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 무사(Μουσαι/Muse)/ 왼쪽부터 칼리오페, 탈리아, 텔프시코레, 에우테르페, 폴리힘니아, 클레이오, 에라토, 우라니아, 멜포메네
돈 없고, 빽 없고, 나이 많다고 좌절한다고 해서 내 남은 인생이 해결되지 않는다. 좌절이란 도피처가 아니라, 패배자의 멍에만 덧씌울 뿐이다. 거대한 자석에 속절없이 끌려가더라도,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도 남은 내 생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필자 주변에 70세가 되어서 100세 가까운 노모를 홀로 모시다 얼마 전에 이별한 꾹담 서웅교 선생이란 분이 있다. 여전히 어머니와 둘이서 화투 치며 토닥토닥 다툼하던 때를 그리워하며 눈앞이 흐려진다는 그다. 장난치듯 투정도 부리고, 삐치기도 하면서 어머니를 어머니답게 기억의 끈을 놓치지 않게끔 애를 쓴 그때가 이젠 추억이 되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입이 무거워 꾹담이란 별호를 얻을 만큼 행동이나 말이 진중하다는 의미다. 인공 관절을 넣고 난 후 컨디션 조절이 불가능한 날이면 인공지능이 착각한 것처럼 무릎이 제 혼자 덜거덕대니 건강도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다. 물 많이 마시란 정보를 믿고 실행에 옮겼다가 소화불량에 걸린 적도 있어, 음식조절을 필수인 선생이지만, 위 건강을 위해 노력과 미소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가 가까이 다가가기에 무척 어렵게 느끼는 분이다. 그러나 진솔하고 예의의 말에 저절로 우러난 존경하는 마음도 크다. 이유가 또 있다. 건강을 비롯해 절대 평범하지 않은 삶의 환경이지만, 단 한 순간도 행복을 추구하려는 애정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긍정의 기제가 더 할 수 없이 지혜로 작동되었던 까닭이다. 마치 노년의 교범 같은 삶을 즐기며, 주변의 주어진 환경을 행운으로 만드는 마법을 쉬이 부리는 중이다.
그는 책을 몇 권이나 발간한 소설가다. 모 공모전에서 대상을 비롯해 입상 경력만큼 문장을 다루고, 문학적 장치를 묘하게 깔아 혀를 두르게 한다. 그의 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타고난 재능이 남다르다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선천적 부지런함이 그를 그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수필은 당연하고, 시(詩)의 영역도 쉬이 넘나들어 필자를 부러움에 떨게 한다.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깊이 있는 사색을 즐기고, 주변의 것들을 예사로이 넘기지 않으며, 생활 철학에 인생관을 대입해 철저하게 나를 다독이는, 도덕성 충만한 인성을 지니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을 사랑하고, 삶에 리듬을 살려서 하루를 스스로 행복의 시공으로 결론 맺는 데 있다. 앞선 내용처럼 필자와 ‘삑사리’ 멤버로 한 달에 두세 번은 몇 시간씩 보내니 스스로 즐겁다. 꽹과리는 물론, 북과 장구까지 두루 섭렵한 그다. 그리고 전자 색소폰 에어로폰과 리코더, 기타는 나 홀로 독학으로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악보만 들이대면 어떤 리듬이든지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 다른 것은 차지하고서라도 필자가 이것만큼은 부러워 미칠 지경이다. 내심 질투에 서린 불만을 터트리지만, 이제는 허공의 메아리라 생각하며 포기하였다. 천재를 대적하는 방법은 그냥 앞서가게 두면 된다며 자위한다.
그리고 우리 민화에도 일가견이 있다. 언제 배운 솜씨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척척 따라 그려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렇게 보면 하늘이나 신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출력을 위해서는 입력이 필수인 것처럼 목표가 정해지면 도달하기 전에는 포기를 모르는 의지를 지녔다. 나는 그것을 일러 지혜에 덧댄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한다. 무턱대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요령 있게 지혜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꽹과리는 스승이 치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집에서 따라 할 때까지 연습한다. 물론 주변이 시끄럽지 않게 수건으로 앞을 덧대어 손목이 아프다고, 제발 봐달라고 아우성칠 때쯤 손에서 놓는다. 아마도 이쯤 되면 잠자리에 들어서도 꿈도 꾸지 않을까 상상할 뿐이다.
이제는 한술 더 떠서 70대 노년의 삶을 멋대로 즐기자는 듯 춤에 흠뻑 젖어 빠른 템포로 하루를 쪼개며 생활하는 중이다. 처음 춤을 배운다는 말을 듣고 도무지 상상되질 않았다. 큰 키에 무덤덤한 표정을 그려보았지만, 형상화에 실패하면서 결국 웃음으로 날렸다. 그러나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의 의지와 노력이 그냥 두지 않았던 것이다. 하모니카 한 가지도 헉헉대며 발버둥 치는 필자와 비교했을 때 진정 들숨날숨이 가빠지는 경험을 한다. 그의 비밀은 성실과 노력이 유일한 신앙이란 사실이다. 무엇이든 어떤 노력의 대가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최근에 그가 즐기는 춤도 마찬가지다. 지르박, 탱고, 블루스도 같다. 학원 선생이 보여주는 동작을 영상에 담아 연습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바닥에 발 모양을 그려 놓은 뒤 순서에 맞게, 그리고 몸동작을 익히며 허리의 유연성을 익히는 법도 놓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하루가 짧기만 하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진정 인생 2막을 즐기는 대표적인 노년의 거울 같은 삶이다. 이제 현장실습(?)에 나서 낯선 여인의 손을 잡고 삶에 리듬을 불어넣듯 자신감에 찬 춤사위도 평범함을 넘어섰다.
인성도 농익어 숙성된 맛을 지녔다. 그가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분이 한 분이 있다. 그가 속한 풍물단 단장인데, 80대 중반을 바라보는 그를 친형처럼 챙긴다. 그가 쓴 자서전 원고를 다듬는 일도, 목욕도, 병원에 동행하는 일도, 생면부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꾹담 선생 몫이다. 아마 친형제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그분 역시 꾹담 선생이 편하다며 호출이 잦은 듯하다. 그렇다고 한 번도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나를 필요로 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 같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다. 스스로 예의 바른 생활이 몸에 익어 즐겁다. 친자식 친형제 만큼 가까이서 건강을 걱정하고, 음식을 염려하면서 황혼의 삶에 진정한 환희로 보답하는 듯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듯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행위다.
‘나이가 들어서, 몸이 아파서, 가슴에 상처가 많아서, 경제력이 부족해서, 만사 귀찮아서’ 이따위 말은 인생에서 사치다. 이 모두 과거를 부정하는 단어이다. 비록 피해나 상처, 혹은 폭력이 동반된 과거라 하더라도 반전의 시간은 충분할지도 모른다. 내 삶의 종심(從心)은 낡아서 빛바랜 것이 아니다. 포기하는 순간 생명을 반사하는 에너지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밝게 염색해 내 속에 생명체가 살아 꿈틀댄다고 증명하려면 지금 당장 무엇이든 시작하라고 한다. 글쓰기, 자전거 타기, 노래 부르기, 난타, 풍물단, 하다못해 봉사를 받아야 할 입장이라 할지라도 봉사단에 기웃거려 보라. 단언컨대 나도 모르게 삶의 가치가 저 위에 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재능뿐만이 아니다. 품격도 드높아 추상적 가치, 즉 본적도 만져본 일도 없는 사랑과 행복을 위한 열망이 식는 법이 없다.
인간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순간 삶의 가치가 높아진다. 따라서 생각에 따라 처한 상황에 맞춰 인생의 목표를 뚜렷이 한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면 유전자 GENE이 그 방향으로 변화된다고 한다. 자동유도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목표가 실현될 때까지 늙지도, 병이 들지도, 죽지도 않는다니 목표가 곧 삶의 가치라는 뜻이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칠십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즉 나이 70에 삶을 즐기는 모습은 어쩜 도심의 신선 같은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나도 그 나이가 되면 가능할까. 목표가 있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늙지 않는다는데 정말 그럴까. 내 미래가 그분으로 인해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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