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정리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무엇을 남기고 싶을까?"
평범해 보이는 이 질문은 우리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물질적인 것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람은 살면서 집, 돈 같은 '물질적 유산' 외에도, 마음을 담은 '정서적 유산'(편지, 사진, 추억)과 삶의 지혜를 담은 '가치적 유산'(삶의 방식, 철학, 신념)을 남긴다.
최근 생전정리에 대해 배우고나서, 이 질문을 계속 내게 던지고 있다. 엄마를 떠나보낸 나의 경험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많은 분들이 '정리'라고 하면 돌아가신 후에 남겨진 물건들을 치우는 '유품정리'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생전정리는 유품정리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유품정리는 고인이 된 후, 남겨진 가족들이 떠맡게 되는 '미완의 정리'다. 가족들은 고인이 사용했던 물건들을 정리하지만 그 물건에 서려 있는 고인의 감정, 이야기, 마음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 어떤 물건을 버려야 할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그 판단 자체가 남겨진 가족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시어머니의 유품정>라는 책에서 읽은 일본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 다세대 주택에서 '맥시멀 라이프'를 사시던 시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며느리는 비싼 정리 비용때문에 홀로 여름철 무더위 속에서 무거운 짐을 옮겨야 했다. "왜 이걸 다 나 혼자 해야 하지? 왜 이런 걸 버리지 않고 이렇게 다 쌓아뒀지?"라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며 '감정의 무게가 엄청 많이 실리는 정리'를 경험했다.
반면 생전정리는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직접 하는 '완성의 정리'다. 물건뿐만 아니라 감정과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단순히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는 것을 넘어, 그 물건에 담겨 있는 기억과 감정들을 함께 정리하는 과정이다.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남기는 것'이며, 가족에게 전하고 싶었던 감사함, 미안함, 사랑의 마음까지 함께 정리하고 전달할 수 있다.
강의에서 들은 6남매 이야기가 생전정리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노쇠해지자 6남매가 모여 아버님의 물건과 집을 정리했다. 낡은 연장, 지게 등을 정리하면서 자녀들은 "이때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지", "그때 너무 열심히 하셨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어"와 같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형제간에도 물건에 얽힌 추억을 공유하며 소통하고, 아버지에게 눈물 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한다. 낡고 버려야 할 것 같던 톱을 셋째 아들이 가져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처음에는 "그런 걸 가져가냐 버리지"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인생과 존재를 인정받는 듯한 뿌듯함과 감동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생전정리다. 사랑과 감사가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과정이다.
엄마와의 이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코로나 시기를 온통 요양병원에서 보내고 마무리될 즈음 요양원으로 이사를 갔다.
.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 아쉽다. 엄마에게 덜 미안한게, 아픈 엄마와 같이 목욕탕에 간 것, 미사를 같이 참석한 경험이다. 이건 두고 두고 나를 위로하고 있다.
그즈음 명절에 가니 엄마의 짐들이 정리가 많이 되어 있었다. '내가 정리를 안 해도 되니 좋다'고 생각했다. 셋째 올케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남긴 귀금속은 큰 형님 드렸대. 아가씨는 사이즈가 커서 입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외투 하나와 등산화 가져왔어.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딸이 우선이었을 텐데."
아버지가 내게 건넨 건 현금 조금과 묵주였다. 아버지는 혼자서 엄마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엄마와 상의를 한 껄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아버지는 어쩡쩡한 생전정리를 한 거고, 우리들은 유품정리를 한 것이다.
생전정리를 먼저 공부했더라면 상황이 좀 달랐겠지. 아쉬움이 남는다. 아버지, 오빠들, 올케들과 함께 엄마를 추억하며 같이 했을 텐데. 장례식장에서도 서로 자신의 아픔을 돌보느라 함께 엄마의 이야기를 제대로 못했다. 엄마 이야기, 할머니 이야기, 부인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결국 생전정리는 '무엇을 버릴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까'의 문제다.
물질적 유산은 언젠가 사라진다. 정서적 유산은 누군가의 마음을 오래도록 지탱한다. 가치적 유산은 다음 세대의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엄마가 묵주를 통해 내게 남긴 건 물건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 기도의 마음이었다. 우리를 향한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며 엄마의 묵주로 오늘도 기도를 한다. 때로는 울기도 하고 엄마에게 말을 하며 웃기도 한다. 내게 남겨진 정서적 유산이다.
만약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집이나 통장보다 진부하지만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마음을 남기고 싶다.(난 실제적으로 남겨줄 집이나 통장이 없다.) 그것이 가족에게 가장 큰 선물이자, 내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유산일 테니까.
우리 모두 언젠가는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작은 물건 하나라도 의미를 붙들고, 사랑을 전하며 정리해 보는 건 어떨까? '이 물건을 보면 너와 그때 행복했던 시간이 자꾸 떠오른단다'와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대화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