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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Aug 29. 2021

원래 유치한 게 기분은 좋다

블래스트(1999)

90년대 영화는 왠지 모를 향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직은 때 묻지 않았을 때 봤으면 무척 재밌을 소재를 다룬 영화들이 즐비하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90년대의 그 투박한 맛을 따라오기는 힘들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2020년대의 CG와 탄탄한 시나리오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는 90년대 영화들에게는 그런 것들을 바랄 필요는 없다.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함이고, 그때의 레트로한 감성을 즐기려면 그런 날카로운 시선은 잠시 거둬야 할 수도 있다. 


<블래스트>가 그런 영화이다. 분명 이 영화는 엄청나게 촌스럽다. 시나리오의 허점도 보이고, 로맨틱 코미디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클리셰도 어설프게 반복한다. 주인공들 역시 과장된 연기를 하고, 전혀 진지하지 않다. 심지어 로맨틱 코미디에서 가장 중요한 키스신 역시 로맨틱한 감성이 부족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런 부족한 부분을 설정 하나로 만회한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창인 1960년대 배경으로, 핵 미사일이 터진걸 오인한 괴짜 과학자 부부가 방공호에서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아담(브랜든 프레이져)으로 35년 후에 세상에 나오게 된다. 아담이 가족을 대표해 세상으로 나오면서 가지고 온 미션이 있다. 식료품 공수와 건강한 여자를 신부로 데려와 같이 방공호에서 사는 것이다. 


지극히 순수한 설정이다. 그리고 영화의 완성도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 부족한 부분 역시 이 영화가 지향하는 점과 같은 길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35년 만에 세상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처음,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의 대화도 처음, 그리고 키스도 처음인 주인공을 다루는 앵글이 너무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대신 이 영화는 어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이벤트를 중간중간에 끼워 넣는다. 35년 전에 사두었던 IBM 주식, AT&T 주식 증서가 창고에서 발견된다든지, 할아버지가 소중하게 모아둔 35년 전 한정판 야구카드를 나에게 물려준다 든 지 등등. 

내가 가진 어떤 것들이 시간이 흘러 수백 배의 값어치가 되는 이야기를 이 영화는 눈앞에 구현해준다. 일종의 대리만족도 되는 느낌마저 든다. 


자극적인 음식만 먹다가 가끔은 담백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영화는 너무나도 투박하고 유치하지만 그 나름대로 볼만은 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추억과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 유치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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