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위키백과)
이항복은 지난 세월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53세로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뜬, 한음 이덕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날 그와 함께 밤새워 난상토론을 벌이며 학업 하던 때, 당색이 서로 달랐지만 변치 않았던 정리에 그를 보내던 날, 얼마나 많은 눈물을 뿌렸던가! 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지혜와 기치로 명나라 원군을 함께 이끌어내었으며,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전장을 누비던 젊은 날의 그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항복은 지친 지난 마음을 달래듯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꽃가지 사이로 비추는 햇살은 노정객의 주름진 얼굴을 구석구석 밝게 하며, 그 빛은 온 몸의 세포를 따라 흘렀다. 그 기운이 가슴에 모여들어 세상의 아름다움만 간직하라며 마법처럼 세상은 도원경(桃源境)이 앞에 놓여있었다. 그만 지친 몸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봄날을 마음껏 즐기라고 하늘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며 두 스승을 지켜보던 젊은 제자 명이 몽유도원의 세상을 깨트렸다.
“스승님, 미천한 몸이라 지금까지 의문점이 있어 이렇게 춘심을 깨고야 맙니다. 정여립 모반사건 때 예조정랑으로 정철과 함께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에 녹훈되셨는데, 진정 최영경(崔永慶)①을 구하려 애를 쓰신 것이옵니까? 혹여 동인들 말살에 앞장을 서신 것은 아니옵니까? 제가 최근 가까이서 모셨던 선생님의 인품으로 보아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그러한 분이 아니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정충신은 자신의 스승에게 뼈아픈 과거사를 던지는 철없는 이 어린놈에게 화가 났다.
“이놈,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끄집어내는 것이냐? 보자 하니 이놈아, 아무리 유배의 몸이라 하지만 말을 가려서 하라!”
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젊은 제자 명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항복은 손으로 정충신을 제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란길에 오르는 선조
“만운은 흥분하지 마시게.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 하여도 뚜렷한 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면 그것이 앎에 대한 호기심에서 그런 것이니 내 개의치 않겠네. 그래 이제야 그에 대한 변명을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이렇게 좋은 날, 참 좋은 벗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 않느냐? 내게도 한계란 것이 분명이 존재했었느니, 송강이야 평소 그의 인품처럼 당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사건에 매달렸었지. 그를 제지하기란 여간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네. 그의 시각에선 최영경에 대해 지식이나 인품에 대한 존경이 질투와 시기로 변질되어 그의 정적이나 다름이 없었다네. 동인말살을 시도했다고는 하나 최영경을 함께 엮어서 쳐내지 못하면 언제고 그 칼날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무리를 한 것이지. 선대왕께 선처를 기대했으나 송강의 모난 심성을 이겨 넘길 수 없었네.”
이 말을 경청하던 제자는 정충신의 눈치를 보아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선생님의 말씀이 저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당시 옥사에서 동인말살에 선생님의 역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 않습니까? 삼 여년에 걸친 옥사에서 죄 없는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일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을 어찌 후세에 비칠지 그것이 걱정이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항복을 대신해 정충신이 거들었다.
“아 이놈, 선생님께선 정여립 모반사건만 다루었을 뿐이지, 그 이후의 일에는 옥사를 다루는 일선에서 물러난 뒤의 일이 아니더냐? 그 후론 직간접으로 동인 구원에 전력을 다하였느니.”
이항복은 술병을 들어 정충신의 비어있는 잔에 술을 부으며 입을 열었다.
“다소 맞는 말이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추연(秋淵) 우성전(禹性傳) 또한 최영경을 힘써 구원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이유로 다시 파당의 골이 선명하게 된 원인이 아니더냐? 남명 조식 문하의 북인과 퇴계 문하의 남인으로 말이다. 그러나 나 또한 그것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네. 나의 한계를 뚜렷하게 느꼈던 시점이 그때였으니.”
제자 명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예, 그런데 그 후, 송강의 논죄를 두고 정계가 시끄러울 때 아무도 찾지 않았던 그를 자주 찾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홀로 오늘 내일 어찌될지 모르는 인사를 나까지 모른척한대서야 어찌 되겠느냐? 아마 후대에 나를 어떤 인물로든 평가하지 않겠는가? 좌승지의 신분이었던 내가 업무 차 찾는 것은 당연했던 것이기도 했지. 삼사에 출입하여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네. 그렇게 보면 솔직히 내 은덕을 입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으니.”
그제야 젊은 제자 명은 의문이 풀린 듯 환한 미소로 불충했던 자신을 사죄했다. 그러나 정충신은 여전히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적소의 모든 일처리를 성실히 해 주는 명에 대한 고마움에 다소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한동안 삼인삼색의 사색에 몰두해 있었다. 이항복은 그동안 마신 취기로 얼굴은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변했다. 복사꽃이 비춰 그리된 것인지, 마셔댄 취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충신은 충신답게 읍소하듯 꼿꼿한 자세를 취하며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명이란 놈은 얼씨구나 노 스승님이 준 잔을 넙죽넙죽 받아넘겼다. 그 또한 도연명의 세상이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 취기에 용기가 생긴 명은 또다시 질문을 해 왔다.
“선생님, 국란 당시 선대왕(선조)의 안일한 대응에 민심의 원성이 잦자, 전장을 누비며 진두지휘한 지금의 상감마마(광해군)를 시기한 것은 아닌지요?”
이때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정충신이 거들었다.
“전란도중에 전라도에서 송유진이란 놈이 반란을 일으켰었지, 전란 중에 반란이라니? 대신들이 겁을 먹고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스승님만큼은 올바른 판단을 하신게지. 그렇지 않아도 세자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좌에 오르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던 판에 만약 대신들 주장대로 환도를 하였다면 그것이 사실인양 왜곡될 것이니 어찌 선대왕의 노기를 피할 수 있었을까? 결국 환도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진압하여 지금의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
이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항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좌) 이항복, 우) 이덕형. 마치 한 사람에 의해 그려진 듯 비슷한 모습이다.
“잘 보았느니, 백성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임금보다, 자신들을 늘 생각하며 위안했던 세자에게 여론이 몰린 때문이기도 하지. 다른 궁궐의 건물은 다 불에 탔지만 동궁만 무사했던 것은 백성이 그를 아꼈던 까닭이 아니었겠나?
스승의 말에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궁궐에 불을 지른 것은 우리 백성이 아니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아니었습니까?”
이항복은 다소 곤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여러 설이 분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독 광해군의 거처였던 동궁만 온전했다는 것은 왜군이 그것만을 일부러 남겨둘 이유는 없었다. 성난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단 사실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일이지만,
<선조수정실록>에 근거, ‘왕이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공사노비 문적이 있는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궁성의 창고를 약탈하고 방화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40년 먼저 나온 <선조실록>에는 그 내용이 한 줄도 없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성룡이 쓴 <징비록>의 기록에는 ‘4월 30일 남대문 안 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가 이미 하늘에 치솟았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인지는 기록하지 않음은 당시 피난길에서 뒤를 돌아다본 모습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기록 <조선정벌기>에는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나라 궁전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1592년 5월 3일)로 기록하며 진시황의 아방궁 같다며 찬탄하고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복궁은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흘 뒤 왜군 종군승려 기록에는 경복궁이 초토로 변했다고 쓰여 있다. 그 사이에 일본군 누군가가 불을 질렀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우리 민초들이 방화범으로 억울하게 몰려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항복은 일부 전각이 백성들에 의해 파괴되고, 나중에 왜군들에 의해 완전 소실된 것으로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내용에선 묻지 말라. 먼 훗날 후손들이 지혜롭다면 밝혀줄 것이네.”
명은 노스승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취기가 한 몫을 담당한 것도 사실이나 한양에서 영의정까지 지냈던 인물에 대해 신기하고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 모습을 본 정충신은 명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스승과 뜻이 같음을 넌지시 알렸다. 그러나 먼데 산허리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계속)
① 최영경崔永慶1529~1590/ 남명 조식의 후학으로 학문이 뛰어나 명망이 높았으나,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1589)가 일어나자 사건의 책임자인 송강 정철은 정여립의 휘하에 길삼봉이라는 주동자가 있다며, 그 길삼봉이 바로 최영경이라고 막연한 추측으로 그를 국문했다. 결국 정철의 정적이었던 그는 국문을 받다가 옥사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