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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점선도(一點仙島) 신선으로 살으리랏다 ①

32세의 청춘을 꽃밭에 묻은 한恨 -자암 김구

by 박필우입니다

▲ 남해군 금산




32세의 청춘을 꽃밭에 묻은 한恨 -자암 김구


장 100대에 피죽이 된 몸을 이끌고, 개령으로 또 이곳 남해까지 살아서 유배된 것만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하겠다. 그간 억울하고 피를 토한 사연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한숨을 놓아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언제 다시 사약이 내려올지 알 수 없는 몸이라 하루하루가 죽음과 삶의 귀신놀음에 춤추며 혼이 털리자, 넋을 놓은 처지에 처량한 눈물만 흘렀다.


유배의 몸이 된 후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눈물로 몇 날을 지새우며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했으나, 뒤이어 함께 절도안치되었던 김정은 제주도에서 사사되고, 선산으로 유배 갔던 김식은 자결을 하였으며, 극변안치 기준은 자객에 의해 교살되는 등, 조광조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스스로 자결하거나 죽음으로써 젊은 시절에 꿈꾸어 왔던 태평성대는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자암 김구가 지은 '화전별곡'


하늘은 가이오 땅의 머리인 아득히 먼 한 점 신선의 섬에는

왼쪽은 망운산이오 오른쪽은 금산, 그 사이로 봉내와 고내가 흐르도다.

산천은 기이하게도 빼어나서 유생, 호걸, 준사들이 모여들매 인물들이 번성하느니

아, 하늘의 남쪽 경치 좋고 이름난 곳의 광경 그 경치 어떠한가.

풍류주색 즐기는 한 때의 인물들이, 풍류주색 즐기는 한 때의 인물들이

아, 나까지 몇 분이나 되었던가.

- 자암(自菴) 김구(金絿). <화전별곡花田別曲> 중에서.




김구(金絿) 역시 자결을 꿈꾸게 되나,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 생각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스스로 해배될 날을 기다리며, 한 가닥 희망을 품어 왔지만, 결국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심정을 남해 바다에 마음을 두었으며, 위의 노래처럼 자신이 이름붙인 ‘한 점 신선의 섬’, 즉 ‘일점선도(一點仙島)’ 남해 금산(錦山)을 바라보며 자신을 추스르고 있었다. 또한 남해의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자신의 비련한 처지를 가슴으로 몸으로 달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영위하고 있었다.


유배객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유배객의 경우 언젠가 다시 임금께서 불러주기를 희망하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상당수가 후대에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고 있었으며, 이토록 자신이 역사에 빛나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정약전, 서포 김만중, 추사 김정희, 그리고 고산 윤선도가 그러했다. 지금 남해로 유배 온 김구(金絿)도 그중 한 사람이다.


김구는 1488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菴)이다.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으며, 별시문과를 거쳐 무인년(1518)년 31살 되던 해에 승문원교감에 임명되고, 1519년 홍문관 부제학에까지 올랐다. ‘뜻을 세운다음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정심(貞心)을 다하여 임금을 교화시켜 도의 국가를 건설하고, 성현의 정치인 요순시대를 이룰 수 있다.’는 숭고한 이념의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도학정치’를 구현하던 조광조와 뜻을 함께하며 개혁에 앞장을 섰으나, 결국 위기를 느낀 중종반정의 훈구세력 남곤, 홍경주, 심정 등의 ‘주초지왕(走肖之王)’,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계략에 걸려 중종의 지지아래 정계에서 제거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이것이 무오, 갑자사회에 이어 조선의 4대 사화 중 하나인 1519년 11월 15일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14)이다. 김구 그의 나이 32세를 넘기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귀양을 온 유배객에게는 고립과 단절, 그리고 세상과 동떨어진 외로움에 더욱 힘이 들었을 것이나, 김구는 그렇지가 않았다. 비록 처음 몇 년을 사약의 악몽에서, 그리고 꿈을 접어야 했던 젊은 날의 안타까움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지만, 조금씩 긍정적 사고와 특유의 학문과 시상(詩想)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궁궐에서 있었던 지난 기묘사화 아비규환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평온하고 한적한 이곳 화전(花田)에 몸을 의탁하고, 남해의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여유자적 글쓰기와 제약된 몸이지만 짧은 여행을 다닐 수 있어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지는 못했다. 간간히 개혁의 기치를 앞세우며 도학정치 실현을 이루어 내리란 희망이 절망으로 변한 까닭에 울분을 토하기도 했으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남곤, 홍경주, 심정의 얼굴들이 떠올라 가슴을 치며 젊은 자신을 비하하기에 이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간의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월이 조금씩 지남에 따라 스스로 지난날의 성급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참과 거짓을 떠나 이 모두가 부덕의 소치라 여기며, 옛 성현들에 빗대어 새롭게 공부하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낮추어 세상을 성찰하고 그렇게 배워갔던 것이다.



*

13년 남해유배생활 중 반을 채 넘긴 어느 깊어가는 가을날이었다. 하늘은 누구의 슬픔은 아랑곳없이 높고 푸르기만 했고, 이름처럼 화려했던 봄날의 꽃들은 세월 속으로 사라지며, 그렇게 야단을 떨던 벚나무 이파리가 붉그수수 익어가며 꽃잎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화전(花田)의 남해는 가을을 닮은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있고, 구절초가 온 섬을 덮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설천면 노량마을 죽림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자암은 해가 중천에 떠올랐어도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인편에 어머니가 손수 지으신 옷가지를 받아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유난히 어머님을 생각하던 효자인지라 어머니 생일상은 고사하고 가까이 모시지도 못한 채 걱정만 끼쳐드리는 불효 막급한 자신에 대한 회한에 괴로운 눈물을 쏟았으니 결국 병이 나고 말았다. 더불어 심천에 사는 벗 오진사가 고맙게 보내준 소주에 몸을 의탁한 것이 더욱 병을 돋우고 말았다.



고향 그리워 날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니

소식은 아득하고 바다와 산은 겹겹으로 이어졌네.

음식이 떨어지자 아내는 약을 넣어 보내왔고

그릇이 왔는데 어머님께서 만드신 옷가지를 부치셨네.

궁핍한 길에 홀로 시를 읊조려도 흥을 두기 어렵고

근심하는 곳에 술잔을 깊이 마시니 효과를 보기 쉽구나.

스스로 생애가 남쪽 땅에서 늙어갈 것을 아니

한 줄기 시원한 수리는 북쪽에서 온 기러기일세.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며 보냈던 시간이 처연함을 더해 마음의 병까지 깊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집주인의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방안에 박혀 두문불출하고 있는 자암 선생이 가을걷이를 하는 내내 마음에 걸려왔던 것이다. 그는 자암의 보수주인(保授主人), 즉 유배 온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관아에 보고해야 하는 임무와 함께 숙식을 책임지는 현지사람 남규문(南揆文)이다. 그는 걱정과 달리 온화하고 바른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비록 몰락한 양반의 가문에 농사일을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처지지만, 여전히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자암과 시로써 화답하는 사이가 되곤 했다. 더구나 남규문은 자암과 동갑내기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마음으로 정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슬픔에 못 이겨 눈물과 한탄으로 밤을 지새웠던 것을 아는지라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여 자암이 여유를 가지기를 기다려 바지락국 한 그릇 준비해 건너온 것이다. 방안으로 들어온 규문은 이불을 요위에 엎드려 둘둘 말아 구겨있는 자암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투로 말을 건넸다.


“어찌 아직 기침을 하지 않은 것이요? 쯧쯧……, 몸도 돌보지 않고 무던히 통곡을 하시더니 결국 이리 누셨구려!”

“오시었소? 내 아직 젊은 나인데, 몸과 마음이 허약하고, 의지가 약한 터라 조그마한 병환에도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누워만 있어서야 어찌 되겠소. 그만 일어나 이거라도 한술 떠보시오. 어제 잡은 조개로 끓인 국이라오. 비록 쌀 물이야 몇 술 없지만 시원하게 속을 풀어주고 그동안 쌓여있던 독소를 조금은 몰아내 줄 것이요! 그러니 이제 그만 툴툴 털고 지난번처럼 단풍에 그늘지어 낚시나 드리우러 갑시다.”


규문은 누워있는 자암을 일으켜 앉히고, 가지고 온 죽 그릇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이미 임금에게 죄지은 몸, 정암(靜菴) 선생도 죽음을 면치 못하였고, 충암(冲菴)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이 비명에 갔는데 홀로 이리 유유자적한 생활을 한 죄로 벌을 받는 것이외다. 그것이 내 마음 속에 타들어가 불씨가 되어 화를 돋우니 아무래도 목으로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물며 낚시이겠습니까?”


“그런 소리 마시오. 사심 없는 선생의 마음이야 모두 다 아는 사실이고, 정암 선생의 깊은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을 이 세상 사람이 안타까워하고 있거늘, 어찌 선생은 자기 연민에만 빠져 헤어나질 못하는 것이오? 인생이 아무리 짧다 해도 참이라면 살며 이룰 가치가 있는 것이며, 아무리 길다 해도 허공과 같은 삶이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인데, 낙심과 연민의 비겁한 바다에 잠길 양이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지요!”


그 말을 들은 자암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지금껏 자신의 처지를 생각지 않고 나태하거나, 보란 듯 여유를 부리거나, 밤이면 연민에 잠겨 슬퍼하기를 몇 년 째이니 이렇듯 몸과 정신이 나약해 진 것이었다.

“내 오늘 남선비께 비천한 몸뚱이 귀하게 여기심을 잘 알겠습니다. 마음과 몸을 추슬러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응당 그러셔야지요! 그래야 제가 마음을 놓고 한양 길에 나설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규문의 말에 자암은 놀라듯 이불을 걷어붙이며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 지금 뭐라 하셨소? 지금 임금이 계신 한양행이라 하셨소?”

“예, 백부께서 한양에 계시는데, 집안에 대사를 앞두고 있어 이 몸이 필요하나 봅니다. 내 없는 사이 선생의 지내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 놓겠으니 그리 염려 마시오. 내년 망운산 동백의 꽃망울이 맺히기 전에 돌아올 것이니 몸 잘 돌보시고 계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아니지요. 단 하루도 섭섭한데 몇 달씩이나 비운다니 그런 것이 아니오! 그래 언제 떠난답니까?”

“예, 아직 준비기간이 조금 남아있습니다. 그동안 집안에 먹거리도 장만해 놓아야 하고, 한창 농번기라 추수를 끝낸 즉시 출발하려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참 섭섭하외다!”


“내 그렇잖아도 선생께서 심심타 싶어 멀리 진주에 사는 조카뻘 되는 아이를 데려다 놓았습니다. 총명한 아이라 선생의 말벗과 잔잔한 수발을 드는 것에는 미흡함이 없을 것입니다.”

“말벗과 수발을 드는 아이라 했소? 허허~ 알겠습니다. 귀양살이 온 죄인의 몸을 이리 귀히 여겨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될지 한량없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은혜라니요? 은혜라면 선생과 나눈 덕담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

어느 듯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 자암은 주인집 남규문의 먼 친척이라는 아이를 가까이 보기는 했으나 공손히 절을 하는 것 외엔 달리 말이 없었다. 다소 왜소한 아이는 맑은 눈매를 가졌지만 어딘지 그늘이 있어 보이곤 했다. 필시 아픈 사연을 가슴에 품고 사는 아이라 생각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추수를 끝내고, 가족들이 겨울을 날 채비를 끝낸 주인이 한양으로 떠나는 날, 헤어짐이 못내 아쉬웠다. 자암은 남규문이 노량바다 뱃전에 오르기 전 가슴에 담은 시를 한 수 지어 읽었다.


가깝기가 옛 주인을 만난 듯하여

거문고 듣고 술 마시며 뜻이 맞아 마음으로 허락했지.

언덕 정자에 흰 눈이 내려 뜻이 무궁하더니

다만 돌아올 기약이 중춘仲春을 어길까 걱정이네.


자암은 시로써 내년 꽃피는 봄날 이전에 약속대로 꼭 돌아오길 강요하고 있었다. 빙긋이 웃음으로 화답하는 주인은 뱃전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배는 물결에 흔들리며 점점 멀어져 갔고, 그렇게 주인이 떠나는 모습을 섭섭하게 지켜보고 섰는데, 문득 내려뜨린 자암 손에 무엇이 더듬더듬 잡혀왔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다름 아닌 아이의 조막만한 손이었다. 아이가 떠나는 규문을 바라보며 자신과 나란히 서 있었다. 순간 조막만한 손이 이리도 따스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계속)



20200109_102838.jpg 남해읍 망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노량바다

화전花田/ 옛날부터 불려오던 남해군 별칭.

심천/ 남해군 남해읍 심천리.

보수주인 남규문/ 기록에 정확한 이름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남규문이란 이름은 필자가 붙였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호. 기묘사화 때 승주에 유배되었다가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받았다.

충암(冲菴)/ 김정金淨의 호.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를 엮임 하였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 김구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사약을 받았다.

망운산(望雲山)/ 남해에 있는 산 이름. 이름처럼 구름을 바라본다는 뜻. 해발 786m 산세가 유려하고 아름다우며 골짝 구석구석 전설과 함께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정상에 서면 바다와 주위의 섬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김구는 유배기간동안 망운산에 자주 올라 시를 지어 노래했다.

중춘(仲春)/ 봄이 무르익는 한 가운데, 음력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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