하고 고요한 산행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도 사람들 속에 섞여 늦가을 풍경을 즐겼다.

핸드폰 시대에 나는 DSLR 카메라를 목에 걸고 사진작가처럼 봉황대를 누볐다. “아가씨!” 돌아보니 중년 아저씨 둘이 나를 보고 웃는다. “낼모레 쉰인데요.” 왕년의 아가씨였던 내가 대답했다. “요즘은 아가씬지 아줌마인지 구분이 안 돼.” 두 아저씨는 내 얼굴을 보더니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새로 산 등산 점퍼 때문인 것 같다.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선물한 배우 전지현이 광고한 등산복이다. 자주 입어야겠네! 나는 남편 손을 잡고 아저씨들을 재빠르게 앞질렀다. 점퍼 깃을 바짝 세우고 묶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중머리재를 향해 전지현처럼 걸었다.     

  

거친 바람 때문에 나무 한 그루가 자라지 못한다는 중머리재를 지나 장불재, 서석대까지 쉼 없이 나아갔다. 장불재에서 바라보는 백마능선의 황금빛 억새는 장관이었다. 봉황대 단풍에 이어 무등산이 주는 ‘가을 선물’ 같아 고마운 마음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경사 급한 너덜겅을 오르느라 심장도 다리근육도 터질 것 같았지만 맑은 날씨와 광활한 조망 덕에 행복한 산행이었다. 

무등산 정상 3봉인 천왕봉(1,187m), 인왕봉, 지왕봉은 군사 보호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먼발치에서 바라봐야 했다. 아쉬움이 컸지만, 남서쪽에 병풍처럼 서 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입석대(950m)와 서석대(1,050m)에 오른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이었다.      

  

만산홍엽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늦가을, 환대받으며 오른 무등산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어머니 산’ 답게 포근했다. 서석대를 벗어나 다시 증심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쉬움에 몇 번이고 뒤돌아봤다. “겨울에 눈꽃 피면 또 오자.” 뚝뚝 미련을 남기는 나를 보며 남편은 새로운 희망을 안겨줬다. 둘이 함께할 수 있음에 새삼 행복했다.

언제라도 배낭 하나 메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오를 수 있는 산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무등산처럼.

2021년 11월 끝자락, 무등산 봉황대에서 연인처럼_photo by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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