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2023.07.07. 2005년도의 나와 우리 가족은.

by 최성민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1950년생. 살아계셨으면 74세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2005년도에 돌아가셨다. 뇌동맥류라는 머릿속 혈관이 터지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2001년도 나 군대 있을 때 처음 발병해서 2005년도 우리 동생이 군대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2001년도 처음에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솔직히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군대에서 엄청 힘들기도 했고,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엄마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고, 집안꼴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2박3일 특박기간 동안 얼이 빠져서 있다가 복귀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아버지가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렸고 몇 달 뒤에는 퇴원을 하셨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환상을 보았고, 엄마는 교회에서 구원을 찾았다. 퇴원하고 나서는 아버지와 엄마는 교회를 다니셨다. 우리도 엄마한테 멱살이 잡혀서 교회에 억지로라도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가 괜찮아지고 나서 2년쯤 뒤 2003년에 나는 제대를 했고, 2004년에는 복학을 했다. 2004년 하반기부터 아버지의 상태가 급격하게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짚고 운동을 하다가 넘어져서 산에서 구르기도 했고, 좀 지나니 소파에서도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얼굴 비대칭이 심해졌고, 나중에는 말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엄마랑 나는 아버지가 운동을 안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나서 다른 친척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들 이미 그때 아버지가 오래 못 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마치 억지로 눈을 감은 것처럼, 가장 가까운 가족들만 몰랐다.



2005년 2월 27일. 나는 독서실에서 잠깐 나와서 놀고 있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의 정신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그 아빠 죽었다" 부산 백병원이었다. 거실 소파에서 앉아 있었는데 머리가 푹 꺾이면서 앞으로 쓰러졌단다. 엄마는 양손 양 발가락을 다 따고 119를 불러서 병원에 갔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병원에 갔더니 엄마가 멍하게 있다가 내가 오니까 울음을 터트렸다. 난 뭘 어떻게 해야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정신이 나갈 것 같이 울고 있는 엄마만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하도 울고 있으니 의사가 와서 심장 마사지를 하면 사망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가슴뼈를 부러뜨릴 정도로 세게 마사지를 해서 심장에 자극을 주면 심장이 멈추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뭔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냥 안 한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상주가 되었고, 장례의 대부분의 것을 내가 결정해야 했다.



어른들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장례식장은 정해졌고, 밤에 혼자 앉아 있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이모, 삼촌들이 오셨고, 내 친구들도 왔다. 같이 밤을 새우고 아버지 입관을 하는 것을 봤다. 얼굴은 살아 있는 거 같았다. 엄청 울었다. 가족들도 엄청 울었다.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그날 저녁 되니까 손님이 많이 오셨다. 아버지가 저녁에 돌아가셔서 3일장 중 손님 받을 수 있는 날이 하루 밖에 없었다. 손님들이 많이 와서 내가 이것 저것 챙기니까 같이 있어 주시던 교회 박장로 님이 상주는 손님 맞는 게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냥 앉아있었다. 동생도 왔다. 군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들어오는 동생을 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다들 울었다.



그 날 밤늦게 손님들이 다 가고 친구들 몇 명과 친척들만 남았다. 손님들이 많을 때는 이게 잔치인지 초상인지 모를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는데, 다 떠나고 나 혼자 있으니 계속 눈물이 났다. 계속 울었다. 자꾸 울고 있으니까 이모, 삼촌들이 밥 먹으라고 해서 밥 먹고 또 울었다. 울다가 새벽에 잠들었다. 그래도 밥은 넘어가고 잠은 오더라.



다음날 마지막 출상 예배를 드린다. 목사님이 오시고, 찬양을 부르고, 말씀을 듣는다. 출상예배가 끝나고 이제 가야 되는데, 진짜 마지막인 거 같아서,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고 이렇게 가는 게 너무 억울하다. 바닥에 머리를 찧고 울었다. 사람들이 그러면 아버지가 좋게 못 간다고 말린다. 그래서 일어났다. 상주는 사진을 들고 가라는데 손이 너무 떨린다.



차를 타고 부산 영락공원에 가는 동안 엄마는 계속 곡을 한다. 사람들이 놀란다. 그때는 아무 생각없었는데 나중에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 듣고 알았다. 화장장에 와서 아버지가 화장터에 들어가는 걸보는데 진짜 또 억장이 무너졌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구나. 불쌍한 우리 아버지 다음 생에는 건강하게 살고, 부잣집에서 태어나소. 화장이 끝나고 유골을 수습하는데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래도 상주니까 해야 돼서 유골함을 받아서 납골당까지 가야 한단다. 근데 손이 떨려서 들 수가 없다. 옆에 삼촌한테 부탁해서 삼촌이 대신 들어주었다.



아버지의 유골은 영락공원에 안치되었고, 그걸로 아버지의 장례식은 끝이 났다.



장례식은 끝이 났지만, 우리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보내드렸지만, 정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사망신고를 해야했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 동사무소에 전화를 해보고 갔다. 동사무소 가는 길에 또 눈물이 나서 혼자 훌쩍거리며 걸었다. 비바람에 나를 막아주던 지붕이 없어진 느낌이다. 내가 이런 걸 하게 되다니. 그리고 나는 휴학신청을 급하게 했다.



그리고 집에 빚이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사망신고를 하니 은행에서 연락이 왔나 보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8천만원 빚이 있단다. 억장이 무너진다. 아버지 짐을 뒤져 마이너스 통장을 찾아 통장정리를 해보니 사용내역이 전부 생활비 쓴 거밖에 없다. 다 우리가 먹고살라고 쓴 돈이다. 아버지가 쓴 돈은 아무리 봐도 하나도 없다. 생각해 보니 당연하다. 아버지 아프신지가 4년이 넘었고, 먹고살기는 해야 되니 이걸 썼겠지. 내가 먹은 라면이, 간식으로 먹었던 과자가, 아버지가 사준 책이 전부 빚이 되었다.



집을 팔아 해결하기로 한다. 집은 다행이 빨리 팔렸다. 1억 2천에 팔렸고 우리한테는 4천만원이 남았다. 이 4천만원으로 우리 식구 살 집을 구해야 된다. 엄마가 동네 부동산에 다 이야기를 했는데 그 돈에 전셋집이 있을 리가 없다. 마음만 급하고 일도 안되던 날에 엄마랑 같이 집을 보러 가보기로 했다. 주변 동네를 다 돌아다녀봤다. 집이 있긴 했는데 너무 별로였다. 저녁까지 엄청나게 걷고 집 앞 치킨집에서 치킨 먹으면서 맥주 한잔 마시는데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집 못 구하면 컨테이너에 짐 맡기고 이모집에 가있지 뭐. 맘에도 없는 소리 하면서 엄마랑 맛있게 먹었다. 그때 엄마가 오랜만에 웃었던 것 같다.



교회 장로님의 도움으로 전세집을 운 좋게 구했다. 좁은 집에 겨우 짐을 꾸역꾸역 넣었다. 이사를 다하고 좀 있으니 동생이 제대를 했다. 제대했는데 집 주소를 몰라 나한테 전화를 해서 찾아왔다. 집에 오니 황당해한다. 참 인생 우습다. 여기까지가 2005년 2월 27일부터 2005년 10월까지 있었던 일이다.



우리 아버지는 말씀이 거의 없는 분이었다. 말을 누가 시키지 않으면 먼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는 재밌게 이야기하던걸 본 기억이 있다. 나는 아버지한테 혼난 적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내가 뭘 하던 별말씀이 없으셨다. 아마도 아버지 눈에는 내가 그렇게 크게 엇나간 행동을 한 적은 없었나 보다. 그리고 엄마가 너무 엄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더욱 그렇게 하셨는지 모른다.



내가 옛날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보니,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돈 버는 능력은 크게 없는데, 그렇다고 와이프가 돈 버는 능력이 있는것도 아니고, 게다가 아들 둘 먹는 거는 장난이 아니고. 참 진퇴양난이었지 싶다. 아버지가 마흔셋 내 나이였을 때 내가 11살이었는데, 그때 아버지하고 밖에서 공놀이하면 내 느낌에 한 십분 밖에 안 했는데 아버지는 힘들다고 그만하자고 했었다. 그때는 왜 그런지 이해를 못 했는데, 지금 내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진짜 힘들다. 지금 우리 딸내미는 다섯 살 밖에 안되었는데도 놀아주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도 맨날 누워있는데. 그럴 때마다 혼자 그때의 아버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쉴때는 맨날 잠을 잤다. 그냥 잠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때도 몸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술을 체질 상 한잔도 못하셨지만, 담배는 정말 많이 폈다. 내가 초등학생 때 담배 심부름을 세 번까지 간 적이 있었다. 낯빛이 아주 어두웠다. 그때는 정말 옛날이라 건강에 대해서 지금처럼 관심이 많지도 않았고, 낯빛이 어둡고 많이 피곤해하니 그냥 간이 안 좋나 보다 생각해서 엄마가 인진쑥을 달여서 아버지를 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그때부터 머리가 아팠던 거 같다.



이런 것 말고도 문득 문득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지만, 누구한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결혼을 했을때나, 딸내미를 낳았을 때나, 큰 수주건을 따내고 왔을 때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때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참 좋아하셨겠지 생각했다. 그리고 일하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뭔가를 결정할 때 아버지가 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 마치고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 혼자 걸으면서 많이 울었다. 어디다 말할 수도 없고, 이런 이야기 누가 좋아할 거 같지도 않고.



언젠가는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한번 써보고 싶었다. 시간이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볼 수 있게 되나보다. 사실 우리 집이 돈이 없던 거는 아버지가 계시나 안 계시나 똑같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큰 지붕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제는 정말 비 피할 데도 없으니 이 악물고 버텨내어야 되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말 그대로 버티는 것이었다.



그만 질질 짜고 마무리해야겠다.

아버지. 아버지는 참 좋은 아빠였어요. 아버지 덕분에 그나마 사람 구실 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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