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 자서전_『작가마당』38호에 실린 글
[버스, 판도라의 상자]
앞산 앞에 산이 있었다 뒷산 뒤에도 산이 있었다 움집마냥 들어앉은 동네 봄여름 할 것 없이 봇도랑보다 작아 보이던 하늘로 타박거리던 아이들이 머릴 디밀어 물구나무를 섰다 뒷내미골 자갈밭처럼 비탈진 어른들은 하루 세 번 왁자한 버스가 내뱉는 세상 이야기들을 알곡인양 주웠다
- 「촌놈」 중에서
마치 커다란 웅덩이 같았다. 그랬다. 손을 뻗으면 허공만 잡힐 뿐 산들은 너무도 높이 솟아 있었다. 스무 가구나 되었을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면소재지에서 이십 리나 떨어진 첩첩산중의 작은 마을이다. 하루 두세 차례 버스가 오갔는데 막차는 우리 동네서 자고 다시 첫차로 출발했다. 하늘이 산을 방죽 삼아 만들어 준 웅덩이처럼 깊은 산골 마을에도 세상과 연결되는 단 하나의 길이 있었던 거다. 구부정한 어둠과 함께 막차가 들어설 시간이면 하릴없이 아랫마을로 내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버스에서 내리는 이들을 조용히 지켜보곤 했다. 버스가 뿜어내는 모든 냄새와 소리, 육중한 삶의 모습들조차 어린 내게는 신기한 보석처럼 여겨졌다. 둥글게 생긴 바퀴를 지닌 모든 탈 것들을 좋아하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눈앞의 산보다는 산 너머의 세상을, 길을 따라 어디건 갈 수 있는 둥근 바퀴처럼 자유롭기를, 어린 시절의 나는 꿈꾸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수천 번의 하굣길, 수백 번의 장날 동안 커다란 바퀴를 지닌 버스는 나와 우리 동네 사람들이 가장 애타게 기다리던 대상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이 돌아간 텅 빈 교실에서 몇 시간씩이나 막차를 기다렸다. 기다림을 채우는 방법, 이 역시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책을 읽었고, 노래를 불렀고, 어둠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고, 막연한 미래를 이야기했다.
며칠씩 눈이 내려 길이 얼어붙거나 장맛비로 하나뿐인 길이 사라지는 날이면 버스가 오질 않았다. 이런 날엔 두 시간 정도 산길을 걸어서 등교를 했다. 새로운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고 학교에 가면 신발과 옷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궂은 날, 어쩌다 한 번씩 학교에서 이장네로 연락하여 등교를 안 해도 된다고 할 때는 다른 동네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수학여행을 가는 날이면 새벽에 출발하는 전세버스 시간을 첫차가 맞출 수 없어 학교 인근의 친구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나에겐 수학여행 전날부터가 여행의 시작이었던 거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친구들이 나를 추억할 때 결론은 늘 촌놈이었다.
[그리움과 두려움]
바람 거세던 유년의 기억 속 몇 날 며칠 동녘을 밝히던 원인 모를 산불 번져가듯 얼마간 휘감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소리 없이 누군가 건너와 주기를
이 너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익숙하게 내려지는 블라인드
- 「어떤 감정에 대하여」 중에서
때때로 난 어두워진다. 누군가는 봄을 타기도 하고, 누군가는 유독 가을을 타기도 한다는데 내겐 가라앉았다가 다시 올라오는 감정의 부침(浮沈)이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온다.
어릴 적 말수가 적고 혼자 노는 것에 익숙했다. 나무 막대기 하나 들고서 초록 철대문의 면면을 두드리며 전해오는 진동을 느끼거나, 불길로 들썩거리는 쇠죽솥의 뜨거운 눈물을 문지르면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거나, 우리집 어미소의 큰 눈을 살피며 나지막이 말을 걸어보거나, 청재산 단풍나무가 오색빛으로 물들어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거나, 열 개의 손가락 끝으로 어떤 단어의 자음모음을 분리했다가 이리저리 합쳐보며 놀곤 했다.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악기가 되었고 잠들기 전 하루 치의 선명한 감정들은 마음의 우물로 흘려보내거나 일기장 속 문장이 되었다.
밥 때가 되어 개울 건너 공터에서 놀고 있는 막내오빠를 불러야 할 때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당돌한 아이기도 했다. 어울려 놀고 있는 많은 동네 오빠들 사이에서 가장 명확하게 지명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기도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빠라는 호칭을 쓰는 게 다소 어색했던 것 같다. 대문 밖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넘실거렸지만 대문 안 세계에서는 반벙어리 같은 아이였다. 9남매의 막내여서, 혹은 딸이라는 이유로, 집안 최고의 수혜자이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어쨌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타협할 시간도 없이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저절로 맺어진 관계들. 나는 스스로를 평범한 아이라 여겼지만 우리집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좁디좁은 세계였으나 내 삶 전체를 불가역적으로 만들 만큼 지배적이었다. 아버지, 엄마, 그리고 큰엄마. 구조화하기 어려운 가족 관계. 모든 결과에는 과정이 있고 그 이전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내 운명 앞에 놓인 공정치 못한 관계의 원인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벙어리요 귀머거리요 올바른 판가름을 하지 못하는 정신을 지녔던 법적 엄마인 큰엄마, 태어나면서 이미 나는 누군가의 이모였다. 아들만 내리 낳다가 겨우 딸 하나인 나를 얻고서 무병(巫病)을 앓던 우리 엄마, 자신이 받지 않으면 고명딸에게 대물림 될 거라는 말에 몸서리쳤다. 이렇게 난 두 사람씩이나 특별한 엄마가 있었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일방적인 힘의 사용과 회신을 원치 않는 언어전달 방식을 보았고 이에 우리 엄마들은 감히 맞서지 못했다. 엄마에겐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엄마 몸에 깃든 알 수 없는 존재조차도 힘을 못 쓰도록 막아버렸다. 엄마는 이 때문에 당신 자식들이 잘 안 풀리는 거라고 했다. ‘딸은 엄마의 삶을 닮는다’는 말, 강렬한 거부반응이 일었다. 이따금 휘파람 소리와 함께 내게 전하던 엄마의 공수는 주어진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였으리라.
바보엄마. 우리 엄마는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숙명이라 여겼다. 호적에 이름 석자도 올려주지 않았건만 치성 들여 지아비와 아들들의 안녕을 빌었다. 여자는 죄인이라고, 열두 폭의 치마로 누구건 포근히 감싸 안아야 되는 거라 했다. 남의 집 품앗이 일을 할 때는 주인보다 앞서 밭고랑을 매는 우직한 일꾼이었다. 내 낳은 자식이거나 아니거나 새벽밥 먹여 공부시켰다. 빚 안지고 9남매 시집장가 다 보냈다. 그뿐인가. 동네를 들르는 낯선 보따리장수들이나 고향을 찾은 타성받이들에게도 따뜻한 밥 한끼 뚝딱 차려내곤 했다. 잠시 엄마의 몸을 빌린 영혼이 있긴 했지만 엄마는 끝까지 엄마로서 우리를 지켰고 정직하게 땅을 일구며 주어진 삶을 받아들였다.
철갑을 뚫고 나온 여린 새싹
알아야 할 모든 것은 땅에서 배웠다
바람 앞에 구부리는 법
지녀야 할 무기마저 둥글어야 함을
영혼과 어우러지는 법
꼭 안지 않으면 쭉정이가 됨을
뜨거워도 울지 않는 법
소리 내어 사랑해야 함을
- 「잡곡밥」 중에서
열여덟 살, 비로소 집을 떠나왔다. 늘 꿈꾸던 곳, 서울이라는 가장 큰 도시에서 여전히 나는 “막차”를 기다렸다. 운명의 미로를 빠져나오기 위해 낯선 길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힘에 부쳤으나 열심히 일했다. 엄마처럼 살긴 싫었지만 어느새 나도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나무는 산 모양을 따라 자라나고]
내 글은 엄마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줄기에서 따낸 애호박을 제 난 호박잎에 감싸서 내미는,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작은 들꽃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어루만지는 분. 온통 산뿐이었던 엄마의 세계에서 일찍이 도망쳐 나왔으나 사는 동안 무시로 산을 마주한 나, 가로막힌 산을 넘고 싶어 낯선 길을 참 많이도 헤매었다. 마치 둥근 바퀴가 된 것처럼 길이 있으면 가야 했다. 산 너머의 세상을 알고 다시 돌아가 엄마의 산이 되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가 고정불변의 삶이라 여긴 ‘여자의 운명’을 반박하기 위해 뒤늦게 역(易)을 읽었다.
스멀스멀 도시를 끌어안고 녹아드는 형체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진양조의 몸짓 거칠고 헛헛한 야성을 일순간에 잠재우는 이 고요한 천적을
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 「진화 혹은 퇴화」 중에서
‘生生之謂易’, 이 생생하고 대등한 문장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왔던가. 엄마도 나도 생육의 주체로, 변해가는 자기 삶의 능동적 주관자로서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수평적 관계 속에서 그것이 상황이건 생명이건 변화를 통해 새로이 창조한다지 않은가. 성큼 한 발짝만 내디디면 넘어갈 수 있도록 앞산만큼 키가 커졌으면 하고 바랐다. 드글드글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갑갑함에 말을 더듬기도 했다. 공정성에 대해 다소 민감할 수밖에 없는, “거칠고 헛헛한 야성을” 지닌 촌놈으로 살아왔고 남은 생도 별반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거운 나의 세계가 가벼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시를 쓰는 일이라는 거에는 틀림이 없다. 삶에서나 사랑에서나 처음이라 맹목적이었을 뿐 그것이 죄는 아니라고, 다만 그러한 당신이 쏟아낼 아픔이 조금 덜해지도록 떠듬떠듬 시로 전하고 싶다.
산은 그냥 존재했을 뿐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산은 아버지였고 엄마였고 나 자신이었던 거다. 시와 산, 그리고 사랑. 생명들의 너른 폭이 되어주고 보드라운 결이 되어 주는 것들이지 않은가.
긴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다. 늘 그래왔듯이 나무들은 산 모양을 따라 자라나고 꽃들은 열매 빛깔로 피어나더라니. 금강이 산자락을 휘돌아 가는 곳에 아담한 시골집을 마련해서 주말마다 들르고 있다. 골짜기가 깊은 산들이 하나둘 강으로 내려서는 걸 바라보게 된다. 강도 주름이 늘었다. 초록빛이 생생한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