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
'유하(柳下)의 싸움은 무서웠다.'
적이었던 후금(後金) 군들이 치를 떨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버드나무를 등지고 최후까지 적들과 싸웠다. 그의 등으로 이미 적의 창이 관통했다. 그래도 그의 화살은 멈추지 않았고 쏠 때마다 적의 숨통을 하나하나 끊어 놓았다. 화살이 떨어지자 그는 양손에 한 자루씩 칼을 들고 적을 베었다. 버드나무를 등지고 휘두르는 그의 위세에 눌려 적들은 두려워 함부로 나아오지 못했다.
겹겹이 에워싼 적들과 싸우다가 그의 하나 남은 칼마저 부러졌다. 적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마침내 그가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부러진 칼 자루를 결코 놓지 않았다.
그의 부인이 고향 철원에서 그의 비보를 마주했다.
처음부터 승산이 있었던 싸움은 아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다. 그 명나라가 이제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이틈을 노리고 건주 여진 누르하치가 동족 해서 여진을 제압하고 여진의 힘을 하나로 끌어 모았다. 드디어 말갈족이었다가 여진족이었던 이들이 만주족 후금으로 다시 일어선 것이었다.
발흥하는 이 후금을 치기 위하여 명이 조선에 군병을 요청했다. 우리와 관계없는 싸움에 나서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명에 진 빚이 있었기에 나 몰라라 하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연합군으로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소수의 병력을 보내 형식적으로 전쟁참여 명분만 챙기기로 했다. 군량과 의복 등 제대로 된 나라의 지원은 없었다. 이미 임란을 겪으며 가난하기 이를데 없게 된 나라였다. 조선군은 한겨울 북풍 추위에 떨며 명군에 속해 있었다. 명군의 것으로 나누어 먹으며 후선에서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싸워 주었다. 조선이란 나라는 스스로 들러리같은 이 국면을 헤쳐나갈 이길 힘이 없었다.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오직 입하나 밖에 없었다.
팔기군 육만의 편제를 과시하며 순식간에 발호한 후금 누르하치의 강한 군세를 명나라인들 이제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명군에 딸린 조선의 군병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후금 군에 의해 전면의 명군이 전멸하자 뒤따르던 조선의 조총병 또한 전멸을 면치 못했다. 몰려오는 적의 말발굽을 향해 그들이 일제히 총을 쏘았지만 쏘기도 전에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싯누런 황사가 휘몰아쳤다. 거기다가 한번 쏜 총은 화약을 다시 재기까지의 시간이 길었다. 그 틈을 노려 야수 같은 적들이 말을 타고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이에 모두 쓰러지고 살아남은 자가 아무도 없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창과 화살로 온몸이 벌집이 된 채 장렬하게 싸웠다. 조선은 무기력하기 이를데 없었다. 오랑캐라 멸시하던 적들이 용감히 싸운 그를 오히려 가상히 여겼다. 쓰러진 자 가운데 오직 그만을 수습하여 햇볕 좋은 곳에 묻어 주었다. 그는 김응하 장군이었다.
왜군이 쳐들어 와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줄곧 들려왔다. 그녀는 규방에 앉아 분냄새 풍기며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여겼다. 치마 저고리를 버리고 먼저 남장으로 옷을 바꾸었다. 얼굴은 그날부터 씻지도 않았다. 그리고 칼과 창 그리고 활을 쏘는 무예를 익혔다. 날이 밝으면 동네 뒷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해가 지도록 칼을 휘두르고 창을 던지며 활 쏘는 연습을 했다.
소문대로 왜군이 이곳을 물밀듯이 몰려왔다. 마을은 순식간에 불길로 휩싸였다. 모든 사람들은 짐을 꾸려 피난을 가거나 숨기에 바빴다. 적이 지나가고 난 후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전란 중에 겨우 살아남은 아비는 딸이 보이지 않자 찾아 나섰다. 마을 안 시신더미 속에서는 딸이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마을 뒷산으로 올랐다. 많은 시신들이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딸의 시신을 찾았다. 아비가 오열했다. '내 딸아~' 딸의 머리통 반이 적의 칼날에 날아갔다. 부릅뜬 두 눈을 아비가 손을 모아 감겨 주었다. 오른 손에는 칼이 쥐어진 채였다. 그녀의 남겨진 이름은 없다. 그 고을 향토지에 이 사실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녀는 임진왜란이 몰아 칠 당시 조선의 남쪽 어느 한 고을의 참한 규수였다.
국가적 책임 가운데서 벌어지는 위기 속에서 한 개인은 나약하기 이를 데 없다. 혼잣 힘으로는 피할 길이 없고 혼잣 몸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유일한 목숨을 지킬 수 없고 막무가내 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냥 순순히 내어 줄 수는 없다. 그래서 분전(奮戰)이다. 홀로 싸워야 하는 처절한 싸움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 선상(線上)에 놓여 있다. 결과는 결국 스스로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