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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한 Feb 21. 2023

10번의 낙방

유럽으로 떠난 배낭여행

부모님에게는 학교에 이상한 전통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드렸다. 군대 갔다 와서 학업을 이어서 하겠다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휴학을 한 거 일찍 군대를 가고자 마음을 먹었다. 사람들은 힘들걸 싫어하겠다 싶어서 해병대를 지원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경쟁률도 높았고 체력시험과 면접도 있었다. 나름 체력에는 자신 있었다. 윗몸일으키기와 팔 굽혀 펴기 테스트를 봤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준비되지 않았으니 그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다. 아직 군인이 아닌데도 군기가 가득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군대를 일찍 가려고 해병대에 선택한 내가 아니라 해병대에 가고 싶은 그들이 합격해야 마땅했다. 나는 합불통지가 나기 전에 병무청에 전화했다. 이미 떨어졌을 거라 예상하고 접수취소했다. 그래야만 이어서 육군 직계가족복무부대병을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원할 수 있는 지원병과는 제때제때 지원했다. 의무복무인데도 불구하고 군대 가고 싶은 사람은 왜 이리 많은 건지 매번 떨어지기 일 수였다. 참 군대 가기 힘들다.


군대 가겠다고 3월 초에 휴학하고 여러 번 낙방해서 몇 개월이 흘렀다. 집에만 있을 수 없어서 아빠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아빠와 함께 건설현장에 나가 보조역할을 했다. 일당은 10만 원으로 쏠쏠했다. 10일 일하면 100만 원이라니 갓 졸업한 나에겐 큰돈이었다. 돈이 통장에 쌓이니까 여행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모님의 졸업선물의 영향이 큰 듯했다. 처음에는 또 일본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 돈이면 더 먼 곳도 갈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최근에 TV에서 동유럽 여행 프로그램을 봐서 그런지 유럽이 가고 싶어졌다. 이때 아니면 언제 가겠나 싶어 유럽여행을 가겠노라 다짐했다.


보통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현장으로 출근했다. 언제 군대로 팔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용직으로만 일했었다. 하지만 여러 번 낙방하고 보니 쉽게 군대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일터가 바뀌고 출장을 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이 많은 나는 아빠와 함께 숙식하며 돈 벌겠다 선언했다. 그렇게 몇백만 원이 통장에 쌓였다. 누가 그랬다. 비행기표를 끊어 놓기만 하면 여행의 반은 지나간 거라고. 고민만 하다가 지나갈 시간에 비행기 표를 예매하자 실감이 들었다. 친구들은 대학에서 새내기로 있을 시간에 나는 해외에 있다니 기분이 좋았다. 마치 특권의식을 다시 가진 느낌이었다.




초여름 6월부터 7월까지 약 3주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동유럽을 돌았다. 영어도 잘 못하는데 어떤 배짱으로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그 용기가 대단하다. 어차피 너네들도 영어 못하니까 괜찮아라는 마인드를 탑재하고 여행에 임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모하고도 위험했다. 성격이 소심해서 여기저기 물어보는 것도 힘들어했다. 아는 게 없어서 무작정 걸어만 다녔다. 대화가 힘들어서 일반식당은 잘 가지도 못 했다. 하지만 그래도 페이스북 담벼락에 사진을 올려 여행 왔다고 잘난 척을 했다.


진짜 원하는 바가 있어서 대학을 가지 않고 여행하는 모험가 이미지를 얻고자 했다. 꿈 없이 그저 성적대로 대학을 가는 친구들을 얕잡아 봤다. 그에 비해 꿈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고 착각을 했다. 대학을 가는 것 대신 세상으로 나와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경험은 가히 대학에서 배우는 무엇보다도 더 값지다고 생각했다.


체코의 한 도시에서 한인민박을 묵었다. 그곳 사장님은 한국인들을 싫어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한국사람들은 놀 줄도 모르고 먹을 줄도 모른다고 한다. 틀에 박혀있는 루트로 다 똑같이 돌아다니고 논다고 볼멘소리를 해댔다. 나는 그 사장님이 맘에 들었다. 사장님의 표적이 된 건 한국인 그리고 대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사장님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사무실에 찾았다. 사장님의 인생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캐나다와 독일에서 유학을 한 사장님은 독일의 교육정책이 탁월하다며 찬양을 끊이지 않았다. 학비도 저렴하거니와 학생신분이면 교통비도 싸다. 순간 혹해서 한국 돌아가면 유학원을 알아볼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한인민박에서 같이 어울렸던 사람들 중에 독일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이 별로 똑똑해 보이지 않아서 유학생활이 만만해 보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외국인들과의 사진과 이국적인 동유럽의 사진으로 나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도배를 했다. 실상은 고되고 외로웠다. 하지만 친구들의 부러워하는 덧글들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마치 선민의식을 가지게 된 듯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단연 나는 멍청한 게 아니고 똑똑한 거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수능 이후로 현실을 마주하게 되어 꺾인 마음이 그 틈을 비집고 새순이 나기 시작했다.




동유럽을 다녀와서 이어서 곧 장 동생과 일본여행을 갔다. 이번엔 관서지방이다. 유럽을 갔다 오고 나서 일본은 매우 편한 여행지처럼 느껴졌다. 한해에 세 번이나 출국을 하게 되어 여권에 많은 스탬프가 찍혀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훈장과도 같았다. 친구들도 하나둘씩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많이 채워져 있었다. 대학이야기를 하면 재빨리 말을 돌려 여행이야기를 했다. 어느 누구도 해외여행을 가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쉽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부러워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기뻤다. 똑똑한 이미지와는 약간 벗어나있지만 자기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도피처에서 우연히 얻게 된 이미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언제라도 다시 밝혀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외면했다. 그러는 것이 속편 했다. 10번이나 입대에 낙방해서 10개월이나 허비했지만 그 시간들이 감사했다. 나는 한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논하지 않기로 했다. 회피기동이 발동했다. 나는 똑똑하지 않아서 공부를 못한 것이 아니다.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간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꿈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거짓된 것들로 내가 바라는 이미지를 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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