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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①

동해와 남해, 그 바다의 노래- 약천 남구만

by 박필우입니다

남해군의 진산 망운산은 구름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때는 1679(숙종5년) 지천명에 들어선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유배길이 아니라 유람을 다니리라 생각했다. 특유의 유유자적한 심성도 있었지만, 자신이 고집했던 방자한 윤휴(尹鑴)나 허견(許堅)에 대한 생각은 변함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단 남인이라는 이유만은 분명 아니었다. 특히 허견은 당파 차원을 넘어 묵과할 수 없었다. 남인의 거두이면서 탁류의 영수인 부친 허적의 힘을 등에 업고 황해도에서 수천 그루의 나무를 도벌하여 집을 짓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처를 겁탈하는 등 차마 유학하는 선비로써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아무런 재제도 받지 않고 대명천지를 활보하며 다닌다는 것은 아비의 힘을 믿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윤후는 어떠한가? 비록 문장과 배움은 깊었으나 그 지식과는 달리 행동이 거칠고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으며, 주자학의 권위를 배척하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다양한 학문적 견해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 유가의 도리를 다한다는 소신 있는 상소였으나 도리어 남인들이 득세하고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이곳 남해로 유배되어 온 것이다. 기실 허견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 복선군(福善君)과 내왕이 빈번하자 이참에 청남 윤휴를 함께 묶어서 쳐내려 했으나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잠시 절도안치되어 이곳 남해로 내려온 사연이었다.


사연이 이러하니 유배기간도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 유배라 할지라도 건강과 심신의 고달픔을 재충전 기회를 가지고자 마음먹는다. 그런 만큼 남구만에게는 지금의 유배가 다른 유배객들과는 달리 고통과 원망과 세상에 버림받은 심정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수양의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남구만은 효종, 현종, 숙종대에 걸친 삼조의 대신이다.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처음 서인으로 정계에 입문을 했으나 1679년 함경도관찰사로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북방 변경 수비를 튼튼히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숙종 초 대사성·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5) 좌윤이 되었으며, 그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윤휴·허견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이곳 남해(南海)로 유배된 것이다.


망운산 화방사.JPG 남해군 망운산 화방사




이듬해 경신환국(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해배되어 도승지로 등용, 대제학 대사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게 되지만, 이후 남인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 서인은 강·온 대립의 구도에서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하는 노론과, 다소 온건한 태도를 보인 소론으로 나눠지게 된다. 이때 남구만은 박세채 등과 함께 소장파에 힘을 실어줌으로서 소론의 영수로 자리매김 한다. 사실, 노·소론의 분당은 송시열과 윤선거(尹宣擧)·윤증 부자간에 정치적·학문적, 그리고 개인적인 원(怨)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기도 했다.

때마침 희빈 장씨가 후사가 없던 숙종에게 왕자를 생산하며 숙종의 총애로 안하무인이 되어갔으나, 서인의 막강한 힘을 우려한 왕은 그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영의정 자리에 오른 남구만이 남인을 견제하고자 왕실의 인척들을 공격하는 것을 빌미로 삼아 강릉으로 위리안치 시켜버린다.


그리고 이듬해 기사환국(1689년)이 일어나게 되니 이것은 숙종의 정치적 방식이었다. 물론 장희빈 처리문제와 별도로, 본처를 내쫓고 중인 출신의 여인을 왕후의 자리에 앉히는 것에 신분질서가 엄격한 유교적 지배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사건이라, 이 문제만큼은 서인을 비롯한 일부 남인까지도 반대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초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구만은 남인의 영구몰락을 초래했던 갑술환국(1694년) 때에 영의정으로 재기용된다. 이 사건은 사실 말이야 장희빈의 악랄함을 빙자하여 쫓겨나있던 민씨를 왕후(인현왕후)의 자리에 다시 들이는 것이지만, 득세한 남인들을 제거하고자 환국과 옥사를 이용했던 숙종의 정치형태가 또다시 빛을 발했던 것이다. 이후 장희빈과 그의 아들 세제(훗날의 경종)의 후견인 노릇을 자처했던 남구만 등 온건파와 숙빈 최씨, 김춘택 일파 등 노론은 차제에 남인세력의 비호를 받고 있던 경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공공연히 반대하면서 이들 간 상쟁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중도 개혁파(?)였던 남구만을 위시해 박세당과 윤증, 박세채 등 소론일파는 다소 온건한 입장에 서 있었다. 서인의 갈래인 소론이었지만, 세제가 왕위에 올랐을 때를 생각하여 남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모후인 장희빈에 대한 처리에도 온건한 입장을 취하며 당파를 초월했다. 이것은 세제와 장희빈을 제거하기위해 모진 애를 쓴 노론과 달리, 다음에 올 화란을 미리 방지하고자 했던 남구만의 생각이었다. 경종조에 영잉군(훗날의 영조)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노론에 맞서기도 하였으며, 부처와 파직 등을 겪으며,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파란만장한 정치적 삶을 살게 된다.

*




남해현의 봄날은 보이는 것은 꽃이요, 얼굴을 간질이는 것이 꽃잎이며, 한 점 부는 바람에도 하늘하늘 꽃비가 내렸다. 멀리 청잣빛 바다는 춘심에 젖게 해 시심詩心을 동하게 했다.


한낮 유배객의 몸이었지만 봄을 타는 마음은 막을 수 없었다. 비록 임금의 뜻과 어긋나 절도안치 된 몸이라 해도 임금님 눈 밖에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각 정파를 정권교체에 적절히 이용했던 숙종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했던 자신과 눈빛으로 통하는 것이 있어 예봉을 피하게 한 것이라 약천은 빙긋이 웃을 수 있는 까닭이다.


아침 일찍 적소 노새꾼을 앞세워 길을 떠났다. 언제고 해배되어 권력의 중심에 설 약천이니 남해현령의 느슨한 마음도 한 몫을 했으며, 적소의 이웃들이 흠모하며 따르는 것도 그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연이었다.


민초의 한과 땀방울이 섞인 마늘밭 도맛뜰을 지나 남해현의 진산, 망운산(望雲山)을 향하는 길이니 마음은 이내 바람을 맞는다. 노새를 타거나 힘들 때는 함께 걷거나 하면서 산길을 올랐다. 노새는 기친 기색도 없이 연신 장난을 걸어오지만, 만사가 귀찮은 노새꾼 덕이 놈이 등짝을 후려치니 화가나 당당히 버티고 선 노새의 폼이 관우가 타던 적토마를 닮았다.

“이놈아,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힘들게 오르고 있는 등짝을 후려치면 누가 가만히 있겠느냐? 살살 어루만지면서 너와 한 몸이 되어 걸어야 하는 것을 진정 모른단 말이냐?"

“어찌 짐승과 한 몸이 되라 하시는지요? 제가 비록 비천한 몸이나 짐승에 비유한 것은 잘못입니다요!”

“허허~ 네가 몸으로 한 몸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 마음을 읽어가며 어루만지면 노새도 네 마음을 알고 잘 따를 것이라는 말이다. 만약 내가 네 등짝을 후려치면 너는 기분이 좋겠느냐? 무릇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든 자연 생물과의 관계에서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때서야 덕이 놈은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노새의 목을 어루만지며, 욕을 섞어 달래자 노새는 마지못해 끌려간다.

“가자 망할 짐승아. 네 덕에 나만 혼이 나는구나!”

“허허~ 그놈 참!”


그렇게 얼마를 올랐을까? 벚나무가 산을 이루고, 참꽃이 만발하며, 작은 오솔길엔 이름 모를 야생화가 지천으로 반겼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망운산 중턱에 다다르자 운무에 휩싸이며 바람이 심하게 불어왔다. 변덕인가?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의 오묘한 이치와 순종하는 삶을 학습하란 뜻인지 알 수 없어 가슴을 쓸어내린다.


진정 극락이 있다면 이 길이 극락으로 가는 초입이렷다. 풍경은 가히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같았으며, 추상같이 내뱉었던 지난 젊은 날 자신 같았다. 불의에 눈감지 않았으며, 정의에 몸을 사리지 않았지만, 현실 정치란 용기와 덕만으로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실천과 용기 없는 지식이란 꼭 필요할 때 쓰이는 것 보다, 사악한 마음을 요동시키는 요인으로 작용을 하며, 백성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벽지고 외진 곳에서 만난 촌부의 마음 씀씀이가 세상에 더욱 유익한 것을 이곳 남해로 유배된 후부터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사색에 잠겨 바람에 떨어진 꽃잎을 즈려밟고 망운산 정상에 다다르자 가히 그 모습은 남해의 진산, ‘발아래 구름을 내려다본다.’는 망운산(望雲山)이다. 하늘아래 진산이요, 발아래 구름이라, 안개는 바람을 몰아 계곡을 타고 오르며 습기를 뿌린다. 가히 이름 하나가 자신을 달랜다. 한 줄기 바람은 땀에 얼룩진 얼굴에시 감겨온다 문득 성글은 바람이 불어 사타구니가 서늘해져 사대부 마음이 기묘하다.


거칠고 사나운 바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운무는 햇살에 시나브로 사라지고, 멀리 바다와 아기자기한 섬들이 정겹게 앞으로 다가왔다. 산과 바위와 바다와 섬들이 한 몸을 이루고, 선계에 노니는 신선이 되어 먼 곳을 조망한다. 고개를 돌려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듬직한 민족의 혼이 깃든 지리산을 구름이 허리를 감아 나를 넘고 가라한다. 지리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각 정파들에 둘러싸여 고뇌와 힘겨움에 밤과 낮을 지새우고 계시는 상감의 용안이 어른거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서 빨리 해배되어 정직한 신하로써 목숨을 다할 것을 맹세하지만, 애써 자신을 유유자적 달래 왔던 겉모습과는 달리 지금껏 참아왔던 서글픔이 밀려왔다.




‘제영등망운산’

넝쿨을 휘어잡고 바위를 기어올라 산정에 오르니

과연 망운이란 이름이 잘 붙여졌음을 알겠구나

백성들이 성은을 입어 요나라 백성처럼 행복하니

천한 이 몸도 고향땅이 그리워지는구나.

마음은 구름을 타고 고향하늘을 맴도니

금성의 일타홍이 그립구나.

끝없는 바다의 섬 그림자 아롱진데

이 몸 언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려나.


약천은 즉석에서 노래를 읊었다. 이 마음은 어서 유배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시인의 심정과 유배의 인연으로 오게 된 망운산 아래 남해현의 민초들이 행복하기를 기리는 나라의 참된 신하 모습이었다. (계속)



허견許堅/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허적許積의 서자.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으로 능지처참 당했으며, 아버지 허적 또한 죽임을 당했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손자

청남과 탁남/ 남인은 정치적 보수 기득권 세력의 허적, 권대운 등 탁남과, 미수 허목, 윤휴 등의 사림의 청망이 높은 청남으로 갈리게 된다.

김춘택金春澤, 1670~1717/ 김만중의 형 김만기의 손자. 평생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나, 노론으로 인현왕후 민비의 복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며, 당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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