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사 13

우리 소 이야기

by 장현수

부모님을 도와 소를 먹이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아홉살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동네 어른들이 소를 모는 나를 보고 '아이는 안 보이고 소만 보인다'고 했다. 소 뒤에서 일부러 숨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소에 비해 아직 내가 너무 어리고 작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소는 거의 다 자란 큰 어미 소였다.

'소 먹이러'(소를 산자락에 풀어놓고 풀을 뜯게 하는 것) 여름 이맘때쯤 우리 밭 담장아래로는 호박 줄기가 하나 둘 경쟁하듯 뻗어나갔다. 그리고 넓적한 잎사귀들 사이로 큼지막한 호박 하나쯤은 품고 있었다.


보리타작, 모내기 같은 일년 중 소를 가장많이 부리며 해야하는 농번기 농사 일도 거의 끝이 상태였다. 물론 가을 단풍이 코스모스를 앞세우고 산야를 알록달록 예쁘게 물들이고 있을 무렵 소가 한번 더 해야할 일이 남아 있기는 했다. 벼와 콩을 수확한 그 자리에 보리를 심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일이 많아 바쁜 농번기는 아니었다.


여름과 겨울 이 두 계절은 소가 쟁기를 끌거나 써레질 같은 힘을 많이 쓰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소에게는 좋은 긴 휴식의 시간이었다. 먹이고 돌보는 일은 모두 주인의 몫이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집집마다 우리같은 아이들은 잠이 덜깬 눈을 비벼가며 새벽같이 일어났다. 동네 뒷산으로 '소 먹이러' 가기 위해서다.


이른 새벽에 동구밖 큰미뜽(동네지명. 산소들이 많아서 지어진 이름)으로 동네 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 들기 시작했다. 송아지까지 합쳐 거의 40~50여 마리나 되었다. 어느정도 모이게 되면 각자 소를 몰고 동네 산 언저리까지 더 올라갔다. 거기서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한두 시간 남짓 풀을 뜯겼다. 그리고 난 후 밤나무 그늘밑에 소를 매어놓고 내려왔다. 감나무 어디선가 여기저기서 맴맴 매미가 목청을 돋우어 합창을 했다. 한낮이 되면 높은 나무에서 찌르르하는 또다른 종류의 매미 소리가 낮잠을 깨웠다.


오후가 되면 다시 아이들이 소 있는 곳으로 제각각 모여 들었다.

이때부터가 본격적으로 '소 먹이는 시간'이었다. 먼저 아침에 소와 함께 나무에 매어 두었던 끈을 풀고 양쪽 뿔에다 뱅뱅 단단히 감았다. 마치 달리기 경주를 할 때 이마에 띠를 묶는 것과 같이.


몰고 간 소는 모두 산자락에 풀어 놓았다. 들은 무리를 지으며 이곳저곳 풀을 찾아 계속 옮겨 다녔다.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 큰 연못에서 멱을 감았다.


해지는 저녁 무렵까지 소들은 쉬지않고 다니며 풀을 뜯었다. 매어놓지 않는 다음에야 소들은 절대 눕는 법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소들이 모두 배가 남산만해졌다.


밤이 되면 마당 한켠에서 매인 소가 누운채 한가로이 되새김질을 했다. 어린 송아지는 왕방울만한 눈으로 엄마 젖을 찾았다. 우리는 깔아놓은 덕석(짚으로 두껍게 짠 멍석) 위에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모기를 쫓느라 태우는 쑥대더미에서 밤새도록 연기가 피어 올랐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반짝 더욱 빛났다.


우리 소는 동네 소들 중에서 큰 축에 속했다. 그 말인즉 우리 소가 대장 역할을 자주 한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무리를 벗어나 맘대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장역할로 가장 좋을 때는 딴 곳으로 멀리 가지 않고 우리들 가까운 곳으로 무리를 이끌고 다닐 때이다. 아니면 멀리 갔다가도 집으로 갈 때쯤 우리 근처로 다시 데리고 올 때다. 그렇게 되면 멀리까지 가지 않고도 가까이서 자 자기들 소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씩 소를 어버릴 때가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혼자남아 잃은 소를 찾다보면 불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산의 정령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휘몰아치는지는 지도 몰랐다. 머리가 쭈뼛쭈뼛 곤두서고 소름이 돋았다.


소를 잃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산에서 마냥 혼자 있을 수는 없었다. 어두움이 무서워 심장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서둘러 앞서간 소들과 아이들을 쫓아 뛰다시피 산을 내려오는데 그들은 벌써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집대문을 들어설때 내 모습은 영락없는 패잔병에 다를 바 아니었다.


그렇게 집에 오니 웬걸~ 오매불망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소가 떡하니 먼저 집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놀란 나를 한번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쯤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느긋하고 태평스럽게만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내게 너무 무심한 처사가 아닌가.


잃었던 소를 다시 보니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고 안심이 되었다. 일순간 서있던 다리에 쓰르륵 힘이 풀렸다. 겨우 진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소한테로 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는 자기를 혼내는가 싶은 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손길을 피했다. 어쨋거나 소를 다시 찾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부모님은 '소는 혼자 벌써 집에 왔는데 아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되려 걱정하고 있었다'고 하셨다.


우리 소가 무리에서 빠져나와 혼자 마음대로 다닐 때는 이유불문 남의 집 콩밭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온통 밭을 헤집어 놓았다. 어디선가 '소가 콩밭에 들어갔다'고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온다면 그 소가 우리 소일 확률이 99.9%였다. 변명이 필요없는 있어온 사실이었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일이었다. '이 녀석이 또~ '하는 원망의 말이 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소를 찾아 그곳으로 까만 고무신이 벗겨지도록 부리나케 달려가기 바빴다. 씩씩 거리며 성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나를 보고 우리 소는 '나 잡아봐라' 하는 듯이 요리조리 피하며 달음질 쳤다. 밭은 기어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잡을 없이 밭에서 도망친 소는 소들 무리 속으로 재빨리 들어가 숨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었다. 밭주인한테 들어야 할 수많은 욕과 배상은 다 누구의 몫? 소는 모른다. 모든 것이 다 내 탓일 뿐이었다.


소 먹이러 오고 가는 길가 논에는 8월 뙤약볕에 벼들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있으면 벼이삭이 피게 될 것이었다. 주인은 소들이 자라는 벼를 넘보지 못하도록 논둑마다 긴 장대로 막아놓았다. 그런데도 우리 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장대사이로 입을 내밀고 긴 혀로 훅 하고 한입에 벼를 감아 훔친다. 놀라운 재주다. 하겠다고 끝까지 고집 부리 사람을 절대 말릴 수가 없듯이 우리 소도 그랬다. 욕 얻어먹을 생각을 하니 얄미워 죽겠다.


그렇지만 우리 소는 해마다 송아지를 한 마리씩 꼭 낳아 주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우리 소를 보물처럼 아끼셨다. 우리 소가 일 잘하고 송아지를 잘 낳아서 살림을 많이 일궈준다고 늘 입버릇처럼 칭찬하곤 하셨다.


그런데도 자꾸만 제멋대로 콩밭이든 논이든 원하는 만찬을 즐기고야 마는 우리 소로 인해 여러 번 동네 어른들께 잔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 번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뚝에 단단히 묶어놓고 매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혼내는 흉내를 내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그날부터 보름이상을 절뚝거리며 다닐 지경이 된 쪽은 오히려 나였다. 이리저리 피하던 소의 발굽에 그만 발등을 밟히고 말았던 것이다. 묵직하게 밟힌 곳은 퉁퉁 부어올랐고 통증이 갈수록 심해졌다. 다만 혼내는 시늉만 했을 뿐이었는데 지경이 되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우리 소한테 이렇게 늘 당하고만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이후로 소먹이는 아이들이 두 명씩 조를 짜서 하루 종일 소를 보러 갈때 여러번 같이 따라갔다. 도시락을 싸들고 산너머 멀리까지 다. 거기에 가면 억새풀부터 소들이 뜯을 풀들이 많았다. 찬물이 사시사철 솟아 나오는 '찬물샘'이라는 곳도 있었다. 그곳 근처에 큰 바위 위에 말 발자국이 선명한 장군바위가 있었고 마르지 않는 이끼로 언제나 물기를 머금고 있는 집채만 한 물바위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곳은 집에서 아니 마을에서도 무척 먼 곳이었다. 둘이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혼자였더라면 무서울 뻔했다. 깊은 산에서는 우는 새소리조차 낯설었다.


가끔씩 소 먹이러 가기가 싫을 때도 있었다. 한 번은 보릿짚더미를 파고 몰래 숨어서 잠들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동네 TV 있는 집을 찾아가 박스컵(그당시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축구경기를 시청하기도 했다. 이럴 때 가여운 우리 소는 풀 뜯기는 고사하고 내가 올 때까지 말뚝에 매인채 홀로 남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한 번도 아버지께 들키지 않을 때가 없었다. 나는 몰랐지만 아버지는 소의 배가 홀쭉해진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다. 아버지께서는 이 일을 아시고도 혼을 내지는 않으셨다. 좋으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굶은 소를 위하여 논두렁에서 베어 오신 신선한 꼴(가축을 먹이는 연한 풀)을 넉넉히 풀어 주셨다.


어느 해 봄 막바지가 다가 올 무렵이었다. 동네에서 제법 먼 곳에 있는 밭에서 보리타작을 끝냈다. 아버지는 타작마당에서 수확한 보리가마니를 새로 구입한 수레에 실으셨다. 그리고 우리 소가 수레를 끌도록 하셨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잘 가다가 언덕길을 르게 되었을 때 우리 소가 뒷걸음치며 너무 버거워했다. 오르던 언덕길 아래로 순간적으로 수레가 뒤로 밀렸다. 하마터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순간 아버지도 나도 수레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밀었다. 그제야 겨우 겨우 수레가 언덕길을 올라설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한 번으로 우리 소가 수레를 끄는 것을 그만 두셨다. 그리고 원래대로 지게로 대신하셨다. 무거운 보리가마니를 한 번에 나르려다가 아까운 소를 잡을 뻔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 쉬셨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와 20년 이상을 같이했던 우리 소가 어느 날 갑자기 아팠다. 병명을 알 수가 없었다. 소를 볼 줄 아는 사람을 여럿 불러봐도 답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얼마 후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가을걷이가 벌써 끝나고 12월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참으로 애증어린 친구이자 동반자를 잃은 탓에 공허한 느낌을 주체할 수 었다. 부모님도 내내 마음 아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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