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터와 부자 성인 조화서 조윤호 기념 성지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널리 퍼졌을까? 어떤 형태로 발전해 왔을까?
프로방스 양식의 여사울성지 성당은 아름다운 외관으로 많은 방문객의 발길을 끈다. 정성스럽게 가꾼 화분들의 꽃들은 건물과 조화를 이루어 더욱 더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의 생가터가 있기 때문이다.
생가터는 지금 현재는 잔디밭이다. 가운데 제대로 쓰이는 큰 화강함이 있고 왼편으로 내포천주교복음첫터 내포사도 순교자 이존창 생가지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있다. 제대 위쪽으로 십자고상이 인상적이다. 제대 오른편으로는 동글동글한 성모상이 있다. 봄에는 철쭉으로 가득하다니 꽃동산을 상상해본다.
성모상 쪽으로 가니 십자가의길 안내가 있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기도를 하다 보면 어느 새 십자가상이 있는 언덕에 도착한다.
여사울 성지의 십자가의 길 조형물들이 상반신 위주로 표현을 하고 있어 표정들이 눈에 들어온다. 언덕에도 야외제단이 있는 잔디밭이 있다. 올라오는 길 오른편에도 운동장 같은 공간이 있는 걸 보니 단체로 성지순례를 많이 오는 듯하다.
주차장 주변에 핑크뮬리가 심어져 있어 가을르 느끼게 한다.
여사울성지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올라가지 마시오' 라고 하는듯 3개의 조형물이 있다. 십자가의 길 작가가 만든 것 같다. 성전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여니 여사울 및 인근 순교자 23명의 명단과 사진이 있다. 유리케이스 안에는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서적들이 있다.
여사울성지는 예산군 신암면에 위치하고, 청양에서 시작한 무한천과 홍성에서 시작한 삽교천이 만나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시작점에 자리하고 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이존창 생가터와 여사울성지 성당이 마주하고 있다.
부자들이 많이 살고 기와집이 많아 서울과 비슷하여 여서울이라 불렸던 것이 여사울이 되었단다. 여사울은 충청도 지방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꼬가 태어난 곳이고 활발하게 전교 활동을 했던 곳이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존창은 스승 권철신, 권일신 형제로부터 교리를 배우며 입교를 했다. 고향으로 내려와 천주교 신앙을 전하면서 내포 평야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렇게 여사울은 내포 교회 넓게는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리 교회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과 최양업의 집안도 바로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충청도는 그 당시 가장 큰 교세를 떨쳤고 충정도 신자들은 박해 때 전국으로 퍼져 복음의 씨앗을 뿌리 내렸다.
초기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이 조직한 가성직자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1791년 신해박해때 체포되었으나 배교를 하여 바로 석방되었다. 이후 여사울을 떠나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였다. 이존창은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고 더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하였다. 다블뤼 주교의 '주요 순교자 약전'에는 '지금 (1850년) 내포 신자들 중 절반 이상이 이존창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후손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가성직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한국 교회에도 사제가 있어야 함을 인지했기에 주문모(1752-1801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은 공주에서 심문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다시 공주 감영으로 내려와 참수형을 받았다.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가지러 갔을 때 6번 칼질에 잘라진 목이 다시 붙어 있었고 목에 실날같은 흉터가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대전교구는 이존창 생가터 성지조성 준비로 1969년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십자가, 묵주패, 성해통 등 유물이 나왔다. 이존창이 실제 이지역에서서 신앙활동을 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이 유물들은 절두산 성지에 보관되어 있다. 발굴 이후 1983년부터 성역화하기 시작해 2002년부터 성지 개발이 진행되었다. 2008년에는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성지 성당이 지어지기 전에 사용한 옛 공소가 근거리에 있다.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다.
여사울 옛공소에서 나와 아산시 신창면에 있는 남방제 성지를 방문했다. 이정표를 잘 보고 따라가야 한다.
이 성지는 기해박해 이전 부터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다. 남방제와 연결이 되있는 54위 순교자들의 숨결이 살아 있다. 2016년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 성인과 아들 조윤오 요셉 성인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성지를 새롭게 조성하였다.
조윤호 일가는 원래 경기도 도마지에 살다가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한 이후에 아버지 조화서가 남방제로 이주하였다. 조화서는 한 막달레나와 결혼해 1848년 조윤호를 낳았고 1850년경부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로 교우들을 순방하는 길에 함께하였다.
1865년에 조윤호는 아버지와 함께 전주 성지봉으로 옮겨 이 루치아와 혼인을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포졸들의 급습으로 부자는 체포되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은 부자를 같이 처형하지 않는 국법에 따라 아버지는 12월 13일 숲정이에서 아들 조윤호는 12월 23일 전주 서천교에서 순교하였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중앙에 원뿔 형상의 신창순교자 신앙비가 서 있다. 들여다보면 신창과 관련된 순교자들이 계단을 따라 오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정상에는 조화서와 조윤오 부자가 십자가 형상의 소나무와 함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다. 성인 조화서 베드로와 성인 조윤호 요셉의 모습이 인상적이며,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 십자가가 특히 눈에 띈다.
오늘 둘러본 두 성지는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연결되어 있다. 여사울에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남방제에서 꽃피워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존창이 없었다면 우리 천주교의 역사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그의 헌신적인 전교 활동 덕분에 내포 지역은 물론 전국으로 신앙이 확산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