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대 홍문관 부제학 자안 김구의 유배객 삶
* 남해 금산에서 바라본 상주바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파릇한 새봄의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주인은 한 번 인편을 통해 안부를 물어왔을 뿐이었으니, 약속대로 이봄이 한창이면 돌아올 것이라 자암은 그리 믿고 있었다. 또한 간간이 아이와 몇 번의 만남과 대화가 있었지만, 남해에 와서 사귄 벗이 찾아올 때나, 부윤영감의 관대함으로 초봄의 여행을 즐길 수 있어 다소 소원했던 터다.
남해 금산 보광사① 대웅전 뜰의 홍매화가 추위를 뚫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피어나고 있었을 즈음, 아침 일찍 한양으로 떠난 벗이 돌아오기를 하루하루 뱃전에 나가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괴나리봇짐을 맨 아이가 조용히 서 있었다. 어딘가 떠나는 품새였으니 그 모습이 궁금했다.
“아니, 지금 어디를 가시려고 그리 행장을 꾸렸느냐? 설마 꽃향기 만발한 때에 이 몸 가슴에 슬픔을 안겨 주려고 떠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
“추위에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가 망울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과 향기를 찾아보고 싶어 이렇게 찾았습니다. 고명한 말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다소 욕심을 부렸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좋은 봄날 길 떠난 집주인을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자암에겐 멋진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자암은 흔쾌히 허락을 하고, 자신도 행장(行裝)을 꾸려 길을 나섰다. 길을 걷다가, 소달구지를 만나면 잠시 얻어 타고, 짐꾸러미 끌고 가는 달구지엔 아이만 잠시 태우면서 도란도란 아이와 어버이처럼, 때로는 오랜 벗처럼 그렇게 길을 떠났다. 아침에 출발했었으나 미시(未時)②가 되어서야 금산 입구에 도착을 했다. 오는 도중 미리 준비한 주먹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했으나 뱃가죽이 등짝에 붙어있었다.
입구에 다다르자 맑은 숲의 향이 번졌다. 이른 봄이지만 꽃망울이 맺혀있고, 성질 급한 풀들이 파릇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이때 침묵을 지키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화전花田의 벗들과 우정을 나누고 정을 주셨는데, 풍류가 가히 압권이라 하셨습니다. 원래가 인심이 좋고, 물산이 풍요로워 도둑이 없고, 가난뱅이가 없으며, 더욱이 문맹이 없다하였으니, 이곳으로의 유배가 선생님께 어찌 보면 행운을 준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유배인의 단절되고 고립된 마음을 넘어, 넓게는 양반상노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친교 함으로써 인정과 다감함이 자자하니 선생님의 학문이 더욱 매끄럽게 빛날 것이라 믿습니다.”
“과한 칭찬이구나! 미천한 재주만 믿고 가벼이 행한 것은 아닌지 가끔 부끄러운 것을. 그러나 내 마음을 두고, 나눌 벗들이 많은 것도 진정 홍복이라 할 것이다. 심천에 사는 오진사가 그러하고, 하청수가 그러하고, 훈도 서태원이 그러한 사람이지. 뿐이던가. 내 몸을 자신의 몸과 같이하는 강윤원이 있으며, 민인로의 우정은 또 남다르지. 이곳 보광사에 주석하시는 광산스님 또한 흔들리는 내 마음을 다독여 나보다 더 나답게 나를 보아주며, 내 마음을 돌아보게 하시니 네 말처럼 얼마나 복된 삶이며, 유배생활이 아니던가! 다만 멀리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의 안부가 늘 가슴에 밟히고, 미련한 서방만나 운우지락(雲雨之樂)은커녕 청상 아닌 청상으로 살아야 하는 부인이 늘 마음에 걸릴 뿐이다.”
이때 둘은 보광사 부도밭에 올라있었다. 옹기종기 도열해 있는 이름 모를 고승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은 한가롭기 그지없고, 조용히 숲 속에 묻어 있어 사색하기에 참 좋은 곳이라 여겨졌다. 그때 앙증맞은 부도에 가만히 손을 올린 아이가 둘만의 정적을 깨웠다.
“남해의 별칭이 ‘화전(花田)’이라 들었습니다. 해서 선생님께서 이곳에 계시면서 우중유락(憂中有樂)의 면모를 보여주는 <화전별곡花田別曲>을 집필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글들이 후대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압니다만, 이제 선생님은 유배인으로써 병리적 고통이야 어느 정도 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본연의 그리움이야 천년인들 떨칠 수 있겠습니까만, 가만히 생각하면 힘들고 고단한 귀양살이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남다른 지혜가 있습니다. 산수 유람을 포함하여, 신선의 향마저 풍겨오니, 악(樂)과 문(文)과 자(字)가 서로 어우러져 선(仙)으로 승화되는 기운을 봅니다.”
“그리 보았다면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어찌 내면의 마음을 숨겨가며 이중적 삶을 살아가겠느냐! 이미 나라를 위한 그 뜻이야 거둔지 오래되고 보니 승(僧)과 속(俗)이 다르지 않으며, 무지와 지혜가 다르지 않은데, 하물며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거나 모습으로 나누거나 크기로 나누거나 명예와 부로 나눈다면, 후대에 이 김구의 인생은 비루했었다고 얼마나 욕을 먹겠느냐? 그러하니 죽어 조상님께 어찌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
“참으로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먼 후대에도 부와 권력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이익을 좇아 인간관계를 맺고, 심지어 문벌간 수평적 가족의 연을 맺기도 하는데, 가진 자는 더 가지지 못해 안달이고, 늘 허기진 아귀처럼 금력과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저급한 인생들이 정점에 서있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 대물림하고자, 남을 밟고,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식자층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자칭 지성인이란 사람들이 말입니다. 지식과 지성의 차이를 착각하여, 거드름피우는 꼬락서니를 날마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제일 힘든 일입니다. 역사가 주는 아주 간단한 교훈도 망각한 채 말입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아주 더러운 세상이구나! 남곤이나 홍경주 같은 작자들이 여전히 세상을 망치고 있구나! 그러나 언제나 희망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조용히 자신의 의무만 다하며, 큰소리 내지 않는 ‘들사람의 얼’③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란다.”
“좋은 말씀 주셨습니다.”
둘은 부도밭을 내려와 보광사 대웅전에 올랐다. 보광사에 주석하고 있는 광산스님의 환대를 받고, 매화가 환하게 피어있는 대웅전 앞마당에 섰다. 온 몸에 매화향이 가득 묻어나고, 아이는 광산스님 얼굴에 홍매화가 가득 핀 느낌을 받았다. 대웅전과 매화꽃이 어우러져 부처님 세상을 꽃비로 변화시키며 자암이나 아이나 마주한 얼굴에 매화꽃이 환하게 만발했다. 자암은 아이를 만나고부터 저토록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무척 기분이 좋아졌으며, 자신 또한 아이를 따라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을 닮아가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대웅전 뜰을 거닐다 스님이 인도한 방으로 들어서 준비한 공양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그런 연후에야 셋은 차를 앞에 놓고 뜰에 홍매화를 내려다보며 차향과 매향에 도취해 대화를 이어갔다.
문득 자암은 스님에게 드리는 시를 즉석에서 노래했다.
스님에게 드림④
하늘 끝에는 유배를 와서 사람과 비슷해도 반가운데
광산스님이야 오래 전부터 만난 듯 서로 가깝구나.
누대 둘러 소나무와 달이 능히 도를 지키고 있으니
십 년 동안 시와 글로 몸을 즐겁게 한 게 부끄럽네.
남쪽 너머는 차고 아득해 검은 바다가 넘실거리고
북극성은 멀고멀어 꿈결에나 자주 나타나네.
두루산을 아득히 바라보며 헤진 짚신을 함께했더니
만 리 밖에 외로운 배에서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자암이 노래를 마치자 스님은 잔잔히 미소로 화답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아이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의 <화전별곡>이나 <자암집>이 후대에 전해져 오는 터라 가까이 접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경기체가로 구분되는 <화전별곡>을 국한문 혼용으로 지은 별다른 뜻이 있었습니까? 특히 이 글을 일러 후대의 사람들은 ‘남해찬가’라 부르길 좋아합니다만.”
“하하! 네가 정녕 후대에 일어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냐? 어찌되었건 ‘남해찬가’라, 참 어울리는 제목이구나! 그러나 아무리 경기체가라 할지라도, 세상 어느 것이 정답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글로 이해가 가능한 것은 그리 하였고, 오랜 글은 한문문장으로 한 것이다. 또한 흥에 겹거나 형용할 사용에 있어서는 우리글이 훨씬 전달이 강하다 할 수 있지 않겠나?”
“아! 흥이 발하는 모습이라던가, 코를 고는 소리, 또 거문고 타는 소리 등은 당연 그러하단 생각이 듭니다. 이제야 거듭 이해가 됩니다. 저는 그 글을 노래하면서 느끼는 점이 어쩜 제 생각을 이리도 딱 맞추어 노래하셨을까? 하는 경이로움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장1에 ‘하늘 끝, 땅 끝, 한 점 신선의 섬’이라 하였듯, 화전의 아름다운 경치야 이미 정평이 나 있지만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물에서 이곳 남해에 살고 있는 벗이 딱 그러하니 무릎을 치고 말았습니다! 또, 장2에는 사람의 술버릇에서 대화의 모습까지 이리 신나게 노래한 것에 찬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것뿐입니까. 장3에서 제가 함께 주흥에 참석한 듯 여흥을 즐기게 되는 경지를 맛보았으며, 몸맵시 잘났다던 학비(學非)의 모습이 궁금했드랬습니다. 뿐입니까? 장4와 장5를 거치면서 각종 악기소리와 여러 가지 술의 종류까지 그것만으로 흥취를 돌게 만드니, 이것이야말로 글로써 오감을 느끼게 하는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6에 가서야 주지육림의 높은 집이 즐비한 서울보다 소박하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곳이 좋다고 노래하셨는데, 그 노랫말 속에 지난 시절의 그리움이 조금은 녹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히 한(恨)과 원(怨)이 뒤섞여, 비록 개혁의 꿈이 좌절되었지만, 희망을 풍류에 녹여 유배생활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작품이라 귀한 문학적 소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둘만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광산스님이 잔잔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어린 동자께서 지식 뿐 아니라, 흥겨움과 맛과 멋에 아주 잘 녹아 드셨구랴! 대체 어디서 이런 동자님을 모셔오셨습니까?”
“예, 저의 집주인 규문 선생 먼 친척뻘 되는 아이랍니다. 만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한두 번 대화를 하다보면 아이란 것을 망각하곤 합니다. 하하하! 가만히 보니 이 아이가 내 글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러하니 지은이 보다 더 흥분해서 말하는 것 좀 보십시오!”
아이가 끼어들었다.
“덕담인지 흉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 귀가 보약인지라 듣고 싶은 것만 알아서 듣는 탁월한 장치가 깔려있으니 저는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는 듯하여, 단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선전기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양사언(楊士彦) 그리고 석봉(石峯) 한호(韓濩) 선생과 더불어 4대 서예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글씨를 일러 서울 인수방에 사셨다고 ‘인수체(仁壽體)’라 부르기도 합니다만 그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주시지요.”
“허허~ 인수체라 그 듣기 싫지는 않구먼! 그러나 모든 서예의 기본이 되는 해서는 예서의 기본에서 나온 것이듯, 해서는 육조시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서예인 위진 시대의 옛 법을 근원으로 삼아 글씨의 묘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나 스스로 익혀 송설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을 뿐이다.”
“예, 송설체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하셨단 말씀인데, 이는 성리학 이념을 올바르게 인식하여 현실정치에 접목시키고자 노력하셨던 만큼 기묘(己卯)의 명현(名賢)들이⑤ 그러 하였듯, 송설체와 성리학이 무관하다는 사실을 직시하시고 해서의 기본을 이루는 왕희지체로 복귀를 시도하신 것은 아닌지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면 성리학의 이념에 이해가 다소 부족했었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마. 때문에 서체의 변화도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었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그러나 초서는 왕희지를 넘어서 여러 분들의 필획을 연구하여 만든 것이지.”
“그런데 선생님의 서체는 가늘듯 이어지고, 이어지다가 줄어들며 어느 한 순간에도 긴장감을 충족시키고 있는 듯 보입니다! 누구는 경건한 서체라 합디다만, 저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 시작하면 끝까지 읽어내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 것 같은 끌림이 있으며, 큰 글씨와 작은 글씨가 주는 맛을 달리하니, 큰 것은 작은 글씨에 비해 호방한 선생님의 기질과 닮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여백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시니 저는 지금까지 여백이란 잔잔한 채움과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보았습니다만, 선생님의 글에서는 여백이 호방하고 생동감을 느끼게 되는 근원이 됩니다! 또한 초서에는 춤을 추는 붓끝을 상상하게 만들어 가히 가슴이 설렙니다!”
“네가 내 글을 그리 자세히 보았단 말이냐?”
“선생님 글씨를 감상하다 보면 그렇게 리듬을 느끼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조금 지난 후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사류들이 정암 조광조 선생님과 자암 선생님을 존경하여 따르는 수가 헤아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성리학의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단아한 왕희지체가 일가를 이루고, 더불어 활달한 서체가 탄생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선생님이 저변에 깔아놓으신 기본위에서 창조되니 선생님께서는 진정 선구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죄지어 유배된 몸, 심한 과찬을 삼가 하라. 다만 서체와 내 인성이 일치할 때 진정한 골격을 다듬게 되는 것이며, 글이든 시든 그림이든 모두 인성이 가장 아름다울 때 총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분명 가슴에 새겨둘 것이다.”
“참 좋으신 말씀입니다! 미사여구의 문장을 남용하면서 악다구니의 세상을 살아가는 분들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잠시 물 좀 버리고 오겠습니다. 차를 마시면 자주 들락거리니 이처럼 불편합니다.”
아이가 나가고 난 뒤 광산스님과 자암은 서로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다. 어린 아이의 가슴이라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은 것이기에 어쩜 도술을 부려 자신들을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한 모종의 대상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화 속에 점점 날이 저물어갔다. 저녁 예불을 드린 후 둘은 작은 선방에서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그렇게 점점 어둠 속에서 소곤소곤 대화를 이어가다 자시(밤11시~새벽 1시)가 되어서야 눈이 무거워 옴을 느끼며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멀리서 성질 급한 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리자 아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어나 살금살금 봇짐을 챙긴다. 그리고 발소리 죽여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이른 봄날 산사의 새벽은 추웠다. 아이가 올려다본 하늘엔 별무리가 드리웠고, 큰 유성이 머리 위를 급하게 지나쳐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대웅전을 향해 합장을 하고, 자암이 깊게 잠든 선방을 향해서도 합장을 했다. 그리고 잔잔한 걸음으로 천왕문을 나서고 일주문을 지나 점점 사라져 갔다. 아이가 사라진 그 길에는 짙은 새벽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나브로 아이는 모습을 감추었다.
아침이 밝았다. 아이의 모습은 가뭇없다. 자암도 광산도 산사를 뒤졌으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선방 벽에 걸어 놓은 자암의 옷깃에서 쪽지가 나왔다. 삐뚤삐뚤 한글로 쓴 글이었다.
- 이제 제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운이 닿아 존경하는 자암 선생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부디 마음을 굳건히 하시고 기다리시면 머지않아 해배의 날이 올 것입니다.-
자암은 한동안 꿈을 꾼 것 같았다. 보수주인 김규문이 돌아와 아이에 대해 물었으나 자신도 아이가 가지고 온 편지를 믿었을 뿐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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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로 인해 마치 꿈같은 시간을 보낸 자암 김구는 6년을 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한 뒤 아이 말처럼 1531년 임피로 옮기고, 2년이 지난 다음에야 유배에서 풀려나게 된다.
◀ 김구의 6대손 김만화가 남해 현령으로 부임하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우 충렬사가 있는 주변 대나무숲에 있는 작은 집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그를 추모하기 위해 1706년 죽림서원을 짓고 추모비를 세웠다. 그러나 1864년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추모비만 남아 있다.
김구는 유배객으로 외로움과 고향 생각 등에 심취하여 술을 벗 삼아 60여 수의 시문으로 한을 달랬다.
그러나 고향인 예산(禮山)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였다. 김구는 부모님 산소에 여막을 지어 조석으로 통곡을 하니 뿌린 눈물로 인하여 산소에 풀이 다 말라버렸다고 한다.
선조조에 광국원종 1등 공신에 추증되었으며,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가 증직이 되었다. ♠
*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과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암집(自庵集)』, 유품으로는 『자암필첩(自庵筆帖)』·『우주영허첩(宇宙盈虛帖)』과 예산 소재의 「이겸묘지(李謙墓誌)」 등이 있다. 또 단가 3수와 「화전별곡(花田別曲)」이 문집에 전한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① 보광사/ 남해읍 호구산 용문사의 전신
② 미시未時/ 오후1시부터 3시 사이
③ ‘들사람의 얼’/ 원래는 함석헌 옹이 한 말이다. 여기선 김구의 입을 빌려 차용해 설정하였다.
④ 이 시는 원래가 자암 김구선생이 유배 십여 년이 지난 뒤에 지은 것이나, 여기서 스토리텔링상 작자의 의도대로 앞당겨서 차용했다.
⑤ 조광조를 비롯하여 기묘사화 당시 화를 입었던 개혁의 인물들을 뜻한다.
*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 문화재와 역사의 현장을 찾아 역맛살을 즐기다 온 터라 연재 약속이 어긋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