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한 '부사'의 힘

소위 김하진 작가의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를 읽고

by 오즈의 마법사


겨울방학을 맞아 그동안 사두기만 했던 책들을 차례로 읽고 있다. 읽고 지나치기보다 감상을 글로 남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평이 쌓였다. 그러던 중 오래전부터 마음에 남아 있던 한 작가의 책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방향을 잡아주었던 소위 김하진 작가의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였다.


소위 김하진은 ‘소소한 일상의 위대한 힘’이라는 필명처럼, 일상의 미세한 결을 섬세하게 포착해 온 작가다. 2023년 월간 에세이 수필 등단, 2024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으로 에세이와 소설을 넘나드는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은 브런치 연재 글을 바탕으로 출간되었으며, 총 5장 57개의 ‘부사’로 삶을 사유한다.


이 책에서 부사는 단순한 문법 요소가 아니다. 우연처럼 삶에 스며들어 가슴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고 떠나는 말들이다. 작가는 사랑과 꿈, 용기와 관용 같은 삶의 가치들을 부사라는 렌즈로 다시 바라본다. 문체는 단아하지만, 질문은 묵직하다.


제1장 가족, 굴레가 아닌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지극한 희생은 분명 그 자체로 삶의 의미이자 보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삶과 자식으로의 삶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싶다. 자식으로서의 부족함에 반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살기 위해 먼저 고통에서 도망쳐 버리기도 하면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가는 게 지금의 내 모습인것이다. 삶에서 그 두 가지를 모두 다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누구한테 어떤 평가를 받든 상관없이.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중 - P37


이 부분에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책임과 균형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이 삶의 의미가 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삶을 지워가며 감당해야 할 의무는 아니라고 말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메마른 가슴으로는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을 테니까.


이 문장은 부모 돌봄이라는 현실 앞에서 ‘자식으로서의 나’와 ‘한 인간으로서의 나’ 사이에서 균형을 고민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책임과 희생 앞에서 완벽한 사랑을 꿈꾸기보다, 가능한 배려를 선택하는 태도가 오히려 더 단단한 사랑일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제2장 삶이란 시험에 정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해 주는 ‘만약’이다. 그렇게 만약은 지금까지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미래 속에 나를 가져다 놓음으로써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는 마법 같은 부사이다. ‘만약 내가 작가가 된다면?’이라는 행복한 상상 하나로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신춘문예에 당선도 되고 이렇게 출간도 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상상의 힘을 등에 업은 ‘만약’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부사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면?-)중 –P63-


‘만약’이라는 부사가 긍정의 언어로 전환된다. 흔히 후회와 불안을 불러오는 말이지만, 이 책에서 ‘만약’은 삶을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 상상의 힘이다. 상상이 현실이 되었던 작가의 경험은, 현재를 견디게 하는 말 한마디의 힘을 보여준다.


제3장 나를 찾아가는 나날들


실제로 나는 주변 사람들의 의혹 어린 시선과 질타를 받곤 했다. 왜 그 좋은 교사를 그만뒀어? 왜 수녀가 되지 못한 거야? 왜 잘 나가던 출판사를 나왔어? 공무원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걷겠다고 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다. 그런데 내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참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멈추는 일이다.

(도저히, 못 견디지 않을까) 중 -p123


작가의 삶의 궤적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이다. 안정적인 직업을 뒤로하고 글을 쓰는 삶을 선택한 이유는 거창한 결심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특히 인상 깊은 대목은 성취에 대한 태도다. 기어이 해내는 사람보다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은 결과보다 지속을 선택하겠다는 다짐처럼 읽힌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 대신, 계속해도 된다는 허락에 가깝다. 글쓰기뿐 아니라 삶 전반에 적용해 볼 만한 태도다.


제4장 너와 나, 관계의 벽을 넘고 넘어


진실로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얼마나 행동으로 실천하고 인생으로 구현하며 살아왔는지는 별개로 말이다. 살면서 서슴없이 ‘먼저’를 내주었던 대상은 누구였던가 생각해 본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었다.

(먼저, 나 말고 너부터?) 중 –p198


‘좋은 사람’이라는 말의 이면을 돌아본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다 보면 결국 자신을 소진하게 된다는 깨달음, 그리고 적당히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용기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제5장 세상 속에 온전히, 세상에 대고 오롯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지독한 열패감’을 맛보게 되었다. 갑자기 깊은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한글도 못 뗀 어린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기분이었고, 하루아침에 열등생으로 전락해 버린 것만 같았다. 글쓰기가 거만했던 나의 뺨을 때려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준 것이다.

(과연 그럴 만하구나) 중 –p220


작가는 글쓰기의 세계에 들어선 뒤 마주한 열패감을 다룬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던 삶에서, 글쓰기는 처음으로 자신을 바닥까지 끌어내린다. 글쓰기의 세계는 진흙탕에서 미친 듯이 뒹굴어야 도달할 수 있는 아득한 경계 너머의 ‘과연’이다. 이 문장은 글쓰기가 재능이나 요령의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견뎌내는 태도의 문제임을 일깨워준다. 실패에서 멈춘다면 가능성도 끝나지만, 통과한다면 전혀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이 읽힌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는 쉽게 읽히되 가볍지 않은 책이다. 문장을 곱씹게 만들고, 사적인 고백에서 출발해 보편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에세이나 소설을 공부하는 이들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권하고 싶다. 스쳐 지나간 말들이 사실은 삶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음을, 이 책은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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