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명 연합군 평양성 탈환, 평양성 전투를 묘사한 그림(작자 미상)- 위키백과
먼데 산허리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겨있는 이항복을 향해 제자 명이 말을 이어갔다.
“혹여 ‘회퇴변척소’① 라고 알고계시지요? 상소를 올린 내암(來菴) 정인홍(鄭仁弘)②을 잡아들이라며,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일어나자 임금께서는 도리어 유생들을 구금하였습니다. 결국 동맹휴학이 일어났는데, 당시 선생님께서 임금님(광해군)을 설득하여 무마가 된 것으로 압니다. 정인홍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자신의 스승 남명을 제치고, 을사사화에 관여했던 이언적과, 학문적 정적인 퇴계 선생을 문묘에서 쫓아내라’는 그의 주장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허허~~ 오늘 좋은 봄날에 아주 묘한 일들로 과거를 회상시키는구나! 기실 정인홍의 강직한 성품은 스승의 배움을 그대로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국란을 맞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대단한 활약을 한 그였으니, 당연히 힘이 실렸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개혁적 성품으로 정의가 실현되는 면도 있었으나, 그것이 정적들에게 화를 돋우는 계기가 된 것이지. 그러니 강하면 부러지기 쉽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래도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산업을 복구하고, 토지조사사업과 호적조사사업 등을 실시하는 등 군사력에도 힘을 기울였다고 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때 이항복을 대신하여 정충신이 대답했다.
“보게나, 회퇴변척은 단순히 자신의 스승인 조식 선생만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인물로 주장하는데 그것을 지켜만 볼 유생들이 아니지 않는가? 도리어 정적을 분명히 하였으며, 스승의 인품에 흠이 가게 한 것 일뿐일세.”
이항복은 꿩고기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음미하듯 우물거렸으나, 일그러진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일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정충신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정치적 업적이야 인정할 부분이지만, 원칙에 입각한 정치적 행보에 모두 두려움을 느끼게 되니, 궁지에 몰린 자들이 어찌 변할지 아는가? 너무나 강력한 개혁실천이 언젠가는 화가되어 돌아갈 것일세!”
술을 한 모금 넘긴 이항복은 한쪽 팔을 들어 말했다.
“하긴 정인홍도 어린 영창대군의 죽음에는 분명히 반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네, 또한 나와 같이 인목대비 폐모론에도 분명히 반대를 하였지만, 대북의 영수이자 임금님의 방어막을 어찌 나와 같이 유형에 처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마 수많은 정적을 만들어내며, 서인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당할 것이네. 뿐인가? 남인들로부터도 적임을 분명히 한 사건이 바로 ‘회퇴변척소’ 사건이라 할 수 있지.”
말이 끝나자 명은 가만히 생각하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항복의 말에 수긍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인홍은 수많은 정적을 만들어 냈다. 성혼을 탄핵하여 그 제자 이귀의 반감을 샀고, 이황을 비난하여 영남좌학인 퇴계학파에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유영경을 규탄하여 소북파의 적이 되었다. 특히 그는 토호와 수령의 횡포를 남김없이 지적한 탓으로 이들의 두려운 존재가 되었으며, 이 모든 것이 정직하고 강직한 성품이기도 했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의지에 열정을 다한 탓이었다.
말을 마친 이항복은 혼잣말처럼 장탄식으로 중얼거렸다.
“심히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인데, 내암(來菴)만이 모르는듯하구나! 어찌 외롭지 않겠으며, 갈수록 정적이 많아지는 것이 이렇게 안타깝구나!”
그 말을 들은 젊은 제자는 이항복을 따라 혼잣말처럼 했다.
“동방오현③의 문묘종사가 있었지만 자신의 스승만 쏙 빠졌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았을까?”
“맞는 말이다. 내 생각도 그와 같으나, 그렇다고 그들과 각을 세워서야 어찌 되겠느냐? 아마 남명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도 그를 말렸을 것을.”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그것은 바람과 함께 한꺼번에 복사꽃이 온 세상에 흩날렸다. 셋은 그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 말을 잊었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날리다가 잠잠해 지고, 또 흩날리기를 몇 번 되풀이 하자 장엄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미 소반 위에는 떨어진 꽃잎으로 덥혔으며, 앉은 자리를 빼고 나면 꽃잎 위에 둥둥 떠다니는 형국이라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말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병든 노정객의 가슴 한 구석에는 아름다움만큼 밀려오는 슬픔도 그만큼 컸다. 그는 지금까지 힘든 고난이 있을 때 마다 좌절하거나 나약해 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들, 그리고 자신이 꿈꾸어 왔던 이상학(理想學)이 멈추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또한 세상의 마지막에 서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생각한 것이지만, 그는 평소 사람은 어디서 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출신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떤 마음으로 어디로 향해 가느냐가 중요했던 것인데, 지금은 충실히 자신의 길을 향해 걸어왔던 과거를 되돌아보며 순간의 후회도 없음을 자찬했다. 그리고 60을 넘긴 나이였던 터라 자신의 생이 조금 짧음에 작은 미련이 생겼으나, 그것이 운명이라면 의연히 받아들이리라 다짐하게 된다.
지금 이토록 화려한 천상의 세계를 보여준 것이라면 분명 그에 대한 대가가 있으리니, 한 그릇의 밥도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짧은 평화도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의 행복한 마음에 모든 것을 걸어도 좋았다. 다만 심성을 굳히고 난 뒤 단 하루도 편협하지 않았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자신이니만큼 저승에 가게 되면 ‘너무 일찍 데려왔노라! 짧은 항의나 할 것이로다.’ 했다.
마지막으로 항상 믿음으로 함께했던 임금(광해군)의 용안을 떠올렸다. 바로 앞길이 없어지자 뒤를 돌아다보게 되는 순간이지만, 총명하긴 하나 강직한 성품이 도리와 화가되어 돌아오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었다. 또한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정치를 펴야 나라가 바로 서며 신하 또한 올바르게 세워지는 법인데, 왕의 정심正心이 이같지 않으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파당인데 이것이 걱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천거해 등용된 최명길과, 이곽, 장만과 신립 장군의 아들 신경진의 얼굴이 떠올랐으며, 이제 곧 만나게 될 한음 이덕형이 무한히 그리웠다.
충남 서산 진충사에 봉안된 충무공 정충신 초상.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장으로 뛰어들어 활약하였다. 이항복의 눈에 띄어 공부한 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충신은 대취한 이항복을 부축해 일어났으며, 남은 자리를 정리하는 것은 젊은 제자 명의 몫이었다. 먼저 둘이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명은 소반과 빈병, 그리고 남은 안주를 보자기에 싸 지게에 올려지고, 뒤를 따랐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사각사각 푸른 풀들이 퇴장하는 노정객을 위로하듯 연주하였으며, 파란 하늘 높은 곳에는 슬픈 낮달이 밤을 재촉하듯 희미하게 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젊은 제자 명이 준비한 저녁을 맛있게 비운 후 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이울 수 없었다.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으며, 머리가 둔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충신은 가까운 의원을 데려와 진맥을 하고, 침을 놓았지만 두 번째 맞는 풍이라 효과가 별무였다. 그렇게 얼마를 버티다 정충신의 손을 꼭 잡고 숨을 거두었다. 때는 1618년 5월 13일, 멀리 새벽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렸으며, 햇살은 어둠을 뚫고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한평생 군주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노정승이었으며, 해학과 지혜로 조선의 위기를 넘겼던 백사 이항복. 그의 나이 63세였다.
정충신은 이항복의 시신을 수습하여 운구행렬과 함께하였으며, 그가 선산에 묻힐 때까지 함께했다.
광해군은 운구가 지나가는 지역 고을마다 협조하기를 명하였으며, 그가 걸어왔던 길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듯 소식을 듣고 길가로 몰려들어 통곡하는 백성들에 의해 운구행렬이 늦어지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장지에 일만여 명이 조문을 하여, 애도를 표하니 40년 관작에 있었음에도 당색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백성과 나라만을 생각했던 이항복의 공평한 처세술과 그의 기품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사실관계를 떠나 우리는 <오성과 한음>설화에서 교훈을 얻는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어린이의 기지와 해학을 통해 인간 본성과 약점, 그리고 희망을 품게 된다. ♠
① 회퇴변척소/ ‘회퇴’는 회재晦齋 이언적과 퇴계退溪 이황의 호를 줄인 말이며, 정인홍이 자신의 스승 남명 조식과 학문적 뜻을 달리했던 두 인물을 문묘에서 쫓아내라며 올린 상소를 말한다. 광해군 3년(1611), 이 일로인해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일어나 정인홍을 청금록에서 삭제해 버렸으며, 광해군과 유생들 사이 험악한 분위기로 변해 극한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때 이항복이 광해군을 설득해 무마되었으나, 북인들의 미움을 사는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② 정인홍鄭仁弘(1535~1623)/ 경남 합천출신으로 호는 내암來菴이다. 남명 조식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동강 김우옹, 망우당 곽재우와 더불어 남명의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이다. 드물게 산림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김면과 의병을 일으켜 성주에 쳐들어온 왜군을 크게 물리쳤고, 10월에는 ‘영남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다음해 성주 합천 함안 등지를 방어하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대사헌,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조식의 문하답게 현실 문제를 깊이 인식하였으며, 실학적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대북일파의 영수였던 그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직함만 가지고 향리에 묻혀 지내던 중 서울로 압송당해 참형에 처해진다. 그의 나이 89세였다. 후대에 그를 평가하는 시각은 조금씩 다르다. 서인정권이 말한 폐모살해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를 했으며, 어린 영창대군의 죽음에도 반대를 했던 인물이나, 광해군의 몰락과 함께 그도 비극적 운명을 함께했다. 반정에 성공한 서인들에 의해 ‘뱀과 같은 성품과 도깨비 같은 마음이며, 사림사이에 도둑질하여 한낱 지방에서 세력이나 쓰는 품관일 뿐이었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③ 동방오현 문묘종사/ 광해군 2년(1610)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이들 다섯을 동방의 오현이라 칭하며 이들만 문묘에 종사되게 하였다. 결국 퇴계학파의 제자들은 학문적 정적인 남명 조식을 쏙 빼 버렸던 것이다. 구태여 동방의 오현이라 해야만 했을까? 육현도 있고, 칠현도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