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알
아버지는 늘 근검절약을 강조하셨다. '한닢이라도 아끼자'는 것이 아버지의 인생 철학이었다. '아끼고 살아야 남들만큼 살 수 있다'고 하셨다. '있다고 덤벙덤벙 쓰면 한푼도 모을 수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누가 봐도 알뜰한 사람이었다. 시골 말로는 '여무다'라고 한다. 그것은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꼭 필요한 데만 쓴다는 말이다. 지갑을 완전히 닫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일에는 아낌없이 쓰셨다.
학교에 다니면서 남들에 비해 딱히 우리집이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학교에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고 빠지지 읺았다. 부모님 덕분에 몇 명 신청하지도 못했던 초등학교 급식 빵을 나는 매주 먹을 수 있었다. 4교시 마칠 무렵이 되면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향했다. 뽀오얀 황토 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으로 들어오는 삼륜차가 늘 반가웠다. 그 차를 '빵차' 라고 불렀다. 빵을 한 개씩 받았지만 차마 덥썩 베어 물 수 없었다. 학교 갈 나이가 되지 않은 어린 동생들이 집에서 형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기에.
여름에 학교갈 때 친구 누구처럼 멜빵있는 반바지를 입어보고 싶었으나 고무줄 반바지 입었어도 괜찮았다. 하나밖에 없는 운동화를 빨아 말리는 통에 중학교 여름 방학 중간등교일 때 검정 고무신 신고 호랑이 선생님 앞에 섰을 때는 조금 부끄럽기는 했다.
대학입학 합격자 발표일에 무릎과 팔꿈치를 네모 천을 덧대어 기운 교복을 입고 장전동 캠퍼스에 갔을 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학교 앞 레코드 점에서는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가 한창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래가사에 마음이 갔을 뿐 '공부하러 왔는데 옷이 뭐가 대수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시의 친구들이 시골 우리집에 오자고 할 때면 늘 난감했다. 도시와 다른 시골 우리 집을 그들에게 개방하기엔 내가 너무 많이 도시화 된 생각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둘 다 처음에는 모르고 있다가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야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던 것처럼. 그래도 나의 이 견고해진 선입견을 뚫고 돌파해 온 도시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주소마저 어떻게 알고 이 먼 곳을 찾아 왔는지. 엄마는 이들에게 정성을 다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셨다. 친구들은 시골에서 이렇게 정갈하고 맛있는 밥상을 받아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방에서 나올 때는 늘 '전기를 끄고 나오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백열등이었다. 맑고 둥근 유리 구 안에 열기로 빠알간 필라멘트가 인상적이었다. 전구를 만지면 뜨거웠다. 크고 밝은 60와트, 100와트도 있었지만 30와트가 가장 저렴하고 전기세도 아낄 수 있었다. 호롱불이나 촛불보다 백배나 더 밝아 '희망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럼에도 학비는 언제나 부족함이 없으셨다. 항상 제 날짜 아니 청구서 받아 오는 다음날 바로 내도록 챙겨주셨다. 다른 아이들이 점빵에서 과자를 사먹거나 아이스 바를 사먹을 때 나도 사먹고 싶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 하나 안 먹어도 학교가고 집에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아버지도 다른 집처럼 아이들 초등학교만 보내고 끝내셨더라면 삶에 좀 더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공부에 대한 한(아버지는 시골말로 '포원지셨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간절한 염원'으로 바꿀 수 있다. 아버지는 두 세살 때 부모를 모두 여의셨다)을 저버릴 수 없었기에 자식 공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셨다.
여름에 우리집은 수박 한 통이면 족했다. 여러 번 먹지 않아도 좋았다. 지금처럼 쉽게 먹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에 수박 한 통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것을 한번에 나눠먹고도 여름 한 철을 거뜬하게 날 수 있었다. 이 수박 한 통조차도 일부러 생 돈을 써가며 그저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맛있는 수박을 먹어보기 위해 우리는 땀을 흘려야 했다.
아버지는 우리들을 모아놓고 가르치셨다.
'이 밭에 있는 보리 이삭 다 주워 모아 오면 팔아 그 돈 모았다가 나중에 수박 사먹기로 하자'
오뉴월 땡볕에 우리는 넓은 밭에서 돈이 되고 수박이 되는 보리이삭을 한톨 한톨 열심히 주워 모았다. 그리고 내내 입안에서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 한그릇을 침이 마르도록 떠올렸다.
그리고 나중 그 '때'가 오면 수돗가 찬물 다라이에 커다란 수박 한통이 담겨 있었다. 엄마는 큰 부엌칼로 수박을 반으로 쩌억~하고 가르고 붉은 속을 파내어 양푼이에 담고 그릇 그릇 나눠주셨다.
과자 사먹거나 놀이 딱지 살 용돈 없어도 학교다니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학교 다니면서 필요한 돈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형편이 되지않아 수학여행을 빠진 적도 없었다. 일부러 알바해서 돈 벌려고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알바하는 시간있으면 공부하라'고 하셨다. 대학등록금은 물론 두 번에 걸친 졸업여행도 당연히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솔직하셨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는 것을 삶으로 실천으로 보여 주셨다. 필요한 일 이외에 돈이 나갈 일을 하나라도 절대 만들지 않으셨다. 그런 것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셨다. 남들 다 있는 TV없이도 대학까지 졸업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고등학교시절에 읍내에서 자취생활하며 부모님이 주시는 일주일 생활비 얼마 이외에 더 달라고 떼를 써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주시는 돈을 최대한 아껴서 그것으로 필요한데 썼다.(책을 샀고 운동을 위하여 복싱 글러브 등을 샀다) 우리는 아버지와 엄마가 얼마나 성실하게 살고 계시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분이 힘들게 하고 계시는 일을 도우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크면 아버지 엄마한테 잘해드려야겠다는 의무와 책임감이 마음 속에서부터 무럭무럭 자랐다.
장에 가서 소를 팔고 오셔도 아끼느라 여전히 그냥 빈손이셨던 아버지는 가끔 엄마를 위해 보양식으로 족발을 사오셨다. 또 동네에서 돼지나 염소를 잡거나 할 때 고기를 사오셔서 가족들을 먹이셨다. 그리고 때로는 신세지셨다며 집안 어른들을 부르셔서 한턱을 내셨다. 살림밑천인 염소를 기꺼이 한마리 잡으시고 크게 베푸셨다.
아버지는 술이나 노름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천성이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하고 정직하고 성실함에 있어서 아버지와 엄마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 꼭 빼닮으셨다. 아버지는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남들만큼 살 수있기를 바라셨다. 편하고 쉬운 길보다 온 몸으로 사는 삶을 택하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