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사 22

사과 딸 무렵 유감인 것은

by 장현수

바쁘게 사과를 따다 말고 40분 거리 역으로 손님 마중을 나간다. 사과철 사과를 따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멀리서 스스로 오시는 분이다. 감사한 일이다.


역에서 맞은 후 점심식사 대접부터 한다. 그리고 이곳 먼 곳으로 오기는 처음인데 오자말자 일부터 시작하기는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곳 유명 관광지로 먼저 모신다. 케이블카를 탄다. 그리고 단풍구경이다. 절정인 가을의 모습이다.


이로써 바쁜 농번기 하루가 눈앞에서 순삭이다.


저녁이다. 손님이 왔으니 그동안 해보지 않았으나 저녁밥상을 직접 차리게 된다. 어쩔 수 없다. 혼자서 먹을 때와 다르다. 혼자서는 대충 챙겨 먹고 말지만 손님 있으니 그럴 수 없다. 종류별 반찬으로 구색을 맞추느라 애가 쓰인다. 지난주에 왔다간 아내가 미리 준비해 주고 간 반찬들이 있다. 그것으로 조금은 때울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시골은 해가지면 금방 어두워진다. 사방이 깜깜하다. 나갈 데가 없다. 평소에는 이 시간이 하루일을 마치고 혼자서 글 쓰고 책 읽고 딩굴딩굴 편하게 지내는 시간이다. 그런데 손님이 와있으니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오신 분을 최대한 배려해야 하기에.


다음날 새벽에 일찍 일어난다. 집에 오는 들고양이들 밥부터 챙겨준다. 그리고 주문받은 몇 안 되는 사과 택배 준비부터 해놓는다. 끝나고 들어와 이제는 아침상 준비를 한다. 혼자일 때는 입맛이 없기에 식사를 거르고 밭으로 바로 나간다. 사과를 따서 싣고 들어온 이후에야 아침 겸 점심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손님이 있으니 아침밥부터 먼저 챙긴다. 그게 도리라고 여기기에.

아침식사 후 사과 따기에 의욕부터 앞선 손님을 모시고 우선 밭으로 나간다. 눈으로 먼저 보여 드린다. 그리고 익은 사과를 골라 따보도록 한다. 아직 사과따기에는 일러 딸 수 있는 익은 사과가 드물다. 그리고 따기보다 집 창고까지 나르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점심과 저녁은 집에서 식사를 챙기기가 아무래도 버겁다. 차 타고 멀리 떨어진 식당을 찾아 나선다. 오며 가며 그러는 사이 아까운 한나절이 또 훌쩍 그렇게 지나간다.


다음 세쨋날 동이 터오고 날이 서서히 밝는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본다. 아직 어둑하다. 들고양이들이 몰려와 현관문 앞을 지키고 있다. 사료를 그릇마다 가득가득 부어준다.


들어와서는 또 밥상을 차린다. 참치 김치찌개를 끓여본다. 간이 조금 짠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의 손이 거의 가지를 않는다. 계란찜을 해볼걸 그랬나.


삼일째인 오늘은 아침부터 택배 보낼 준비로 바쁘다. 오늘 밤 KTX로 여기를 떠나 내일부터 서울에서의 일정이 잡혀 있어서다. 오늘 떠나기 전 모두 마쳐야 한다. 적은 양이 아니다. 10kg 15박스다. 택배준비를 하는 동안 손님은 밭에서 사과를 계속 따도록 맡긴다. 나중 운반은 내가 하기로 하고.


택배준비를 서두르지만 진도가 생각보다 더디다. 골라 담을 사과가 드물기 때문이다. 새가 쪼았거나 상처가 생겼거나 상품성 없는 사과가 훨씬 많다. 두려울 만큼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보통 택배사에서 오후 세 시경 받으러 오는데 8시경 시작한 택배준비가 아직 반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은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나고 있다. 곧 12시 점심 식사 시간이다. '가난한 집일수록 끼니때가 빨리 온다'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중소기업하는 지인이 '직원급여 줄 날이 왜 그리도 빨리 오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전화가 온다. 부산 처남이다. 그들 부부와 처제부부가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택배 준비로 온통 바쁜 마음에 다음 주에 오도록 해본다. 그러나 이미 출발했다고 한다. 하이고야.


그들까지 온다니 마음이 더더욱 조급해진다. 와 있는 손님에 더해 네 명이 새로 더 추가된다.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보니 덤벙대고 헛손질을 하기도 한다. 서두르다 반쯤 잘못 내린 셔터문에 쾅하고 이마를 찧기도 한다. 깨질듯이 무척 아프다. 상처에 피가 맺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셔터를 원망할 수없다. 바보 같은 짓이기 때문이다.


손님이 온다니 그냥 있을 수 없다.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들이 왔을 때 일한다고 앉은 채 태연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장갑을 벗어 일을 잠시 멈추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대접을 위해 음료, 커피, 간식 등 간단한 먹거리와 컵, 접시를 미리 준비해 놓는다. 점심식사는 어떻게 하나. 알아서 준비해 오시려나. 이제 곧 점심식사 시간인데.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처남네들이 탄 차들이 무심하게도 줄지어 속속 들이닥치기 시작한다. 처제부부가 두루마리 화장지 세트를 내민다. 설마 불쌍한 이 중(中) 늙은이로 하여금 이들의 점심식사를 차리도록 하지는 않겠지. 그 외 혹시라도 점심식사로 할만한 그 어떤 것이 있지 않나 슬쩍 훑어 보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근처 식당도 없는 남자 혼자 사는 시골집을 점심시간에 네명씩이나 오면서 빈손으로 그냥 오기란 좀처럼 보기드문 일이라고 여긴다. 이건 반칙이 아닌가.


모두 일단 거실로 모신다. 그들이 커피 음료 등 마시면서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만이라도 택배준비를 더 해 볼 욕심에서다.

그런데 그들이 거실에서 바로 나온다. 처남댁은 "저희는 커피 다 안 먹어요"라고 하며 당당하다. 잔뜩 기대에 찬 소녀 같은 표정이다. 좀 드시면서 집안 구경도 하고 잠깐이라도 그들끼리 시간을 보내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으니 이 순간만큼은 조금 야속하다.


내가 얼마나 숨 막히게 바쁜지 그들은 모른다. 오히려 나에게 사과밭으로 같이 한번 나가 보자고 재촉한다. 그들이 우리 밭 위치를 모르니 기어이 그들과 함께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으로는 택배준비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 있다. 일분일초가 아쉬울 따름이다.


급히 서두르며 앞서가는 내 발걸음엔 아랑곳하지 않고 저만치 유유자적 뒤따라 오던 처남댁이 걸음을 멈춘다. 길가 서있는 오롱조롱 빨간 열매가 달린 사과꽃 수정용 숫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뭔가고 묻는다. 이어서 두 번 세 번 여러 번 계속해서 묻는 말에도 일일이 답하고 설명해 준다. 그러면서 소변 마려운 아이처럼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속으로 동동걸음을 친다.


밭을 둘러보고 돌아와서 결국 점심식사 준비는 누가 하게 되느냐. 빼도 박도 못하고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나. 독거노인(?)이 다섯 사람의 점심식사를 직접 차려야 하게 되다니. 살아 생전에 처음 있는 놀라운 일이다.

이에 대해 처남댁은 "라면 같은 것 먹으면 되는데"라고 겸손(?)해 하신다. 그렇다고 '올 때 사 오시던지요'라고 할 수는 없다. 처남댁의 소녀 같은 심성을 존경해 마지않는 바이다.


마침 어제 사온 삼겹살을 굽고 냉동밥을 데워 나눈다. 여섯 명 식사 후 나온 많은 그릇과 기름 묻은 접시 프라이팬 등 설거지는 손님으로 온 손 위 처제가 혼자서 다 해준다. 이에 비해 처남댁은 참으로 영혼이 맑은 분이다.


이래저래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택배준비를 다 하기는 이제 틀렸다는 생각이다. 부산에서 오신 네 분 손님들을 먼저 보낸다. 공짜는 아니지만 넉넉하게 사과를 챙겨 드린다.


어쨌든...


계획했던 택배물량은 우여곡절 끝에 예정대로 빠짐없이 모두 보낼 수 있게 된다. 별도로 보내야 하는 두 박스까지 합해 총 17박스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택배사가 다른 날에 비해 유독 늦게 온 탓이다. 조급해하던 모든 순간들이 다 지나고 나니 매우 홀가분한 심정이다. 새로운 생기가 돌 정도다.


사과 딸 때 이곳의 많은 농가들은 사람을 사서 한다. 일당 10만 원. 동남아에서 유학 온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생활비는 물론 학비도 벌 겸 사과 농번기에 찾아와 많이 일하고 있다. 주선자에게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일해 줄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당일치기이고 도시락까지 싸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나를 돕겠다고 찾아와 준 분들의 마음씀씀이에 크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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