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나
오랫만에 읍내에 나왔다. 방금 전 겪은 기억은 끔찍했다. 발바닥에 불을 놓아 심하게 곪은 종기를 빼냈다.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 의원이셨다. 이로써 소년은 두번씩이나 자지러질 듯한 고통을 겪었다.
산에서였다. 소먹이고 놀면서 풀숲을 건너뛰다 일어난 일이었다. 폴짝 뛰었는데 돌아온 건 비명과 자지러짐 이었다. 가려있던 뾰족한 그루터기가 고무신을 뚫고 왼쪽 발바다 가운데로 깊숙히 파고 들었다. 피나는 상처를 살피며 치를 떨었다. 스스로 차마 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약을 바르며 지독한 고통을 며칠이고 이어갔다. 초등학교 오학년... 학교에도 나가지 못했다. 점점 퉁퉁붓고 고통스러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아버지는 소년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한시간 반 거리 읍내 의원으로 갔다. 버스에는 엔진 기름타는 냄새가 났다. 아이들이 딱 좋아하는~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자꾸만 뒤로 스쳐 지나갔다. 나무들도 집들도 사람도 다. 아픔 중에도 신기한 일이었다. 왜 그럴까 궁금해하느라 잠시 아픔을 잊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 버스 터미널 뒤로 흐르는 남천강물에는 어른 팔꿈치보다 더 큰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한 두마리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일 정도였다. 은빛 은어가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강변을 따라 줄지어 팔고 있는 무럭무럭 김나는 찐빵이 맨처음 눈에 들어왔지만 아버지는 경황이 없었다. 나중에 병석에 계신 어머니를 돌보면서 아팠던 그때, 그 옛날의 그 이야기를 추억삼아 꺼냈을 때 '아한테 우째 찐빵하나 사줄 돈도 없었능가 몰라' 하고 안타까워 하셨다. 소년이 아버지와 한 첫 외출이었다.
용한 점쟁이가 한 말이었다. '이 아이는 10살되기 전까지 외가에는 가면 안된다' 갔다가는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였다. '무슨 일'은 어감상 매우 좋지않은 의미의 '일'이다. 그래서 그때가 지나도록 외가를 가지 못했다.
6학년 졸업을 앞두고 설 지난 직후에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큰 산너머에 있는 외가에 갔다. 외가의 여러 집안을 아버지와 돌며 설인사를 드리고 다녔는데 낯설고 음식이 맞지않아 불편을 넘어 고통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일을 치르고 말았다. 불편하고 어색했던 외가에서 하루 이틀을 보내고 마지막 날 감밭마을 아버지 이모님 댁에도 들렀다. 참 따뜻하고 좋으신 분들이셨다. 그런데도 낯선 곳 처음 뵌 분들이라 체면치레를 하느라 무척 긴장이 되었다. 잠자기 전에 화장실에 갔었어야 했는데 부끄러워 묻지를 못했다. 참았다.
겨울 밤은 길었다. 어느 한 곳에 서서 일을 봤는데 왠일인지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점점 이불 속으로 축축한 느낌이 전해졌다. 손내밀어 만져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몰래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리고 집주변을 서성거렸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공기에 젖은 옷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한 겨울에 이불빨래 하느라 고생하셨을 그 이모할머니~ 아무도 아이를 탓하지는 않으셨다. 그렇지만 속으로 죄송한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시는 외가에 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아버지와 한 두 번째 외출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이후론 소년이 아버지와 둘이서 외출했던 기억이 더 이상 없었다. 어머니와 같이 가족이 함께 한 적은 있었어도.
거의 50여년이 지난 후 이번엔 내가 아버지와 둘이서 집을 나서 보기로 했다. 작은 방 벽에 아버지의 헌팅캡 모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아끼시다 미처 써보지도 못하셨다. 그 모자를 이번엔 내가 썼다.
시골집을 나서면서 이번엔 엄마께만 '엄마 서울 잘 다녀 올께요 집 잘보고 계세요~'하며 인사를 드렸다.
집을 나와 조합에 가서 먼저 일을 보았다. 읍내 나와서 자동차 정기점검도 같이 받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남아 근처 스벅에도 들렀다. 나는 아버지의 모자를 벗으며 '아버지는 뭐를 드시겠어요 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실께요' 아버지께서는 아무말이 없었지만 아버지와 오랫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아버지의 모자를 쓰고 역으로 나왔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한번도 벗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아버지 눈 좀 붙일께요 아버지도 오랜만에 먼 길 피곤하시죠~ 아버지도 쉬세요~' 동대구역을 지날 무렵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걱정하셨다. '니 농사짓는거 힘안드나 대제?' '안하다가 하머 대다 아이가'
내가 말했다. '아버지 엄마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입니더'
아버지께서는 또 '일하다가 대면 혼자 하지말고 사람불러쓰라 일 마이하머 골빙든데이 니도 인자 나이도 있는데 '하고 말씀 하셨다. '예 아버지'
'그라고 니가 우리집에서는 맏이인데 동상들하고 우야든동 우애있게 지내래이~'
아버지와 함께 드디어 집도착~ 아버지 이 모자가 서울 올라오기는 처음이다. 안방 한 곳에 잘 두었다가 다음주 화요일 내려갈 때 다시 쓰고 내려 갈 것이다.
오늘 주일 아버지와 교회갔다. 옆자리에 모시고 같이 예배도 드렸다. 아버지는 물으셨다.
'큰 아 니 교회 장로라캤나? 그라머 사람들한테 잘해야 댈낀데~'
'예 아버지 애쓰고 있습니다'
맛있는 교회 밥을 같이 먹었다. 아 반갑게도 오늘은 시골에서 엄마께서 맛있게 무쳐주시던 시금치 나물이 나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겨울 시금치의 보라색 뿌리가 입맛을 한결 돋구게 했다. '아버지 많이드세요'
오랫만에 아버지와의 여정~ 내일은 월요일. 삼일절 대체 공휴일이다. 어디로 나가 볼까. 아버지와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쓰고있는 '엄마평전' 엄마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아버지께서는 항상
'너거 엄마한테 잘하거래이'
하고 말씀하셨다. '예 아버지'
아버지도 엄마께 미안한 마음이 남아 계셔서일까. '그런데 아버지~ 엄마도 똑 같이 말했어예. 너거 아부지한테 잘해라. 그래야 복받는다' 라고요'
아버지께서 이미 했던 말 엄마처럼 또 말씀 하신다. '우째끼나 형제들하고 우애있게 지내래이 그기 최고다' '넘한테도 잘하고 그래야 너거가 복받는 기대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오랫만의 시간이 내게 즐겁다. 그리고 감사하다. 내게 엄마와 아버지 두분이 계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