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농부의 봄맞이 농사 준비가 한창이다. 사과나무의 가지치기(전정)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며칠을 하고 있건만 아직 끝이 감감하다. 여전히 쌀쌀한 날씨가 계속 신경이 쓰인다. 해가 갈수록 점점 한기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수확기 첫해를 맞은 작년에는 힘들어도 참을 만했다. 늙어가는 탓이겠다.
농부의 '일 바구니'에는 전지가위와 톱이 하나씩 들어있다. 그리고 새로 장만한 마샬 스피커도. 비스켓 등 약간의 간식거리도 들어있다. 거기다가 밭 근처 창고에서 살고 있는 고양이 '주니어'한테 줄 간식 캔도 빠뜨릴 수 없다.
머리와 귀를 덮는 군밤장수 모자를 하고 나가는데 이웃 아저씨가 보인다. 인사를 했더니 받기는 받는데 이어지는 말이 없다. 이상한가 내 모습이.
나무가 많이 죽고 상한 가지가 많다. 내 황혼녘 나이를 고려하여 새로 더이상 심지않고 있는 대로만 가꾸기로 한다. 이들과 생을 같이 할 비장한 각오(?)를 속으로 되새기면서.
밭 가운데서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마샬 스피커가 우렁찬 목소리를 낸다. 졸든지 잠들었든지 사과나무들이 여기 저기서 벌떡벌떡 깨어날 것 같다. 그리고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리고 주인이 왔나보다 하겠다. 그들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주었으면 좋겠다. 방긋방긋 웃고 손을 흔들면서 반겨 주었으면 좋겠다. 과한가.
그저께 하루종일 산에는 눈이, 동네에는 진눈깨비가 내려서인지 아직 쌓여있는 눈을 훑고 내려 온 산바람이 녹녹치 않다.
나무마다 까치머리 스타일로 하늘로 쭈삣쭈삣 치솟은 가지(도장지)들을 이고 있다. 과일로 갈 양분을 뺏아가는 '도둑'가지이기에 이들은 이번에 모두 잘라내야 한다.
올라선 사다리가 중심을 잃고 한순간 삐끗한다. 순식간에 몸이 거의 15도 이상 휘청하고 기울었다가 겨우 바로선다. 떨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독거노인' 큰일이다. 겨우 쌓아 온 공든 탑이 무너진다. 그러면 힘들지. 사다리는 언제나 조심이다. 침대만 과학인 것이 아니다.
사다리에서 내려와 조금 쉬기로 한다. 열어 본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와있다. 청년회에서 정월대보름 맞이 달꼬집(달집) 태우기 행사를 한다고 많이 참석해 달란다. 좋은 정보 감사하다. 캐논 카메라 두 세개 렌즈 장착해서 어릴적 이후로 아주 오랫만에 다시보는 달집 태우는 광경을 예쁘게 담아 볼일이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다. 무리하지 말아야지. 일 바구니를 챙겨 나오는데 갑자기 고양이 두마리가 눈앞에 나타난다. 행방불명이었던 구월이가 돌아왔나 싶어 기뻤는데 아니다. 착각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더니. 구월이가 낳은 새끼 고양이 '주니어'와 이를 만나려고 온 다른 고양이다.
주니어가 나를 보고 쪼르르 다가와 다짜고짜 드러 눕는다. 발라당. 그리고 스스로 나 보란듯이 좌로굴러 우로굴러 하면서 앞길을 막는다. 그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쓰다듬고 만져준다. '잘 있었어 주니어~ 어제보고 오늘 오랜만(?)이네~ ' 누운채 네 발을 저으며 쓰다듬는 내 팔을 잡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기도 한다. 정이 고파서인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하루아침에 엄마와 낳은 새끼 세마리를 잃은 주니어다. 이렇게 드러누워 농성(?)을 벌이니 앞으로 전진이 불가하다. 할 수없이 안아서 밭가로 나와 캔 간식을 따준다.
운반차로 지나가던 동네 동생이 시동을 끄고 내게로 온다. 일전에 우리집으로 두번씩이나 화목을 날라다 주었던 고마운 동생이다. 동생도 전지작업 하다가 돌아오는 중인 듯 .
내가 가지치기 하고 있는 줄 알고 동생이 가지치기 요령에 대한 노하우를 직접 시범을 보여가며 많이 알려 준다. '3대7', '배따등따'로 요약된다. 주(主)간(주가지)보다 굵기가 곁가지는 3을 넘어서는 안되며 주가지 위(등)와 아래(배)로 뻗은 가지는 반드시 잘라(따) 주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무엇보다 꽃눈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
놀라운 것은 동생은 내가 볼 수 없는 사과의 꽃가지를 이미 형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어떻게 피고 어떻게 열매가 맺히는 지도 한눈에 그리고 있다. 나무의 속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준다. 작년 개화무렵 폭설을 맞았던 것을 나무들이 다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란 것이다. 올해도 그런 사태가 올지 모르니 대비하고 경계하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다. 기후조짐을 미리 알고 꽃 피우는 시기를 조절할 거라고 한다. 사과나무도 이런데 사람도 지나간 실수를 번복할 순 없지 않은가. 역사도 마찬가지다.
우리 밭 사과 나무 특히 오래된 나무들은 해마다의 생장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그만치 수십년 동안이나 온갖 병충해를 이기고 모진 비 바람 그리고 추위를 견뎌 온 그들이다. 악조건하에서도 맛있는 얼음골 사과를 만들어 낼 줄아는 베테랑들이다.
'일 바구니'를 내려놓고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들의 숨소리를 듣고 싶다. 나무아래 조용히 등을 기대고 앉아서 그들끼리 속삭이는 말을 바람으로라도 듣고 싶다. 그들은 서로 말하지 않겠나. 올해도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풍성한 가을수확을 바라는 마음으로 올 농사의 시작점에 서 있음이다. 어떻게 산처럼 남은 일들을 헤쳐나갈까.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베테랑 그들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