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의 음성을 추억하며
부지런해야 산데이 깨알받으머 천지에 몬씬데이(부지런해야 산다 게으르면 천지에 쓸데가 없다)
아버지는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쉬는 날이 없으셨다. 들 일이면 들 일, 집안 일이면 집안 일을 하시며 밖에서만 사셨다. 비가 와도 일하셨고 날이 덥거나 추워도 가만히 앉아 쉬는 법이 없으셨다. 낮에 방안에 한가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본 적도 없거니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평생 일하시며 바쁘게 사셨다. 엄마도 마찬가지시다. 두 분 가운데 1등 2등 순위를 매긴다면 두 분 다 공동 1위를 드릴 수밖에 없다.
두 분은 새벽에 언제 일어나시는지 몰랐다. 내가 일어나보면 벌써 밖에서 일하고 계셨다.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있을 때 새벽마다 아버지께서 깨우셨다. 소몰고 나가서 먹이고 식전(食前)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밍기적 거리기라도 하고 있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쌔기 안일나고 뭐하노'(빨리 일어나지 않고 뭐해?)
동네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작은 골짜기가 있었다. 그곳을 개간해서 논을 만든 동네 어른이 계셨다. 그분은 참으로 부지런하다고 동네에서 소문 난 분이셨다. 그런데 그분이 이룬 많은 전답을 그 아들이 지키지 못했다. 물려받은 넉넉한 살림을 그 아들은 믿었다. 일보다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쉬운 일만 찾았다. 하나 라도 오래가는 일이 없었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부지런히 공부해래이 글공부가 재산이데이 제 아무리 돈 싸들고 친구 만들라캐도 공부한 사람한테는 못당한데이'하고 강조하셨다. 우리 마을에서 어느 누가 공부를 많이 해 출세한 사람이 있었던가. 아무도 없을 때였다. 공부에는 모두가 관심조차 없었다. '돈 있으면 땅 사야지 공부는 무슨 공부'할 때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시골 촌구석에서는 답도 없는 공부를 왜 중요하다고 여기셨을까. 학교에서 배운 것을 모르거나 공부 하지않고 게으름피우는 내게 아버지는 가는 싸리나무를 꺾어만든 회초리를 대셨다. 종아리에 줄이서고 피멍이 들었다. 부엌에서 엄마가 놀라며 뛰쳐 나오셨다. '그라다가 아 잡겠심더 공부는 또 하머 되지예(그러다가 아이 잡겠어요 공부는 또 하면 되죠)'하고 아버지를 말리셨다. 아버지는 '공부는 때가 있는기라'하고 들고있던 회초리를 슬그머니 한 곳에다 내려 놓으셨다.
다녔던 중학교의 아치형 교문에 '부지런한 자 아니면 발을 멈추어라'하는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 시골에서는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낮에 일하고 나면 어린 아이가 밤에 책펴놓고 이해도 되지않는 내용을 혼자 공부하기란 언제나 벅찼다. 그래서 메모장에다 메모해서 일하면서 틈틈이 외우기를 반복했다.
'새벽형' 혹은 '아침형' 인간을 말할 때가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새벽형'은 물론 '밤 늦게까지 형'이셨다. 밭에서 논에서 항상 어둡도록 일하고 오셨다. 아버지 어머니는 서로 사랑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은 두 분이 꼭 닮으셨다. 뒷 집에 아지매가 '너거 아버지 너거 엄마는 늘 새벽부터 늦까까지(늦게까지) 일하데(일하더라)'하고 증언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몰고 짐칸엔 그을린 얼굴로 앉아 계신 엄마, 경운기를 타고 두 분이 나란히 논으로 일하러 나가시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고 눈에도 선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긴장도 하고 조바심을 낼 때도 있었다. 가을 타작거리를 마당에 수북히 쌓아 놓은 날엔 일찍 잠자기란 언감생심이었다. 타작이 끝나야 잠을 잘 수 있는 것이었다. 밤에 늦게까지 일할 때 엄마는 밤참을 내오셨다. 그것이 찐 고구마든 추석 명절때 쓰다남은 생두부든 도토리 묵이든 밤중 허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내일 학교 갈 걱정이 먼저 들었다. 숙제가 아직도 밀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저녁무렵 고랭지 배추를 또 한가득 마당에 쌓아 놓으셨다. 장에 내다 팔 수 있도록 엄마 하는 대로 따라 단을 묶어야 하는 것이었다. 끝내려면 밤 늦도록 또 한참 멀었기에 속도전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깨어보면 엄마는 벌써 읍내 새벽장에 다녀 오셨다. 잠은 주무셨을까 궁금하기만 했다. 표정이 밝으신 엄마는 '오늘은 어제보다 금이 좋았다'거나 '우리 배추가 좋다고 소문나서 상회에서 우리배추를 먼저 사갔다'는 등 그리고 같이 간 '누구누구 집은 아직 덜 팔려서 읍내장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시며 기분좋아 하셨다.
시골에서 대도시로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초대받아 어느 집에 갔을 때였다. 아침이 되어 식구들 모두 아침밥상 앞에 앉았는데 아들 중 누군가 아직도 자고 있다고 했다. 그 상황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나중에 먹겠다며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함께 있던 내가 오히려 어른들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촌에서 왔으니까 도시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가보다 받아들였다. 촌에서 우리집은 늦잠이란 있을 수 없었다. 부모님이 깨우시거나 부모님이 밖에서 떨거럭 떨거럭 일하시는 소리를 들으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갰다. 그리고 세수부터하고 방청소와 마루청소를 했다. 비짜루로 쓸고 걸레를 빨아 와서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고 엄마가 밥상을 차려 오시면 숟가락 젓가락을 식구 수만큼 제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는 곳에 가서 '아버지 엄마가 밥 잡수러 오시랍니다'하고 전하고 모시고 왔다. 아버지께서 밥상 앞에 앉으셔야 비로소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 같이 밥상을 마주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겼다. 어른이 계시는데 그것도 남도 아닌 부모님 앞에서 천하 게으런 모습이 늦잠자는 것이었다.
낚시하러 다니는 것도 게으른 사람이나 하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한 남자가 농사철에 일하다 말고 틈만나면 낚시하러 다녔다. 틈을 내기위해 얼마나 급했는지 그가 모는 경운기의 속도는 남들에 비해 날아다닐 정도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함부레 그사람 닮지마래이 그라다가 집구석 망한데이'(절대 그 사람 닮지마라 그러다가 집구석 망한다). 결국 그 집은 망했다. 낭비 하느라 전답 다 팔았고 빈털털이가 되어 사십 나이가 되어 이혼까지 당한채 떠돌다가 얼마있지 않아 병인지 사고인지 모르지만 객사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시골 촌 구석에서 낚시는 게으름의 표상이었다.
늦잠을 자지 않는 것은 결코 아버지 어머니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가정에서 이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부모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 날 대부분의 가정에서 부모따로 자녀들 각자 따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에 늘 조마조마한 기분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대세인가 싶기도 하다. 각자가 개인으로 존중되어야 하는 시대, 비록 가정에서 한 가족이라 하더라도 그래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에 서글픔을 느낀다.
부지런하라고 늘 일깨워 주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 때가 점점 더 그립다. 이제 그런 삶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박제 된 추억으로만 남아있게 될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른'이고 잘 되라고 늘 가르쳐 주셨는데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 주었던가. 나의 책임이 결코 작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