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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크가드너 Nov 14. 2024

뭐가 중한디

김대건신부의 활동지역 용인 은이성지와 이천 단내성가정 성지


"단풍철이라 평택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가요." "은이 성지는 어떨까요? 근처 다른 곳도 둘러볼 수 있어요." 남편의 표정에서 맛집 검색을 시작할 기색이 보였다. 창밖으로 스치는 단풍잎이 가을 하늘처럼 맑고 청명했다.

낡은 지도를 펼치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은이성지에서 골배마실을 거쳐 단내 성지까지, 손끝으로 더듬는 순례길에 가슴이 설렜다. 은이성지 미사 참여까지 계획했건만, 남편이 반대쪽으로 차를 돌렸다. "왜 이쪽으로 가요? 늦었는데..." 미사시간이 촉박해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공기압이 낮아 넣고 가려고." 남편의 의아한 눈빛에 나는 "은이 성지 미사가 11시예요"라고 말했다. "그럼 말을 해야지." 빠르게 "네"라고 웃으며 답하니 무거워질 뻔한 차 안의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늦으면 미사 안 들어가도 돼요"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10시 55분까지 도착하게 해주세요' 하고 화살기도를 날렸다. 10시 58분, 타이어가 자갈을 밟는 소리와 함께 주차장에 도착했다. 미사 참석을 포기한 남편은 화장실로 향했다.  성당 밖에서도 들리는 독서 소리에 가슴이 설렜다. 얼마 전 고창 개갑성지에서 미사를 못 드린 아쉬움이 떠올라 남편을 찾아 나섰다. 미사에 들어가자고 했지만, 남편은 늦었다며 손짓으로 만류했다.하지만 내 발걸음은 이미 성당을 향하고 있었다.


강론 첫 마디가 가슴을 울렸다. "오늘은 위령의 날이니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지금 미사 봉헌하세요."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시부모님과 엄마를 위한 거였구나.' 가슴 한켠이 먹먹해졌다.

미사 중에도 사람들이 조용히 들어왔다. 대각선 쪽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서 계신 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서 엄마를 보았다. 살아계실 때 혼자서 성지순례 다니셨을 엄마의 모습이 겹쳐졌다. 살기 바빴다는 핑계로 엄마가 좋아하시던 것들을 외면했던 날들이 후회로 밀려왔다. 엄마와 함께 기도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눈물이 뺨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은이 성지의 공기는 신앙의 역사로 묵직했다. 박물관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특히 어머니와 교우들과 마지막 작별을 나누던 순간이 가슴에 와닿았다. 26년이라는 짧은 생애 속 1년 1개월의 사제생활, 그 시간은 우리 신앙의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성당 맞은편 기도의 숲으로 향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십자가의 길이 이어졌다. 커다란 십자가에 새겨진 작은 동판 조형물이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남편이 찾은 양지 시내의 식당은 멀리서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번호표를 손에 쥐고 기다리는 동안, 남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식당 안에서는 지글지글 구워지는 불고기 향이 솔솔 새어 나왔다. 석쇠불고기와 김치찌개의 얼큰한 감칠맛은 허기진 배를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성북동 기사식당보다 이게 더 낫지 않아?" 남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허영만 선생과 고이선균님이 다녀간 흔적을 설명하는 남편의 눈이 반짝였다. 남편에게는 이런 맛집 탐방이 또 다른 순례길인 셈이다.


맛있는 점심을 마치고 찾은 단내성지. 주차장에서 만난 오토바이 두 대가 반가웠다. 은이성지 김가항성당에서 마주쳤던 그들의 손에도 우리처럼 스탬프 북이 들려있었다. "저기 오토바이 탄 분들도 맛집 순례중일까?" 남편이 농담처럼 던졌다.


와룡산 정상에 있는 예수성심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남편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예수성심상, 굴바위, 검은 바위 김대건성인로, 순교자묘역까지 다 둘러보고 싶었지만, 점심시간부터 노곤해진 남편을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문득 깨달았다. 지난주 고된 일로 쉬어야 할 주말에도 나를 위해 동행해준 것이었다. 점심때 그가 했던 말이 의미심장하게 떠올랐다. "이젠 보살펴줘야 하는 남편"이라고.


성지순례를 다니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남편의 말은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말이 아니어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계획을 내려 놓는 것이 사랑이란 것을, 오늘의 순례길이 조용히 가르쳐주었다. 그가 좋아하는 맛집 탐방과 내가 원하는 성지순례가 조화를 이루며 우리만의 여행이 완성되어 갔다. 남편과 나는 서로의 관심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친한 척이 아니라 찐친이 되가고 있다.


오늘따라 단내성지의 '성가정'이라는 이름이, 서로를 보듬어가는 우리의 모습과 겹쳐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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