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경품 당첨자들에 대한 소회
한 유튜브에서 어떤 목사님이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했다. 명쾌한 답변이었다. 답변이 끝나자 말자 곁에 있던 다른 동역 목사님이
"목사님처럼 그렇게 솔직하게 있는 대로 가감 없이 전부 다 말씀하시면 우리 유튜브 '싫어요' 누르는 사람이 생겨요"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대답이 시원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싫어요'는 나와요. 많죠. 바리새인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요."
사람들의 생각은 이같이 다를 수 있다. 생각이 다르면 나타나는 반응도 제각각이다.
어느 날 예수님이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한 마을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디선가 10명의 나병환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큰소리로 외쳤다. 병 고쳐주기를 원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보시고 이들의 병을 모두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그리고 떨어진 그곳에서 그들은 다들 기뻐하며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 중에 오직 한 명만이 그 몸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되돌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다.
예수님이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다.(누가복음 17장 11~19)
그날 다른 아홉은 병고침의 은혜를 입었지만 되돌아와서까지 예수님께 감사했던 그 한 사람은 병고침은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교회에서 가을 '사랑의 바자회' 행사가 있었다. 생각 끝에 일 년 내내 애써서 키운 사과를 경품으로 내놓기로 했다. 다섯 박스. 바자회 행사기간 동안에는 수확철이 아직 일렀다. 그래서 미리 예고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수확하여 당첨자 다섯 분에게 한꺼번에 보내드렸다.
감사하게도 그중 한 분이 잘 받았고 잘 먹겠다는 감사 문자를 보내주셨다.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른 분들도 잘 받았는지 어땠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땀과 수고의 결실인 사과가 그들에게는 한낱 공짜일 뿐이며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랐다.
좋은 소리를 듣겠다고 경품으로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교회 행사에 걸맞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잘 받았다'는 문자 한 줄이라도 기대하게 되는 이 심정은 또 무엇인가. 도전과 응전, 원인과 결과, 이심전심 이란 말과 같이 사과를 주고받는 서로 간에 '마음의 짝'이 맞춰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대방의 무반응에 대해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하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래도 왠지 한 조각 아쉬움은 남는다. 심지어 '내가 잘못한 걸까 괜한 일을 한 걸까 마음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고 만 걸까'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것은 가난한 자를 도울 때와는 다르다. 가난한 자를 도울 때는 생색내지 말고 몰래 해야 하는 법이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 3절 4절)하는 성경말씀대로이다.
선의로 누구에게 베풀거나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있다. 상대방과의 새로운 관계성의 시작이거나 끊어졌던 관계성의 회복이거나 더 나은 관계성의 증진을 바라는 것이다.
나와 똑같이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잘 받았다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반대로 내가 누구의 도움이나 베풂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감사하고 또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늘 바라는 바다. 그것이 서로 간에 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사라는 생각이다. 그것이 관계성을 이어주는 첫단추이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유치환 시인의 시 한 줄을 떠올려 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당연히 귀를 기울이는 법이다. 내가 보낸 사과 하나하나는 모두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물질의 축복이다. 응당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을 충성되이 관리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에 내놓는 것이다. 내 노력과 수고, 선한 마음과 행위를 하나님이 모두 아시고 하늘의 상급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유일한 상급은 오직 주님뿐이다. 주님이 주시는 이 땅에서의 기쁨과 평안이 크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태복음 5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