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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대 왕 광해군 ①

패자의 시각으로 본 진실

by 박필우입니다



마침표 없는 역사에서 영원한 폭군으로 기록된 사연


밤새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승하하신 아바마마도 보이고, 어머니 공빈 김씨의 모습도 아른거렸다.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부인 유씨 모습에는 슬픔이 가득 묻었다. 비록 꿈이었지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동생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킨 서인세력들에 의해 강화도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간 부인의 모습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초췌한 모습 그대로였다.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는 어머니와 달리 쥐락펴락하는 아바마마의 얼굴에서는 생전의 문안조차 거부하던 표정을 연상시켰다. 희미한 호롱불 아래 눈물로 무릎을 꿇고 측은지심을 기대한 자신의 비굴한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인목대비의 노기 띤 얼굴과, 피 흘리며 소리치는 어린 영창군의 모습이 겹쳐지며 화들짝 놀라 일어나곤 했다. 폐위되고 유배되어 단 하루라도 편히 잠드는 법이 없었다. 마음의 병과 함께 성치 못한 몸이 천근만근이고, 세포 하나하나가 병들어 옴을 알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이곳 제주로 이배된 지 그간 세월은 가늠할 수 없으나, 언 삭풍에 뼛속 구석구석 옹골지게 사무쳤던 겨울이 얼마나 지났으며, 무더운 여름 각종 벌레들의 노략질에 감내하기를 십여 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만져보는 얼굴은 골골이 갈라져 마른땅 푸성귀 소리를 내고, 목소리마저 쉰 소리에 쿨럭였다. 이제 한 많은 이승의 생도 마감해야 하는 시기가 왔음을 직감하였다.


권좌와 세상과 이별하고, 인연들과 작별하고, 풍찬노숙도 마다치 않고 전쟁터에서 찬바람 맞으며 홀로 서있는 나를 거울처럼 되돌아보니, 회한과 반성의 심정은 없지 않았으나, 수구기득권 세력들이 임금 자리에 올려놓고 온갖 감언이설로 흔들어 대는 대신들의 반목과 갈등을 울분으로 감내해야 했던 자신이 마침표도 없는 조선의 역사에서 영원히 폭군이라 불리며 이렇게 사라져야 할 것인가! 라는 생각에 울분을 넘어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또한 나를 폐위시킨 반정역신들에 의해 열 살이나 어린 여인(인목대비) 앞에 엎드려 서른여섯 가지에 달하는 비망기를 읽어야 했던 기억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형제를 죽이고, 오랑캐 후금에 투항한 죄,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토탄에 빠트린 죄, 하늘을 기만한 죄, 배은망덕한 죄 등등 말도 되지 않은 그 죄목들을 읽으며 피를 토했던 당시의 기억은,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전쟁터를 누비며 국란극복에 앞장섰던 지난 시절과 겹쳐지며 울분의 기억에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아침이면 까치 울음소리에 한숨을 놓았고, 까마귀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진 사발에도 사약을 떠올리니 피가 마르고 살이 타들어가는 세월에 이제는 그만 질긴 고통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교산蛟山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시원시원하게 속에 엉어리진 매듭을 풀어주었던 벗이었지만, 이이첨의 농간으로 하인과 첩을 고문하여 받아낸 내용만 가지고, 본인 공초도 듣지 않고 곧바로 능지처참 형을 집행했다는 것이 늘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다.


형장으로 향하며 ‘내 마지막 말만은 들어 달라’던 교산이 울부짖던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과연 그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신의 곁을 꾸준히 지켜주었다면 반정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라는 미련이 있었지만, 시대의 반항아 허교산의 심성으로 보아 혼란했던 배경 속에서 과연 그가 추구했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선지 자신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단 한 번도 꿈속에서 그를 만날 수 없어 내심 섭섭한 심경이었다. 꿈속에서라도 오래된 자신의 벗을 만나 사죄도 하고, 물어도 보고, 회포도 풀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매정한 교산은 끝내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자신의 명에 의해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 가 그곳에서 풍을 맞아 죽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다. 서인이었으나 항상 중용을 겸비하며, 어느 정파에도 자유롭던 그였기에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왕세자 시절 자신과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임진년 전장을 누비며 자신을 보필했던 터라 그의 믿음이 지금에야 더욱 한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반정의 중심인물들이 그가 추천하여 벼슬길에 오른 인물들이 많았던 터라 그러한 생각을 더더욱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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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엄동한설, 한낮임에도 여린 빛 한 줄기 희미한 방안은 지옥의 문턱처럼 무거웠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 가슴을 짓눌렀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돌덩이를 얹어놓은 무거운 몸뚱이를 냉골에 뉘었으나 등골에 얼음송곳이 박히는 느낌이었다. 광해군은 움직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마지막 이승의 따스한 햇살을 받고픈 심정이었으나 마음뿐이었고, 그렇게 들락거리며 감시하던 보수주인(保授主人) 달근이 놈과 나를 아랫방에 처박고 상방을 차지한 별장놈도 오늘따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늙어 지친 놈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며 안심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모습을 두고 어느 누가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왕이었다고 믿을 것인가? 하긴 계집종 잔소리까지 묵묵하게 감내하여야 하는 이놈 신세타령이 무슨 소용있단 말인가!


마른 등줄기 뼈마디가 딱딱한 바닥에 얼마를 뉘었으나 간신히 옆으로 몸을 움직이고,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버릇은 작년 동지부터 시작된 것이었는데,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대화체로 말하곤 했던 것이다. 이 현상을 목도한 달근이 놈이 점점 미친 노인네로 취급하기 시작하며, 제주목에 사실을 고해바친 후 감시의 눈길이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기실 그때부터 광해군에게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 병약한 자신에게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보름 남짓 꿈을 꾸고 깨어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이상한 놈의 형상이다. 처음에는 꿈속에서 꾸는 또 다른 꿈이려니 했었지만, 놈의 모습도 그러하거니와 조금씩 나누는 대화에 자신을 훤하게 꿰뚫고 있어 가끔은 울분을 토로하기도 하고, 유배된 뒤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다감함도 있었으니 의지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뒤숭숭한 꿈 뒤에 놈과의 대화가 그리운 까닭이다.


그때였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 방문이 힘겹게 열리고, 늘 그래왔듯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서는 그림자 하나가 있다.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이 반갑고, 공손하게 들어서는 모습이 이 나라 조선의 15대 임금시절 교산이 보여주었던 모습을 보는 듯도 했다. 짧게 자른 우스꽝스러운 머리칼은 반백을 넘어 자신의 백발과 같아보였고, 눈에는 등근 유리알 두 개를 가로지른 안경이란 것을 쓰고 있었다. 한 번은 그 안경이란 것을 써 보았더니 신기하게 온 방이 선명하게 보였으며, 놈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놈은 먼 훗날을 사는 박아무개라 했다. 꿈속에서 시간을 거슬러 온 후손이라 했다. 그때는 이런 미친놈이 있나 싶었지만, 말에 막힘이 없고, 인과가 딱딱 들어맞았다. 할 수 없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점점 놈이 반가워지는 것은 유배당한 처지를 이해해 주는 놈의 정서도 그려하거니와, 거짓일지라도 후대 세상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어 원한과 한스러운 처지를 잊을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가끔 아픈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쓰는 놈이 힘겹기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 여느 때처럼 커다란 백대가리를 숙여 큰절을 한 놈은 누워있던 자신의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


“마마 오늘은 어이하여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또 무슨 험한 꿈을 꾸셨나이까?”

이상하게 생겨, 이상한 복장을 한 후손이란 놈 투명한 목소리에 정겨움이 한껏 묻어 있다. 잔잔한 미소로 내려다보는 놈의 눈은 어두운 방안에서 밝게 빛나는데, 그것은 입으로 내뱉는 걱정과 달리 궁금증에 대한 갈증에 침전된 눈빛이었다.


“그놈의 꿈 이야기는 오늘은 하지 말게나. 눈을 감으면 지난 잔상들이 보이고, 눈을 뜨면 컴컴한 어두움뿐이며, 바닥의 냉기가 마음까지 얼리니 내 지난 추억까지도 모두 얼어버려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네. 이제 그만 허상뿐인 세상의 고리를 놓고 싶은 심정인 것을.”

놈이 지지 않고 대거리하듯 대가리를 주억대며 말했다.


“전하 감히 말씀드리옵나이다. 허상의 세상도 전하의 세상이며, 꿈속의 세상도 전하의 세상이옵니다. 그러하오니 마음에 따라서 극락이 되고, 아귀지옥이 되는 것이니 부디 심기를 편히 하시고, 이제 두려움도 외로움도, 억울함도 회한도 없는 흐르는 물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훨훨 자유로운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보시옵소서! 몸이야 어차피 매인 몸이라지만, 마음까지야 저들이 어찌 하겠나이까. 그리고 이제 그만 전하의 지난 세상을 잊으시고, 백지장을 가슴에 품어 보소서. 그리하여 상상으로 지난 아름다운 광경만 빼곡히 채워 넣으소서! 나중에 하나씩 꺼내어 즐거운 생각만 하시옵소서! 그리하면 심신이 편안해 지고, 몸에 한기가 씻은 듯 낳을 것입니다!”


광해군은 속으로 중얼거리듯 생각했다. ‘놈, 전하란 말을 하지나 말지 제 놈이 할 말은 다해버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향해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던가, 아니면 슬슬 미쳐가라는 말로 들렸다. 전쟁으로 지낸 청년기, 편애하는 아바마마, 열 살 아래의 여인에게 어마마마라 부르며 갓난아이와 왕권을 다투어야 했던 지난 과거는 고사하고, 능양군을 앞세운 반정인물들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무슨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만 해댔다.


놈은 방안을 냉골로 만들어 놓은 달근이 놈은 어디 갔냐면서, 알아서 불을 지필 터이니 조금만 참으라하더니 밖으로 나간다. 놈이 진정 미래에서 온 놈인지, 현세의 미친놈인지 알 수는 없으나, 놈이 이르듯 청바지라는 푸른 천을 기워서 입은 통 좁은 아랫도리에 튀어나온 엉덩이 실룩이며 나가는 모양세가 먼 훗날 역사를 거슬러 왔다는 생각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놈이 나간 뒤 누워서 곰곰이 생각하니 놈의 말이 그리 틀리진 않았다. 그동안 유배온 뒤로 한시도 마음을 조아리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두 다리 쭉 펴고 편안히 잠든 것이 몇 번이던가? 입에 풀칠은 고사하고, 막되 먹은 달근이 놈에게 당한 괄시는 그나마 양반이라, 봄이면 피는 꽃이 서러워 울었고, 가을이면 물들어가는 단풍이 쓸쓸해 울었다. 환갑이 언제 지났던가? 그것마저 가물가물하다. 이제 심신을 편히 하고, 놈 말대로 나름의 하얀 백지장을 가슴에 새로 만들어 한 많은 생의 마무리를 깨끗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방안에 조금씩 온기가 찾아오는 듯 했다. 필시 놈이 몇 남아있지 않은 장작을 마구 지피는 것이 분명했다. 지난번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는데 어느 놈이 이방에 장작불을 피웠냐고 마구 눈을 부라리던 달근이 놈이 또 은근 걱정이었다.


불 지피는 일을 끝낸 놈이 들어왔다. 그리고 작정한 듯 바삭 들어앉으며 지난번 못 다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계속)


1280px-광해군묘.jpeg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광해군과 문성군 유씨의 묘.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을 이야기 한다. 서인세력들이 광해군과 북인세력을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교산(蛟山)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의 호이다. 광해군보다 6년 연상이었으나,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내며 광해군과 친분을 쌓았으며, 둘 다 개혁적, 진보적인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결국 ‘남대문 흉격 사건’과 ‘칠서의 옥’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승려, 서얼들과 역모를 꾸몄다는 판결에 따라 능지처참을 당한다.

보수주인保授主人/ 유배 온 사람의 숙식을 책임지는 현지사람을 부르는 명칭. 그러나 유배자의 일 거수 일 투족을 감시하고, 관아에 보고해야 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달근이란 보수주인은 가공인물이다.


* 광해군 유배지 적소는 현재 제주시 중앙로 제민신협 본점이 있는 자리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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