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지피는 일을 끝낸 놈이 들어왔다. 그리고 작정한 듯 바삭 들어앉으며 지난번 못 다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온기가 방안에 퍼질 것이니 너무 염려 마시옵소서. 지난 번 떠밀리다 시피 세자에 책봉이 되셨다는데, 그것은 임진년 왜란 때, 엄밀히 말하자면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간 상감 대신 그에 상당한 지위를 맡아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과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손수 난을 지휘하신 공로가 인정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서울 방어와 민심수습에 힘을 기울였고, 정유재란 때 전라도 경상도로 내려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군량과 병기를 조달하시는 등 그동안 국가 안위를 위한 분조(分朝)①활동을 통해 불철주야 뛰신 그 공로야 당연히 전하께서 세자에 책봉될 수밖에 없는 필연이 아니었나이까?”
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광해군은 ‘이놈이 또 피곤하게 구는구나!’ 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따스해져오는 바닥 때문이기도 했지만,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먼 후대 세상에서 왔다는 놈의 말을 믿기로 한 탓이었다. 그리고 후대에 똑똑히 전하라는 듯 힘을 짜내어 대답했다.
선조로 추정되는 초상(위키백과)
“전란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벼락처럼 내려준 임시세자 자리에 불과하며, 또한 권력을 따르는 무리들에겐 공로란 허울 좋은 별개의 문제일 뿐일세. 전란으로 백성과 이 땅이 피폐해 졌을 때, 민심수습과 국가방위를 튼튼하기는커녕 겨우 한다는 짓들이 공리공담뿐이었고, 서로에게 상처를 내기위해 헐뜯는 붕당정치가 판을 치던 형국이었으니, 공로쯤이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지. 내가 적장자도 아니고, 또 내 형 임해군이 계셨으니 다분히 시비꺼리가 될 수 있었고, 결국 나중에 인목대비에게 영창군이 태어나자 적장자의 시비꺼리는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광해의 말을 경청하던 놈도 지지 않았다.
“지금 이 나라 조선 왕조는 27대 순종황제까지 오백년 동안 이어집니다. 그리고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의 과욕이 백성들에게 여러 번 치욕과 국난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대만 다를 뿐 비슷한 양상은 반복되는 것 같사옵니다. 참 미련한 후손들입지요! 그것은 그렇다 치고,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분이 몇 분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순종황제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으나 광해군은 힘에 겨웠다. 오전에 어죽이라고 가져온 그릇은 맹탕뿐이었다. 빈속에 허기만 면했을 뿐, 병든 몸에 긴 대화를 하는 것은 무리였는지 모른다. 그것을 핑계 삼아 잠시 침묵과 가래 섞인 기침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허울뿐이라지만 어찌하여 중국처럼 자신의 조선이 황제란 칭호를 붙일 수 있었으며, 중국의 사대에 독립을 이룰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또한 오백년을 이어간 역사와 함께 후손에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평가 되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놈은 꼭 필요한 순간에 교묘하게 피해가는 묘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막 숨넘어가게 궁금증을 유발한 후 다음에 오겠다고 불충하게 떠나가는 놈이라, 잠시 여유를 가지며 마음을 다잡는 의식이었다. 방은 차츰 따뜻해 졌고, 그 온기에 어느새 광해군도 비스듬히 벽에 기댄 채 꼬질꼬질한 이불을 목까지 올려 덮고 놈을 마주하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함이었다.
“그래 과연 적장자 몇이나 보위에 오르게 되는고?”
광해군 물음에 놈은 목에 힘을 주어 큰 소리로 말했다.
“문종대왕과 단종을 포함해서 여덟 분 뿐이옵니다. 그만큼 왕위 계승에 변수가 많았다는 뜻이 되니, 전하께서 적장자가 아니었더라도 역사적 평가에서 당연히 세자책봉은 물론 왕위계승에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은 선대 선조대왕의 어정쩡한 행동이 더 많은 혼란을 부추긴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음……. 그대 말에 일리가 있네만, 그러나 아바마마 의중이 중요했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런 처지가 된 것일 수도 있지만…. 처음 인빈이 낳은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자 했다가 전란도중에 신성군이 죽자 나중엔 갓 태어난 영창대군을 또 염두에 두었지. 자네 ‘악죽그림’을 아는가?”
“예 소생이 사는 세상에는 인터넷이란 것이 있어 그곳에서 읽어 알고 있습니다. 선조 임금께서 늙어 바람에 꺾이는 왕죽 옆에 또 하나 뒤엉켜있는 악죽을 넣고, 왕죽의 원줄기에서 뽑혀 나온 연한 죽순을 그려놓은 그림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왕죽은 선조임금 자신이고, 악죽은 전하이고, 연한 죽순가지는 영창대군을 빗댄 그림이라 다들 그리 알고 있사옵니다.”
“인터넷? 그 참 이상한 물건도 다 있구먼. 그런 사소한 역사까지 인터넷이란 놈이 다 알고 있단 말이지? 하여튼 알고 있다니 나로선 다행이구만.”
악죽은 선조가 그린 것으로 자신의 의중을 표현한 그림이다. 유영경, 이홍로 등이 선조가 보여준 그림을 보고 선조의 뜻을 파악했다. 광해군은 후대세상에서 그 뜻을 알고 있다는 말에 조금의 위로가 되기는 했으나 속이차지 않았다. 그러자 놈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후손이 보았을 때, 국란 극복에 온 힘을 기울인 아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했던 선조대왕이 승하하시고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셨는데, 그리 어렵사리 오른 보위에서 너무 강력한 드라이브를 한 탓에 폐위를 맞았다는 평가이옵니다.”
이이첨
“일리가 있네만, 나 또한 대북일파②들의 힘을 빌어서 보위에 오른 것이니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기가 쉽지가 않았네. 왜란 때 궤변으로 일관하며 일부 국토를 떼어주고 왜와 화친을 주장하지를 않나, 꼭꼭 숨어서 입만 나불대던 그들과 달리, 직접 의병을 일으켜 전장터로 뛰어든 남명학파(南冥學派)③ 북인들의 활약이 전란 이후 그들에게 힘이 실리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니었겠나. 그러나 말일세, 오랜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산하에는 백골이 덮였는데, 북쪽 만주지역에서 여진족이 신흥국가로 성장하여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명나라와 서로 중원을 쟁패하기 위해 힘을 겨루고 있었다네. 생각하면 이 콧구멍만한 나라의 입장은 좌불안석이 아니었겠는가?”
이쯤에서 긴 말을 멈추고, 거친 기침을 토해내었다. 속의 내장까지 딸려 나오듯 힘겨운 기침에 한참을 힘들어 하던 광해군은 잠시 천정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놈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놈은 뒷주머니에서 착착 접힌 손수건 한 장을 꺼내 광해군에게 내민다. 그것을 받아든 광해군은 입가를 닦아낸 뒤 손에 꼭 쥐고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남쪽의 왜구가 또 언제 바다를 건너올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난들 보위에 오르고 싶어서 올랐겠는가. 그러나 대북세력들에 의해 보위에 올랐는데 이왕에 올랐으니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처음 생각한 것이 바닥으로 떨어진 국왕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네. 두 번째가 국방의 경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었으며, 다음이 민심을 수습하는 일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잿더미가 된 궁궐을 새로 지어야 했다네. 그러나 자네 말을 들어보니 후대에 그것으로 말들이 많은 모양이네만,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네. 성을 수리보수하고, 군사를 양성해야 했고며, 국방경비에 힘쓰게 되었는데, 빈 국고에 힘이 얼마나 들었겠는가? 뿐인가? 민심수습을 위해서 선혜청(宣惠廳)을 경기도에 두었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기도 했는데 그것마저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지.”
광해군은 마른기침과 함께 길게 말을 이어가며 힘겨웠던 지난 역사를 들춰내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 중간 회한이 겹친 부분에는 조금씩 얼굴이 일그러지기도 했다. 그 모습은 만인지상에 있었던 사람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췌한 몰골이었으나, 그 기상만큼은 여전히 형형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셨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은 피바람을 일으켰사옵니다. 그것이 결국 구석에 몰린 서인들이 들고 일어난 원인이 아니옵니까? 쥐를 쫒아도 도망갈 구멍을 놓고 쫓는 법인데 말입니다.”
“어느 누군가 정권을 잡으면 정적을 처리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있는 일인데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소북(小北)의 유영경과 그 일당들, 그리고 호시탐탐 보위를 노리고 있는 임해군을 처리했던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래도 어린 영창군을 죽인 것은 심한 처사였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난들 왜 몰랐겠나. 그러나 인목대비와 그 아비 김제남 작당은 빤한 노릇인데 영창군을 살려두면 언제고 그 무리들이 나를 몰아내려할 것 아닌가. 다만 그것을 대북(大北)일파들이 급하게 처리한 탓일 것이네. 변명이아니라 기실 정인홍은 강직하나 급한 성정이 어느 정도 문제였지만, 핵심은 이이첨 그놈이지. 그놈의 폐모론에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키고, 어린 영창군을 죽이자, 다음 칼끝이 자신들을 향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서인들이 지랄 염병하듯 반정을 일으킨 게지.”
광해군은 이쯤에서 지난 날을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들어 숨을 길게 내 쉬었다. 그리고 한참을 뜸 들인 후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놈들이 반정에 명분이 없자 부모를 폐하고 형제를 죽인 폐륜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을 들고, 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대명사대에 있어 도리에 어긋난다는 기막힌 변도 함께 말일세. 당시 남인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였고. 때문에 자네의 말을 빌리자면 훗날세상에서 다들 나보고 폭군이라 연산군과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은 모양인데,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던가? 역사관이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 내 실패한 왕으로서 뭐 그리 억울하지 않네만, 조금은 서러우이……. 생각해보게 왕권을 지켜내기 위해 형제와 조카까지 희생시킨 왕이 어디 짐뿐인가? 그런데 오직, 짐만이 그런 오명을 쓰고 있는 것은 당시 서인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기록해 놓은 <선조실록> 기록을 후대까지 그대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 아닌가? 또한 나에 대한 <광해군일기>는 또 어떠한가. 자신들 마음대로 다시 쓴 것 아닌가? 나 참 더러워서!”
광해는 어디서 그런 열정이 생겼는지, 아마도 따뜻해진 방안의 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광해군 스스로도 침착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점점 붉어지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놈이 잠시의 틈을 두고 대답했다.
“이이첨이야 후대에도 악평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전하가 자랑하는 대동법도 보위 중에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사온데, 뿐만 아니라 대동법을 반대했다는 의견들도 후대에 있사옵니다. 또한 이이첨의 전횡을 막지 못한 전하의 책임은 무엇으로 변할 것이옵니까?”
놈이 자신을 탓하는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광해군은 안간힘을 쓰듯 말을 이어갔다.(계속)
① 분조分朝/ 즉 조정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와 달리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광해군이 주도한 또 다른 조정을 말한다.
②대북일파大北/ 선조22년(1589) 정여립의 역모사건으로 일어난 기축옥사 때 무고한 사람까지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송강 정철에 대한 처리를 두고 동인東人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지고, 또다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③ 남명학파南冥學派/ 낙동강 이남지역에서 일어난 학파. 현풍의 김굉필, 함양의 정여창 등이 배출되고, 후에 남명 조식(1501~1572)에 이르러 형성된 학파이다. 그는 성리학에 기반 하였음에도 다른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성리학의 이기론과 사단칠정 문제를 떠나 실천적 학문을 우선하는 경敬과 의義로 집약될 수 있다. 그의 제자들 중 최영경, 곽재우, 김우홍, 정인홍, 정구 등이 있으며, 원래는 동인으로 구분되었으나 나중에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어 북인이 되었다. 실천학문에 따라 조식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활발한 의병활동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