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이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모질게 살아왔던 터라 왕위에 오르자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또한 백성의 화합을 위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하고, 일백여 명 궁녀를 집으로 돌려보내 사치와 향락풍조를 일신하였다. 또한 김치양이 사치와 향락을 일삼던 낙원정을 헐고 그곳에 있던 진기한 어류와 조류 등 온갖 짐승들을 풀어주었다. 지난날 자신이 12세 때부터 승려의 길을 걸어왔던 심성이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는 짐작이다.
그렇다면 모진 고난을 극복하고 자유의 몸이 되어 일국의 왕좌에 오른 현종은 지난날의 힘들었던 시절을 보상받듯 평안했을까?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니 기구한 운명을 어찌할 것인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중원에서 송과 패권을 다투고 있을 때에 이미 고려는 성종 시절 한차례 거란의 침략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6주를 되찾는 기치를 발휘했다. 하지만 송과의 교류를 하고 있던 고려를 늘 눈엣가시로 여겨왔던 거란으로서 목종폐위는 침략의 좋은 빌미가 되었다.
1010년 7월 현종의 즉위 직후 거란은 목종살해의 책임을 물어 군대를 몰아 고려를 침략했다. 즉 강조를 넘기고 임금이 직접 거란으로 와서 사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을 옹립한 당대의 실력자 이부상서 참지정사 강조를 내어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종은 즉각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통주로 나아가 거란을 막게 했다. 기실 말이야 목종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었지만, 지난날 고려에 돌려준 강동 6주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으며, 여전히 송과의 교류가 거란에겐 위험요소로 작용을 했다.
거란 왕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40만 대군 중 20만씩 나누어 강조가 진을 치고 있던 통주로 진군하였고, 나머지 20만은 남으로 향했다. 거란과 전투에 나선 강조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고 전투에 임했다. 또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검차를 앞세우며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잠시 방심했던 강조는 결국 중군이 급습당해 거란의 포로가 된다. 거란왕은 강조를 자신의 부하로 만들고자 회유했으나 강조의 기상을 꺾지는 못했다.
“나는 고려의 신하이며, 북방의 오랑캐를 몰아내려 선두에 선 고려의 장수이다! 어찌 하늘아래 두 나라를 섬길 수 있으며, 오랑캐의 부하가 될 수 있겠느냐! 내 비록 방심하여 너희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나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하며 눈을 부라리니 결국 강조는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강조가 죽자 고려군사는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대로 사기가 오른 거란군은 남진하여 개경까지 함락하고, 궁궐을 방화하며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했다.
비운의 왕 현종은 또 한 번 몸을 피해야 했다. 대신들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강감찬의 강력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기도 광주에서 전북 태인까지 몸을 피했다가 결국 나주까지 몽진을 했으나, 그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몽진을 떠난 현종은 창화현(지금의 양주)에서 그곳 지방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으며, 적성현(전북 순창 적성면)에서는 무뢰배들이 일국의 왕인 자신을 향해 활을 쏘아댔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뿐만이 아니었다. 전주에 도착하자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고 군사를 풀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쯤 되면 고려의 왕권이나 국가의 기강은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전란도중 몽진을 온 왕에게 그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종은 이 같은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일설에는 고려 왕실이 신뢰를 잃었다고 평하나, 필자 생각은 지방호족 입장에 선 단편적인 해석이라 생각한다. 각설하고, 현종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음속으로 이를 박박 갈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국란의 순간에 화합된 힘과 용기를 발휘한다. 그것도 나라가 주는 혜택의 그늘에서 한참 벗어나있던 사람들에 의해서다.
고려는 게릴라전으로 거란군을 괴롭혔다. 곳곳에서 군사를 모아 거란군을 격파하니 오랜 기간 전면전에 시달린 거란군은 개경함락 7일 만에 북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양규 장군과 별장 김숙홍이 이끄는 천여 명의 병력이 끈질기게 싸움을 벌여 수만의 거란군사를 죽었다. 1011년 정월, 퇴각하는 거란군을 살려 보내지 않았다. 정성이 이끄는 고려군이 맹렬히 추적하여 압록강에서 수많은 병력을 수장시키고 강동 6주를 회복한다.
KBS2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화면 캡쳐. 양구 역의 지승현. 정말 탁월한 케스팅이라 생각 했다
그러나 우리 고려의 피해도 컸다. 양규 장군과 김숙홍이 전투 중 목숨을 잃어야 했다. 양규는 수십 대의 화살을 맞고도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으니 적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현종이 전주, 공주를 거쳐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양규와 김숙홍의 가족들에게 전공을 포상하고 봉작을 내려 추증하였으며, 공신록권이 발급하면서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또한 전란에 공을 세운 장군과 백성들에게 골고루 포상하여 전후 수습을 마무리해 나라를 안정시켜 나갔다.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는 법, 양규의 아들이 바로 고려 정종 때의 무신 양대춘이다.
현종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차례 여진족이 침입하여 경주를 급습했다. 늘 전쟁으로 하루를 났던 고려는 어렵지 않게 여진을 물리쳤다. 그러나 거란왕은 강동 6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1013년 거란은 여진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다 대장군 김승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여 돌아갔으며, 이후에도 끈질기게 고려를 침략했으나 번번이 물리치니, 마침내 1018년 12월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10만의 군사를 몰아 침략을 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주에서 71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장의 선봉에 선 강감찬에 의해 몰살당하니 이것이 구주대첩(1019. 2.)이다.
수많은 전란을 겪어야 했던 현종은 성곽을 축조하며 국방에 만전을 기하였다.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요직에 앉혀 국정을 튼튼히 다졌다. 뒤이어 거란왕은 화친을 제의해 왔으니, 여진의 추장 나사불도 화의를 약속하게 된다. 고려는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전란 중에 소실된 사초를 복원하고, 황룡사 등 사찰을 중건케 하였으며, 6천여 권의 대장경을 편찬토록 하였다. 이후 고려는 이백 년 가까이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그러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 어린 시절부터 고난과 시련을 겪었던 현종은 1031년 5월, 40세의 아까운 나이에 이 세상과 하직을 고하고 만다. 재위 22년 만의 일이었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현종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군자는 나라를 다스릴 때 환난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아야 한다. 물론 평안 할 때도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삼가는 마음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하늘의 믿음을 받든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나는 현종에게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구나.’
필자가 현종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그의 흠집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지시해 만든 훈요십조 제8조에,
‘차현車峴 이남, 금강錦江 밖의 지세가 등을 지고 거스르니 인심 또한 그러하다. 혹 권력을 쥐게 되면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후백제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꾀할 것이다. (중략)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등용하여 쓰지 못하게 하라.’
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처음 태조가 만든 훈요십조에서 상당히 첨삭을 했던 것으로 본다.
고구려 옛 영토에서 나라를 일으킨 고려에 신라는 나라를 통째로 바쳤으나, 끝까지 항전했던 백제를 싸워서 복속시켰다. 응당 백제의 유민들의 봉기를 미리 차단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현종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이 일부 학자의 주장이다. 이유로는 현종의 외할머니가 신라계 김억렴의 딸(신성왕후)이다. 이후로 현종은 스스로 신라계 혈통임을 자처하며, 고구려계, 백제계 신하들 몰락을 가속화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 힘든 몽진길 그곳에서 치욕과 수모를 당했던 것에 대한 보복의 차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현종이 승하하고 몇 달 후 강감찬도 1031년 9월 15일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