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쌓인 편지

에세이, 산문

by 장성우 n 살생금지


나는 그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여백을 보았다.

우그러든, 찌그러진 종이들. 오래도록 습기를 머금고, 먼지를 먹고. 향香을 먹고 뱉어, 숨을 쉬듯 모양을 바꾼 종이들.


그것엔 시간이 담겨 있다. 장 내 세균이 반응이라도 하는 듯한 퀘퀘한 냄새. 이런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장내에 어떤 균이 있어 그것이 선호하는 거라든가.


피지컬Physical적으로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장 내보다는 뇌腦 내에 쌓인. 가슴에 쌓인. 아니, 영혼에 쌓인.

추억이라는 게 그 냄새에 반응을 한다.


오래된 서고, 책장. 아버지와 함께 살던 그 집의 그 냄새.


그것이 그리워서 나는 먼지쌓인, 울룩불룩 여백이 생긴 낡은 종이 더미를 더듬었다.


누구의 것이던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가. 궁금하지도 않지만 내용을 눈으로 더듬듯 읽어보았다.


맹인이 점자문을 읽듯. 맹인은 아니지만 가슴엔 시꺼먼 것이 메우고 있는 터라, 글을 읽어도 가슴이 울리지 않고. 머리로 들어오지 않기에.

그러나 그럴 때라도 글을 읽는다.


-S에게


예전.


마치 ‘나’에게 적은듯 들리는 편지의 서문을 보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묵묵하니,


아무런 말도 없이 글자를 보곤


무엇도 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우두커니. 오도카니. 고독하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릴런가. 뇌가 만들어내는 환청일지.


명필로 쓰여진 편지의 글자들을 읽으니, 검은 것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풀리는 듯도, 했다.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구나. 타지에서 고생이 많다.


사람을 가려서 만나고, 언행을 조심하고. 어디가서든 잘 할 거라고 믿는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한 가족, 한 겨레, 하나의 뿌리로 이어져서 집단으로 생활을 해왔다.


그것을 잊지 말고, 늘 무리 안에 붙어 있어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하나를 얻어 먹거든 하나는 사주어라. 친구와 잘 지내고.


많은 당부를 하진 않으련다. 언제나 모범생이었으니. 거기에서도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계획대로 잘 해보거라. 시간을 지켜서, 인생이란 어디에 있으나 전쟁과도 같으니.‘


투박한 말투. 감성. 정서.


그러나 꾹꾹 눌러 적힌 글씨 속의 마음은 멍든 내 마음을 치유하기엔 너무나 충분했다.


오래된 서고.


이리저리, 이사를 하고 정리를 하지 않아 언제 쓰여졌는지도 모를 편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적어주었을까.


참으로 오래된 물건.


나는 그 문맥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마음을 받았다.


글이란 그렇다.


내 얘기가 아니더라도, 아무런 관련이 없더라도. 별 문장이 아니더라도.


길을 지나가다가도. 그냥 벼락을 맞은 듯, 내게 하는 이야기로 들릴 때가 있는 법이었다.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퇴색되어, 내 몸도 정신도 삶도 생명도 모조리 버려버리고 싶은 어느 날의 거리에서.


길가에 적힌 어느 문구에 마음을 돌려 다시 살아볼 용기를 얻을 수도 있는 법이었다.


글에는 신神께서 깃든다.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그 끝과 처음을 알지 못하나 영원부터 계신 유일한.


문학이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무엇이든. 그 첨단, 선두를 걷는 걸음에는 신이 깃들게 마련이다.


인간이란, 홀로 걸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가족에 기대어. 어른에 기대어. 아버지의 등에 기대어. 아버지의 말에 기대어.


사람은 전해지는 그 유구한 의지에 기대어 살아가고, 역사를 살아간다.


그렇게 걸어가다,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도 절감하여 쓰러질 때 즈음엔,


비로소 알게 된다.


’역사‘란 내 것이 아니었구나.


온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었구나.


그런 겸손함을 절감할 때


신은 사람을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신다.


“후우…….”


낡은 서고에 어울리는, 누런- 늦은 오후의 햇빛이 슬며시 비쳐 들어오는 실내.


먼지가 햇빛에 반사되어 선명히 보이는 그 서고의 한 구석.


먼지 쌓인 편지, 그 사이 쌓인 우그러진 여백. 그 사이의 긴 시간이 내 삶처럼 흘러, 같은 시간을 견딘 편지의 문장이 내게 감동을 주었다.


부스럭-.


나는 천천히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원래의 정리된 끈 사이에 넣고 갈무리를 했다.


감정을 추스르고-.


아니 그러지 못해 한참을 그 자리에 더 서 있다가, 나섰다. 지친 인간이 걸어갈 힘을 얻는 건 뜻하지 않은 곳에서일 수도 있었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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