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하는 국립공원 여행기 NO.10_태안해안국립공원
방심한 틈을 타 연말은 찾아온다. 벌써 한 해가 이렇게 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허둥지둥 정신을 가다듬고 남은 날이라도 애쓰자며 초심으로 돌아간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려는 적절한 ‘타협의 시간’이다. 연말에는 늘 그렇게 지나간 날을 들추며 잘잘못을 따져보는 ‘결산의 시간’을 갖는다.
2021년에도 그랬다. 역시나 다사다난했고 ‘반성을 반복’하며 하루, 한 달, 일 년을 지났다. 종종거리며 삶을 쫓다 그만 포기해 버린 날도 많았다. 하지만 그해 연말은 조급하지 않고 평온했다. 해가 바뀌면 밥벌이를 멈추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고도 당당했다. 특별히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적지만 어쩐지 괜찮았다.
“여보, 국립공원 가자!”
그해 봄, 남편은 불쑥 ‘부부 여행’을 제안했다. 국립공원이라. 무슨 여행을 그런 곳으로 갈까 싶었지만, 코로나19로 지쳐있을 때라 어디라도 좋았다.
가볍게 시작한 국립공원 여행은 우리 부부의 2021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한적한 시골길을 산책하다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손을 잡고 바닷길을 거닐다 산에 올랐다. 그러다 산의 매력에 빠져 등산을 시작했다. 동네 뒷산도 버거워하던 내가 국립공원의 유명한 산을 정복하겠다고 하자 남편은 앞장서 길을 텄다. 나는 남편이 깔아준 멍석 위에서 ‘새로운 나’를 찾아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돈독해졌다.
그러는 사이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 어김없이 연말은 왔고 또다시 결산의 시간을 맞았다. 여행의 날이 쌓이는 동안 삶이 뭔가 선명해진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니 참 좋은 시간이었다. 연말정산이 두렵지 않았던 건 그해가 처음이다.
애썼어, 작은 선물이야! 우리는 연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표한 여행의 절반 정도에 이르렀으니,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기 딱 좋은 때였다. 당신의 한 해는 어땠나요? 우리 여행의 도착점은 어디인가요? 이 물음에 답하고자 천천히 오래 걸을 수 있는 ‘태안해안국립공원’을 열 번째 여행지로 택했다.
12월의 어느 토요일, 느긋하게 아침을 맞았다. 지난 여행처럼 무겁게 배낭을 꾸리지 않았다. 숨 돌리며 쉬어가는 하루 여행이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야 했다. 편안한 트레이닝복에 운동화를 신고 태안의 아름다운 섬, 안면도로 향했다.
“물안경 썼어?”
가는 길, 남편은 바닷속을 통과해야 한다며 물안경을 쓰라고 했다. 당근이지! 나는 센스 있게 ‘보령해저터널’ 임을 눈치채고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곧 대한민국 최장 해저터널이 눈앞에 펼쳐졌다. 1시간 30분 거리를 10분에 통과한다고 남편은 설명했다. “와, 진짜?” 나는 왕사탕 눈을 하고 목소리를 한껏 올려 대꾸했다. 뉴스를 같이 들었으니 다 아는 사실이지만 모르는 척했다. 누군가의 기를 살리려면 가끔 이렇게 배우처럼 연기해야 한다.
터널은 멋졌지만 길고 길었다. 개통 후 첫 주말이라 구경 온 사람들이 많았다. 꼬리를 물고 늘어선 차량이 한없어 빠져나오는데 1시간 반이나 걸렸다. 온몸의 수분이 방광으로 들어차 배가 빵빵해졌다. 숨을 참은 채 남편을 독촉했다. 차를 화장실로 만들고 싶지 않은 남편은 유명한 게국지 식당으로 달렸다.
차에서 내린 나는 놀라고 말았다. 화장실을 향해 똑바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쯤 차례가 왔다. 볼일을 보고 나니 배가 아픈 건지 고픈 건지 모를 애매한 통증이 왔다. 빈속을 채워보면 알 것 같아서 식당으로 갔다. 급할 때는 안 보이더니 줄 선 사람이 어마어마했다. 애매한 통증이 배고픔으로 확실해질 때쯤 번호가 불렸다. “28번!” 마른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반말로 손님을 불렀지만, 맛깔스러운 게국지를 보고는 점잖게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배가 부르니 온몸이 나른했다. 목적지로 갈 마음이 사라질까 봐 서둘러 내비게이션을 켰다. 안면도 백사장항에 도착한 나는 꺄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너무 근사해 참을 수 없었다.
기지포 탐방지원센터에서 챙겨 온 안내서와 지도를 살폈다. 230km의 해안선과 스물일곱 개의 해변. 그 안에 잘 조성된 일곱 코스의 트레킹 길이 눈에 들어왔다. 욕심껏 걷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 여정을 돌아보며 우리만의 보폭으로 걷기로 했다. 곧 해변 길 5코스인 ‘노을길’로 명쾌한 결론이 났다. 백사장항에서 출발해 서해의 3대 낙조 장소인 꽃지해변까지 12km를 걸어가는 여정이다. 그곳에 닿으면 낙조를 바라보며 마음속 말을 나누기로 했다.
“5시 20분이래!”
남편에게 꽃지해변 일몰 시각을 알렸다. 그는 대답 대신 모래밭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마누라의 신발 끈을 단단히 고쳐 맸다. 위에서 내려다본 남편의 정수리는 바다처럼 넓고 깊었다.
손을 잡고 노을길로 들어섰다.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날렸지만 춥지 않았다. 해송 숲길과 바닷길을 번갈아 걸으며 서해의 아름다움을 찬찬히 눈에 넣었다. 우리는 좁은 숲길에선 한 줄로 걷다가 탁 트인 해변 길에서는 나란히 발을 맞췄다. 쉬지 않고 말하다가 어느 땐 오랫동안 침묵하기도 했다. 오롯이 우리에게 집중하는 시간, 걸음마다 행복이 묻어났다.
꽃지해변으로 향하는 동안 여러 해변을 거쳤다.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삼봉해변에서는 가수처럼 노래를 불렀고, 기지포에서는 댄서처럼 춤을, 밧개해변에서는 감성 품은 시인이 되었다가 방포해변에서는 개그맨이 되어 서로를 웃겼다. 조금도 창피하지 않았다. 걷다가 만난 바람과 햇살, 공기와 풍경이 우리 안의 숨은 기질과 뻔뻔함을 끌어내는 것 같았다. 내내 신기했다.
가야 할 길을 절반쯤 지났을 때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 “커피 마실래?” 하며 해송 옆 벤치를 가리켰다. 웬일이야. 둘도 없을 바다뷰 카페가 거기 있다. 좋지!” 커피를 거절해 본 적 없는 나는 냉큼 보온병을 꺼냈다. 우리는 눈부신 해변 카페에 앉아 지난 여행을 추억하다가 다음 여행을 상상했다. 지나간 시간도 다가올 시간도 다 좋았다. 우리가 앉은 벤치 위로 해송이 바닷바람을 타고 춤을 췄다.
아름다운 카페는 엉덩이를 무겁게 한다. 분위기에 취해 계속 머물다간 일몰을 놓칠 게 뻔했다. 미련이 남았지만 툭툭 털고 일어났다. 먼저 일어선 남편이 나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다시 힘을 내자는 뜻이다.
바지런한 걸음으로 그를 뒤쫓다 보니 어느새 꽃지해변에 도착했다. 꼭 축제 현장 같은 그곳은 노을 명소답게 사람들로 넘쳐났다. 운 좋게도 일몰 때를 딱 맞췄다. ‘할배 할미 바위’ 위로 해가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둘러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넓은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황홀한 노을빛이 서해를 찬찬히 물들여갔다. 너무도 찬란해 가슴이 뛰었다. 남편과 나는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앉아 기도했다. 오래도록 다정한 우리로 살게 해달라고. 손깍지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마음속 말들이 통하는 것 같았다. 말이 필요 없는 행복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도착 시간을 정해놓고 걸었다. 일몰 시각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긋하고 평온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비로소 여행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멋진 여행자’가 된 것 같아 뭉클했다. 이 여행을 오래오래 뜨겁게 간직하기로 했다. 우리가 우리에게 선물한 특별한 여행이므로.
함께한 여행의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때로는 산책 같고 때로는 나들이 같던 수수한 날들이 ‘진짜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여행은 그야말로 수많은 새해 계획 중 하나였다.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새해에는 멀리 떠나 여행다운 여행을 하겠노라고. 거창한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매번 후회를 남겼다. 계속 반복하고 싶지 않아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국립공원 여행도 그렇게 시작했다.
남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완벽하지 못한 날도 있고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 날도 있었지만, 우리답게 헤쳐나갔다. 그렇게 함께한 모든 날이 근사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여행의 기쁨을 알아가는 건 커다란 행복이었다.
남편과 나는 ‘수수한 집 밖의 날’을 모아 여행을 완성해 가는 중이다. 아마도 마지막 도착지는 우리의 마음 안이 될 것 같다. 이제 나는 연말이 와도 두렵지 않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때가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저녁처럼 편안하고 좋다. 올해도 멋진 해였구나, 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