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한설의 혹독한 추위에 쓰라린 서글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달픈 심신을 맡겨야 하는 유배객에겐 분명 견디기 힘든 계절이 틀림없다. 1618년(광해군10) 1월 11일 철령고개를 넘고, 이곳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온 날이 2월 초순이니 북녘의 추위는 꺾일 줄 몰랐다. 풍을 맞고 반신불수 몸을 이끌고 오게 된 사연도 그렇지만, 얼음으로 뼛속을 찌르는 칼날 같은 바람은 지난 하 세월을 사무치게 하였다. 인륜의 도를 세우고자 했던 직언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혹독했던 기나긴 겨울이었지만 자연의 순리는 꺾을 수는 없었다. 이곳 유배지에도 기적처럼 봄이 찾아왔다. 겨우내 움츠렸던 자연의 생명들은 기지개를 폈다. 그러나 노정객의 몸은 여전히 차디찬 겨울이었다. 풍의 몸으로 겨울을 보냈던 터라 생동의 기운은 그저 자연일 뿐이었다. 때문인가? 봄날의 나른함에 더불어 식욕은 떨어지고 기력이 쇠잔해짐이 최근 들어 부쩍 잦아진다는 생각에 한평생 시련과 맞서 싸웠던 노정객의 생명이 이제는 다해가는가 보다.
국토를 누비며 40년 조선왕조를 모셨던 영향인지 질곡의 과정을 겪은 지난 삶처럼 꾸불꾸불 꼬인 지팡이에 의지한 한쪽 걸음걸이도 기울어 절뚝였다. 한걸음 디딜 때마다 오른쪽에 힘이 쏠렸으며, 한발 한발 힘에 겨워 보였다. 얼굴 골골 주름 가득히 일그러진 얼굴은 지난날 고뇌와 회한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눈빛만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 그를 평소 존경하여 따르던 정충신(鄭忠信)①이 광목수건을 손에 쥐고 따르고 있었으며, 적소에서 만난 제자인 듯 젊은이가 돗자리와 넓은 소쿠리를 지게에 가로로 걸친 채 따르고 있었다.
정충신이 겨울 내내 움츠렸던 스승을 일깨워 봄 햇살을 받고,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불어넣어 드리고자 약간의 음식과 술을 준비하여 떠난 나들이다. 나란히 걸어가는 길에는 하늘하늘 꽃들이 만발해 있었으며,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이들의 등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노구를 이끌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가 조선 14대왕 선조를 가까이서 모셨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을 발로 누비며 전쟁을 지휘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다. 18세였던 광해군이 왕세자시절 조정을 둘로 나누어 분조(分朝)활동으로 전장을 누빌 때, 그를 보위하며 전란 극복에 열성참모로써 역할을 다했으며, 그의 예지만큼 조선왕조가 최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지혜로서 극복했던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왕비를 개성까지 호위하였으며, 왕자를 평양까지 모셨다.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하였으며, 한음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파병을 이끌어내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제수 받고 국방 면에서도 그의 기량은 어김없이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했던 인물이다.
이후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자 그는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영의정에까지 올랐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청백리 표상이 유배된 까닭이 무엇일까, 권력을 장악한 대북일파에 의해 광해군 이복동생 영창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 폐모론이 불거지자 풍을 맞아 힘겹게 지탱하던 몸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죽음으로 임금의 잘못됨을 질타했던 것이 북인들에게 정적이 되어 63세의 나이로 유배되었다.
꼭 해야 할 말을 침묵하지 못한 죄였다. 각계 정파를 떠나 폐모의 우를 범하는 임금에게 잘못됨을 지적하며 나중에 올 환란을 미리 걱정하였으나, 권력을 쥔 대북의 이이첨을 비롯한 일부 간사한 이들이 임금의 귀와 눈과 입을 가로막아 버티고 있어 올바른 판단이 흐려지게 된 것이다.
백사보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이항복(李恒福)은 한음(韓陰)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오성과 한음’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그랬던 만큼 역경과 고난을 해학으로 달랬으며, 지혜와 재치가 충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가려서 사겨야 한다는 사대부가의 불문율을 상관하지 않았다. 직업과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그랬던 만큼 비록 서인(西人)이었지만 정파를 초월했던 초당적 인물로, 가리지 않고 사람을 천거하여 요직에 등용케 하였으며, 탕평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정적도 많았지만, 따르는 인물들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싸움꾼 이귀(李貴)를 비롯해 최명길 등 그가 천거한 인물들이 후에 인조반정에 앞장서게 된다. 당파 간 사생결단이 원인이 되었겠지만, 정신적 지주로 모시고 있었던 이항복이 유배지에서의 죽음과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청백리라 부르는 것은 비록 정5품 이라하나 청요직인 삼사(三司)②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정랑 때였다. 늘 허허실실 사람 좋은 모습이라 쉬이 청탁이 먹히리라 생각했던 인사들이 막상 청탁을 하고보니 들어주기는커녕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공직생활 중 자유로운 사고와 강직함을 겸비한 그였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자세가 그를 탄핵과 정적들의 미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러 정파들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잠시 자리만 피하게 하거나 옥당으로 물러나 머물게 할 만큼 왕은 그를 아꼈다. 또한 동인(東人)이였던 유성룡이 휴전을 주장했다고 정인홍의 탄핵을 받자, 자신 또한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하여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으며, 광해군 대에 친형 임해군 살해음모를 반대하다가 대북 일파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토록 각종 탄핵에 공정하게 비판과 동조를 함으로써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항복은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긍정적 사고와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개인사를 보자면 한평생 시련과 맞서 싸워야 했다. 어린 시절 늦둥이 아들인지라 사랑을 받았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일찍 잃어야 했으며, 16세가 되어서 어머니 삼년상을 마친 그는 누님 집에 몸을 의탁해야 했다. 이후 매형의 주선으로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덕형과 함께 천거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그는 늘 해학으로 자신을 달랬으며, 어린 시절부터 남다름이 있었다. 충장공 권율 장군의 사위였던 이항복의 어린 시절 그의 지혜가 담뿍 담긴 유명한 주먹 설화를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면상 짧게 언급한다.
백사 이항복
이항복이 어렸을 때 권율 집과 담장 하나 사이로 나란히 하고 있었다. 마침 이항복 집 감나무 가지가 늘어져 옆집 담장으로 넘어가자 그 집안 하인들이 감을 따 먹곤 했다. 어린 이항복이 항의하자 그 집 하인들은 담장 넘어 자기네 집으로 넘어왔으니 당연히 자기들 것이라며 항변을 했던 모양이다. 화가 난 이항복은 어느 날 권율의 집으로 찾아가 당시 우의정이었던 권율의 부친 권철의 방문 창호에 주먹을 불끈 쥐고 찔러 넣었다.
“대감님, 지금 이 주먹이 누구의 것입니까?”
갑자기 방문 창호를 뚫고 어린 주먹이 들어오자 방안에서 글을 읽고 있던 권철 대감은 이미 짐작을 했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놈,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
“그렇다면 저기 마당에 담장 넘어 온 감나무의 감은 과연 누구의 것입니까?”
“그 또한 네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면 대감님 댁 하인들은 어찌하여 우리 집 감나무에서 뻗어나간 감을 마음대로 따먹는 것이옵니까?”
권철은 이항복의 기개와 재치에 너털웃음을 웃은 뒤, 전후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고 대감은 딴 감을 모두 돌려주라 이르니, 오성은 그 집 하인들이 딴 감을 모두 찾아오는 쾌거를 이루었다. 당시 돌아오는 이항복의 걸음은 얼마나 당당했을까?
원래부터 권철과 이항복의 부친 이몽량과는 관직생활을 함께하며 정치적 동지로서 우정을 쌓던 사이였다. 그런 인연으로 이몽량이 늦둥이 아들 이항복을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손녀사위로 삼아 두 집안의 인연을 소중하게 이어갔던 것이다.
각설하고, 세상은 분홍필터를 끼워 넣은 듯 복사꽃 천지의 세상아래 세 사람은 자리를 펴고 앉았다. 아래엔 겨우내 얼어있던 작은 개울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건너편 암반엔 세파에 시달린 굽은 소나무가 힘겹게 지탱을 하고 있다. 하늘엔 봄날의 향연을 위한 듯 작은 바람에도 꽃비가 흩날렸다. 세 명의 남자는 저마다 각양각색의 회상에 잠길 만 했다.
젊은 제자 명이 등짐에서 호반을 내려 스승님이 정좌한 좌석 앞에 반듯하게 하고, 준비해온 술과 나물반찬, 그리고 삶은 꿩고기를 소금과 함께 소담스럽게 차려놓았다. 정충신은 무릎을 꿇어 스승님의 잔에 넘치게 술을 따르자 그 위로 복사꽃잎이 떨어져 노정객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성한 오른손으로 잔을 잡아 힘겹게 입으로 가져가자 술잔에 맴돌던 꽃잎은 입술을 방해했다. 후후 불어 술을 마시니 마음 속 애가 끓는다.
사대부의 체면을 구겨가며, 한잔을 쪽쪽 빨아 넘긴 이항복의 얼굴엔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베여왔다. 그리고 저만치 떨어져 꿇어앉아있는 정충신과 젊은 제자를 바라보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만운(晩雲)③과 명④은 자리를 편하게 하시게, 이렇게 좋은 날 그대들이 불편하시면 나 또한 편치 않을 것인데, 어찌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것인가?”
하며 자리를 가까이 앉으라. 이르고 다리를 편하게 하라 이르니, 둘은 말씀을 따랐다. 그리고 젊은 제자 명이 스승의 잔에 다시금 술을 붓고, 정충신 잔에도 술을 채웠다. 이항복은 명에게도 술을 가득 부어 잔을 채워주었다. 때마침 멀리 산새소리 울림 되어 들려오니 시각적 청각적 효과에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한동안 경치를 즐기고, 사색에 잠겨있던 이항복이 입을 열었다.
“내 나이 이제 육십갑자를 겨우 넘겼는데 몸도 성치 않거니와, 마음 또한 피폐해져 정신마저 온전치 못한 지경이네, 둘에게 험한 꼴을 보이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직 정신이 밝으시고, 몸 또한 예전 같지 않으시나 운신하실 수 있는데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시면 어찌하십니까? 지난 세월 힘들고 억울한 사연이야 감히 잊으시라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까만, 유유자적 자연을 벗 삼아 세월을 나누어 즐기십시오. 그리하시면 몸 또한 마음을 따라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머지않아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갈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스승의 힘겨움 토로에 놀란 정충신이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알고 있었다. 몸이 예전과 같지 않으며, 이제 이 세상과 이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네. 내 조선의 대신이 되어 두 임금을 모셨으나 일찍 아버님을 여인 터라 선대왕(선조)을 어버이처럼 따랐더니, 주위에서 시기하기를 ‘아부한다.’ 하였으며, 파당이 나누어져 서로가 적으로 삼아 큰 뜻은 간데없고, 이합집산 무리지어 소인배와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이 안타까워 탕평을 주장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내 사욕을 채우지 않았거늘 ‘기회역자’, ‘회색역자’로 낙인 찍혀버린 멍든 가슴은 하늘이 알고 있을 것이네.”
이 말을 들은 정충신은 고개를 숙이며 답을 했다.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남인 한음(漢陰,이덕형) 선생님과는 당파를 초월하여 우정을 나누셨고, 또한 전란 때, 스승님 활약이 없었더라면 어찌 이 나라 조선이 성했을 것이며, 피폐해진 민심을 어찌 어루만져 평안케 하였겠습니까?”
하며 숙인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니, 청아한 하늘이 흐릿해져 왔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 처한 상황이 하도 분하여 두 눈에 눈물이 되어 흐르고, 그 위로 연분홍 꽃잎 두어 개 떨어지며 위로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