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 없는 만남의 시간들
"명기야 너도 여기까지 왔구나."
"어. 민숙아."
"잃은 소는 잘 찾았니?"
"어. 그래."
한 여름 오후 멈추지 않고 비가 내내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여름방학 때면 명기는 또래 아이들 여럿이 모여 동네 뒷산으로 소 먹이러 가곤 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소를 몰고 뒷산 풀밭에다 매어 놓고 와서 오후가 되면 다시 산으로 올라가 소를 풀어놓고 먹였다.
그런데 하루는 명기가 그만 소를 잃고 말았다. 한창 산도라지를 캐고 있을 때였다. 산에는 자주색과 흰색으로 꽃이 핀 산도라지가 여기저기 널리듯이 자라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주운 나무 꼬챙이를 가지고 거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놀라 캐던 것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도 소들이 모여 풀을 뜯고 있던 장소를 바라다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휑한 그림자만 남아 빈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두리번두리번 다른 곳까지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소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걱정이 덜 한 것은 명기네 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집 소들까지 여러 마리가 동시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장 소 한 마리가 풀을 뜯느라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다른 소들까지 줄줄이 따라갔다. 등너머에 있는 이웃동네로까지 한참을 그들끼리 풀만 띁으며 정신없이 몰려간 것이었다.
어른들을 따라 함께 소를 찾으러 명기도 이웃동네로 갔다. 영리한 소들이 풀 맛에 이끌려 낯선 길인 줄 모르고 따라가보다가 어느새 이 길은 아니다 싶었는지 더 이상 가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그 동네 가운데 넓은 공터에서 멈추고 모두 모여 한자리에 있었다.
소들은 낯선 환경에 자기들도 놀라 주인을 찾아 움머하고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더러는 새끼 송아지한테 젖을 물리고 있기도 했다.
하늘을 덮을 듯이 사방으로 가지가 뻗은 오래되고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그 동네 사람들이 웬일인가 하고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왁자지껄 소란에 어른들을 따라 민숙이도 구경을 나왔다. 민숙이는 노랗고 예쁜 우산을 쓰고 분홍 장화를 신었다.
민숙이는 신명기와 5학년 1반 같은 반 또래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민숙이를 갑자기 만나게 된 명기는 당황스러웠다. 비 맞고 초라한 자기 모습에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민숙이는 그런 명기를 보고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숙이가 이같이 말을 붙여온 것은 명기가 비를 맞고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는구나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인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민숙이는 학교 끝난 후 매일 교실에 남아 탁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학교대표 선수라고 했다. 어떤 대회를 나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학교 끝나고 빈 교실 책걸상을 모두 한쪽으로 밀어내고 교실 가운데 탁구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과 더불어 탁구 연습을 했다. 명기는 선생님과 친한 민숙이가 부러웠다.
가끔 학교에 일찍 가면 당번이 와서 치우기 전 교실 뒤편 테이블에 짙은 갈색 빈병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있었다. 또래 아이들은 빈병에 한 번씩 입을 대어 보고는 오줌냄새가 난다며 퉤퉤거렸다. 그것이 맥주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전기가 들어온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골 점방 같은 곳에서는 기꺼해야 막걸리 소주는 있어도 맥주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아이들이 맥주가 술인지도 몰랐고 어디에 쓰는지도 몰랐다. 명기가 나중에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반 친구하나가 독일에 살고 있는 고모가 독일인 고모부와 한국에 와서 매일 맥주를 사다 물처럼 마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저도 맥주는 아무나 마시기 못하는 비싼 술로만 알았었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학교 도서실로 반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비밀의 공간처럼 굳게 잠겨있던 문이 열리고 커튼을 제치자 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그 안에는 이제껏 한 번도 본적 없는 금박 글씨가 반짝이는 불그스럼 양장본 예쁜 책들이 서고마다 빼곡히 꽂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왜 여태 이렇게 좋은 책이 있는 도서실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명기에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후로도 다시 그 도서실을 가 본 기억은 없었다.
명기가 처음 꺼내 본 책은 장발장이었다. 이 책은 명기의 평생을 통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첫 번째 외국소설이 되었다. 우연히 옆자리에 온 민숙이가 보였다. 반짝이는 예쁜 머리핀이 명기의 눈에 먼저 와 꽂혔다. 민숙이는 소공녀를 들고 있었다. 빛 좋은 햇살이 창문틀 담쟁이덩굴 사이를 뚫고 들어와 도서실 바닥을 환하게 비췄다. 거기서 그 책을 비록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어도 명기와 민숙이는 그 책들을 서로 바꿔가며 읽어보기도 했다. 명기는 책 읽기도 좋았지만 민숙이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기쁘고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6.25가 가까워오자 선생님은 아이들한테 6.25를 되새기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6.25를 주제로 포스트를 하나씩 그려 오도록 숙제를 내주셨다. 무찌르자 공산당. 멸공.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등 표어들도 교실 뒤편 게시판에 나붙어 있었다.
명기는 집에서 국군이 UN군과 악수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다음날 선생님이 보시고 잘 그렸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내일부터 수업 후에 남아 그림 그리기 연습을 하자고 하셨다. 집에 가서 엄마께 말씀드리고 색깔 종류가 더 많은 크레파스를 교문 앞 문방구에서 새로 사놓기도 했다.
다음날 남아서 그림연습을 하는데 민숙이도 있었다.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림을 쉽게 그리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데 벌써 그림을 그리고 있던 다른 아이들이 자꾸만 새로 사 온 명기의 크레용을 하나씩 빌려가는 것이었다.
명기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나중에 보니까 민숙이는 그림을 더 잘 그렸다. 명기가 민숙이에게 물었다.
"우와. 민숙아 너는 그림도 예쁘게 잘 그리는구나. 언제 그림을 배웠어?"
"배우기는... 고마워. 그런데 명기야. 너도 보니 그림 참 잘 그리더라"
하고 민숙이가 칭찬하며 말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명기가 써보기도 전에 새 크레용을 이것저것 막 빌려가는 바람에 아까는 조금 속상하기도 했지만 민숙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명기의 마음속엔 예쁜 꽃이 소복소복 자라나고 있었다.
민숙이는 공부도 잘했다. 전교 3등까지 했었던 명기보다 더 성적이 좋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인근에 있는 광산을 운영하시고 어머니는 책을 쓸 정도로 많이 배운 분이셨다. 잘 사는 집이었다. 국민학교 졸업할 때 6년간 넣었던 우체국 저금을 돌려받을 때 명기는 2570원을 받았다. 민숙이는 25만 원이 넘었다. 반에서 제일 많았다.
국민학교 졸업 후 신명기가 민숙이를 다시 만난 것은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치르고 읍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아이들로 북새통인 그곳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같이 않게 되었다. 아니 앉고 보니 옆자리에 민숙이가 먼저 앉아 있었다. 까무잡잡한 얼굴 그대로였다. 작고 동그란 귀여운 얼굴로 민숙이는 명기에게 살짝 고개로만 까딱했다. 그렇게 민숙이가 먼저 아는 체를 해주었다. 명기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오랜만이다 우리" 하고 말을 건넸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 이후 지금 다시 이름을 부르기엔 뭔가 낯설고 어색했다. 그들이 이제 서로 이성으로 느끼게 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민숙이는 머플러가 있는 새하얀 교복 차림이었다.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묶고 있었다. 서로 몇 년 만에 다시 이렇게 만나는 것인가. 국민학교 졸업 후 각자 남중 여중 남고 여고. 거의 6년 만이었다. 무슨 말부터 하면 좋을까. 할 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말이든 선뜻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웠다. 침묵을 깨고 민숙이가 명기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먼저 물었다.
"오늘... 학력고사... 시험 어땠어... 잘 봤어?"
"어... 그래. 너는?"
"... 나도 뭐 그냥..."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내 그렇게 한 시간 반동안 어떻게 왔는지 몰랐다. 집에 와서야 민숙이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해 명기는 스스로 바보 같다며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 민숙이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명기는 대학을 졸업한 뒤 장교로 임관을 하고 부대배치를 받아갔다. 거기서 같이 임관한 동기 하나를 만났다. 알고 보니 민숙이와 같은 대학출신이었다. 공교롭게도 전공까지도 같았다. 민숙이에 대해 한번 슬쩍 물어보았을 때 그는
"아! 그 까무잡잡하고 귀엽고 예쁘게 생긴 경상도 아가씨! 보조개도 나 있었지 아마."
하며 너무 잘 안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그러나 이 동기가 혹시나 다른 생각을 할까 싶어 명기는 민숙이에 대해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명기가 취업을 하고 고향 근처 시군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거기서 민숙이와 여고에서 같은 반이었다는 한 여성고객을 만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민숙이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민숙이는 대학졸업 하고 나서 누구나 알만한 직장에 들어가 잘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근무하는 곳도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다른 어떤 도시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최근에도 민숙이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명기는 민숙이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민숙이를 만나보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지만 섣불리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안부라도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민숙이가 이곳으로 그분을 만나러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명기에게로 같이 와 주겠다는 거였다.
그날 밤 명기는 민숙이를 만나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밤새 뒤척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3년씩이나 머무르는 동안 민숙이를 만나는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말로는 민숙이가 다른 곳으로 다시 발령받아 갔다고 한다.
명기도 기다리던 서울 본사로 드디어 발령받아 올라왔다.
어느 날 저녁 퇴근 무렵이었다. 고향 근처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한 동창생에게서 몇 년 만에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고장 날아온 거 명기 너도 알지? 우리 국민학교 동창 민숙이가 그동안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오늘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빈소가 너 있는 서울 ㅇㅇ병원 장례식장이더라. 동창인데 나도 가봐야 하지만 여기서 서울까지는 엄두가 안 나네. 친구 네가 가면 내 부의금도 부탁하려고. 부의금은 바로 계좌이체 해줄게."
동창회에서 온 민숙이 부고장을 명기는 받지 못했다. 동창 모임에 자주 참여하지 않은 탓이었다. 동창생의 전화를 받고 난 후 명기는 크게 낙망했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를 다시는 볼 수 없다니 마음속에 있던 큰 기둥이 뽑히고 큰 건물이 하나 무너진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리고 함께하지 못하고 흘려보낸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심한 자책감이 들었다. 그동안 뭐 한 거야 도대체 나는. 명기는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 날벼락같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날 저녁은 부서 회식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전화했던 동창생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왔다.
"연락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일찍 운구차로 출발해서 고향으로 내려온다고 하네. 고향에서 빈소를 차리고 거기서 장례를 치를 예정이라고 하네."
그러면서 고향은 자기가 사는데서 금방이니 직접 가서 조문하고 부의할 수 있겠다며 부의금 부탁은 없는 것으로 해 달라고 했다.
이날 회식은 역시나 길고 흉포했다. 내내 거친 협동주 술잔이 몇 번이고 돌았다. 협동주는 글라스 컵에 맥주 조금 나머지는 소주를 가득 부어 채운 잔을 두 명이서 혹은 그 이상 인원이 돌아가며 나눠 마시는 술이다. 마시면서 직급순 상대배려가 있어야 해서 고약한 주법으로 꼽혔다. 소주병들이 회식장소 구석구석에 무더기로 쌓이는 것은 물론 빈 양주병까지 몇 병씩이나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남자직원이고 여직원이고 지난번과 다름없이 모두 혀가 돌아갔다. 부서장과 술이 약한 몇몇은 벌써 도망가고 없었다. 이러한 회식은 이 부서의 오랜 관행이었다. 본사에서 핵심부서라는 자긍심이 대단한 부서였다. 따라서 회식 문화도 항상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날 전쟁을 치루 듯한 회식으로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될 때까지 명기는 조문을 앞두고 조심을 하고 또 조심을 한 덕분에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지럽기도 하고 약간 메스꺼움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장례식장을 찾아갈 정도는 되었다.
명기가 홀로 찾아간 빈소에 남아있는 조문객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와 오빠만 남아 딸이자 여동생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다.
명기는 먼저 밝고 환하게 웃고 있는 민숙이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이 현실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둘 사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명기가 먼저 민숙이를 향해 중얼거리듯 말을 했다.
"민숙아... 너는 참 곱고 착한 아이였어. 나와 같은 반이 되고 친구가 되어줘서 진짜 진짜 고마웠어. 있을 때 자주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먼 길로 떠난 이제야 널 찾아오게 되네. 이렇게 찾아온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길 바래."
국화 한 송이를 놓으며 다시 한번 영정사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명기는 민숙이와 눈으로 마지막 작별인사를 길게 나누었다.
조문을 마치고 명기가 어머니와 오빠를 뵈었다. 모두 처음 대면하는 분들이었다. 명기가 자기소개를 하자 그들이 슬픔 중에서도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명기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민숙이가 어릴 때부터 명기 명기 하길래 나는 누군가 했더니 바로 자네였군 그래. 숨을 거두기 얼마 전에도 자네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네. 공부 잘하고 책 좋아하는 친구였다면서 장발장인가 소공녀인가 책이야기도 하고."
명기의 가슴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옥죄이며 아팠다.
겨우겨우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어머니와 오빠를 향해 말씀을 드렸다.
"민숙이는 참 착한 아이였어요. 제겐 정말 좋은 친구였어요. 그런데 오늘 영정사진을 보니 저토록 예쁘기만 하네요."
말을 마친 명기의 눈에서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와 주르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