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하는 국립공원 여행 NO.10_계룡산국립공원
2022년 7월 초, 다시 국립공원 탐방을 시작하기로 했다. 덕유산 겨울 산행 이후 우리 부부는 삶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국립공원 투어를 계속할 수 없었다. 간간이 가까운 산을 찾긴 했지만, 꼬박 다섯 달을 국립공원에 가지 못했으니, 그때의 시간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휴대폰 속에 남겨둔 지난 여정을 되짚다 더는 참지 못하고 산에 갈 결심을 했다. 하필 덥고 습한 장마철에 말이다.
며칠, 일기예보만 들여다봤다. 비 오는 날사이로 빼꼼히 해가 드는 날이 있다. 기온 이상 현상으로 예보는 자주 틀리고 등산하기 좋은 계절도 아니지만, 거침없이 떠나고 싶었다. 날을 잡고 보니 산이 더욱 간절하다. 여행 삼아 조금 멀리 가고 싶다고 했더니 남편도 그러잖다. 거실 바닥에 지도를 펼쳤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못가 본 국립공원을 속속들이 살폈다. 이내 봉우리 사이로 계곡물이 흐르는 멋진 산 하나를 찾아냈다. 충남과 대전시에 걸쳐 있는 계룡산이었다.
“여보, 배낭 커버 챙겨야겠지? 비옷도 넣을까?”
나는 한껏 들뜬 마음으로 낯선 여름 산행을 준비했다. 계룡산으로 향하는 길, 남편은 나만의 ‘설명 봇’이 되어준다. 덕분에 수고로움 없이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얻어 챙긴다. 계룡산은 1968년에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단다. 능선이 마치 ‘닭의 볏을 쓴 용의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닭 볏을 상상하니 어쩐지 산세가 완만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이 여름에 과연 산을 잘 오를 수 있을까. 걱정하던 마음은 금세 안온해졌다.
들뜬 마음은 장거리 운전의 고단함도 잊게 했다. “와, 여보, 끝내준다!” 계룡산국립공원 표지석을 마주한 순간 이미 정상에 오른 사람처럼 흥분하고 말았다. 남편은 그런 나를 진정시킬 셈으로 그 옛날 ‘국민체조’ 같은 준비 운동을 시켰다. 촌스럽게 “하나, 둘!” 구령도 붙인다. 주위를 휙 둘러보니 다행히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말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열심히 몸을 풀었더니 다정하게 신발 끈을 고쳐 매 준다. 이럴 땐 좀 설렌다. “부부끼리 이러는 거 아냐!” 좋으면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 너무 어린애 같아 보여 나머지 한쪽은 내 손으로 묶었다. 내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산으로 향하자 뒤쫓던 남편이 외친다. “천천히 가! 모든 산행이 그렇지만 여름 산행은 페이스 조절이 중요해.” 산에서 듣는 남편의 잔소리는 생각보다 괜찮다.
그러고 보니, 여름 산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어쩌다 있어도 가볍게 동산을 오르는 정도였다. 대단했던 한여름의 월출산 야간산행은 몇십 년 전의 일이고, 그때는 젊었었다. 이제는 일기예보보다 정확한 뼈마디를 가진 중년. 그러니 산을 잘 아는 남편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기분으로 오를 나이가 아니구나 싶어 멈춰 서서 숨 고르기를 했다. 잠깐 마스크를 고쳐 쓰는 사이, 들숨을 타고 짙은 여름 산의 냄새가 훅 들어왔다. 그제야 울창한 숲이 제대로 보이고 우리가 다시 산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한결 차분해진 걸음으로 산을 향해 발을 뗐다. 사람들은 대부분 동학사를 시작으로 계룡산을 오른다. 걷기 편한 길이라 동학사를 찾는 여행객들도 많다. 우리는 동학사 계곡 풍경을 맨 마지막에 즐기기로 하고 ‘천정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로 잡았다. 문골삼거리에서 큰배재를 지나 전설 담긴 남매탑을 보고 삼불봉, 관음봉을 넘어 동학사로 하산하기로 했다. 왕복 4시간 30분 정도의 코스지만 우리의 타이머는 6시간으로 설정됐다. 빠듯하게 시간을 잡으면 마음이 급해지고, 그러면 이 선물 같은 시간을 즐기지 못할 것 같아서다. 번잡스럽지 않게 찬찬히 이 산을 누리고 내려올 참이다. 예상대로 다른 등산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천정탐방지원센터에 들러 챙겨 온 여권에 스탬프를 찍었다. 어느새 열두 번째 인증이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첫 스탬프를 찍었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서처럼 가슴이 뛰었다.
덥고 습한 장마철에도 산속 공기는 달랐다. 속이 저절로 뻥 뚫렸다. 그런데도 쉴 새 없이 땀이 흐르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여름이다. 초반부터 경사가 만만치 않다. 겨우 30분쯤 올랐는데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이 흥건해졌다. “잠깐 쉬었다 갈까?” 문골삼거리로 향하는 길에 계곡물을 발견한 남편이 쉴 타임을 알린다. 조금 이른 휴식 같아 망설였지만, 찰랑한 계곡물을 보고선 잽싸게 배낭을 벗어던졌다. 남편이 그럴 줄 알았다며 나를 향해 물장난을 친다. 그의 표정이 오랜만에 환하다.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느라 근심뿐이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내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시원한 계곡에 앉아 한없이 노닥거리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큰배재’를 거쳐 ‘남매탑’으로 가는 3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는 내내 바윗길이고 오르막이었다. 들뜬 마음과는 다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다리는 굼떴다. 굳었던 몸과 마음이 천천히 여름 산에 적응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더니 조금씩 힘이 났다. 신기하게도 땀이 흐를수록 몸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남매탑 주변은 계룡산 명소답게 산객들로 붐볐다. 표지판에는 수행하던 승려가 목에 가시가 걸린 호랑이를 구해 주었더니, 호랑이가 여인을 업고 와 보은 하였다는 전설이 적혀있다. 부부가 아닌 남매의 연을 맺고 동시 열반에 들었던 스님과 비구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란히 서 있는 탑이 고고하고 애절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눈을 감고 공손히 손을 모은 채 남매탑 앞에 섰다. 나는 시아버지의 안녕을 기원했다.
삼불봉으로 발길을 옮겼다. 삼불봉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지만, 완만한 능선을 지루하게 걷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해발 775미터. 세 부처가 기도하듯 앉아있는 모습을 닮아 삼불봉이라 이름 붙였단다. 하늘과 맞닿을 듯한 풍경이 계룡산 최고봉인 ‘천황봉’ 못지않게 훌륭하다. 남매탑 앞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표지석 앞이 휑하다. 커플로 보이는 젊은 친구 둘뿐이다. “과일 같이 먹어요.” 초면이지만 산에 와 본 사람답게 먼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커플룩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명랑하고 센스 있는 인사가 돌아온다. 우리 두 커플은 쑥스러움 없이 사진을 찍어주며 삼불봉의 경치를 실컷 누렸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다시 길을 잡았다. 어, 나비네! 예사롭지 않은 호랑나비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 관음봉으로 가는 내내 길을 튼다. 우리가 걸으면 나비는 날고, 멈추면 가지 끝에 앉아 쉬었다. 꼭 속도를 맞추며 같이 걷는 한 팀 같았다. 신기하고 든든했다. “혹시, 계룡산 도사인가?” 남편의 말에 나비는 정체를 들킨 도사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정수리에 꽂혀있던 태양이 뒤통수를 때리며 쫓아왔지만, 나비의 기운 때문인지 몸이 가벼웠다. 수직으로 선 가파른 철계단을 거뜬히 이겨내고 관음봉에 올라 만세를 외쳤다. 관음봉 하늘 위로 한가롭게 떠 있는 구름이 예술이다. 계룡산 8경 중 하나라더니 날이 흐렸으면 못 볼 뻔했다. 뙤약볕에 달궈진 관음봉 표지석을 잡고서 구름이 수놓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때다 싶은 남편이 이런저런 포즈를 요구하며 사진을 찍어댄다. 웬일이야! ‘인생샷’이 탄생했다. 땀범벅이 된 추레한 모습이라 기대도 안 했는데 말이다. 이 산을 오르는 내내 줄곧 행운이 따르는 느낌이다.
관음봉의 눈부신 순간을 가슴에 담고 은선폭포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이다. “내가 앞장설게!” 오르막보다 내리막을 잘 걷는 나는 선두를 자청했다. 경쾌한 걸음으로 옛날 신선들이 숨어 놀았다는 은선폭포에 도착했다. 전망대 난간에 턱을 괴고 서서 폭포를 감상했다. 아름다운 운무를 보지 못한 아쉬움은 좋은 날 다시 계룡산을 찾겠다는 다짐으로 남겨두었다.
느긋한 호흡으로 내려와 천년고찰 동학사에 닿았다. 그윽한 동학사 자태와 대웅전 마당에 소담스레 피어있는 수련을 보니 산 위에서의 흥분이 저절로 가라앉는다. 동학 계곡에는 가벼운 차림으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짙은 녹음과 시원한 계곡물이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량하다. 우리도 산책하듯 길을 따라 걷다가 조였던 신발 끈을 풀고 계곡으로 들어갔다. 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고된 산행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갔다. 이토록 시원한 여름이 또 있을까 싶었다. 오기를 참 잘했다.
어쩌자고 덥고 습한 날에 산에 갈 마음을 먹었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더위에 취약한 사람이라 ‘여름 산’은 두려웠다. 그런데도 산을 갈망했던 건 어쩌면 현실로부터의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삶이 고달플 때는 자연으로 도망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계룡산에 올랐다. 땀범벅이 되어 산길을 걸으며 알았다. 오른 만큼 내려가고, 내려온 만큼 힘겹게 올라서는 산길이 인생과 닮았다는 것을.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길이 있으니 애끓으며 살 필요 없다는 것을 말이다. 무엇보다 내 옆에는 든든한 남편이 있다. 나는 그렇게 자연 속에서 깨닫고 여물어갔다.
계룡산의 여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현실에 지쳐있던 우리 부부에게 숨 쉴 틈을 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자연이 주는 위로를 받으며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았던 그 여름의 짙푸른 기억은, 살아가는 내내 큰 힘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