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②
동해와 남해, 그 바다의 노래- 약천 남구만
동해와 남해, 그 바다의 노래- 약천 남구만* 망운산
약천 남구만은 반대편 고개 넘어 산등길을 걷는다. 고개 넘어 천년고찰 화방사에 가기위해서다. 노새에게 물과 먹이를 먹이라 이르고, 덕이 놈 또한 가져온 약밥과 물로 시원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게 했다. 물론 덕이 놈이 노새를 괴롭히지 못하게 단단히 타일렀으나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다.
“이놈, 나 없는 사이 또 노새랑 쌈빡질 했다간 요절을 낼 줄 알라!”
화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근거지였으니 그 여파로 불에 탄 것은 인조 때 중창불사를 하고, 한때 서산대사의 계를 이어받은 계원의 제자 가직(嘉直)선사가 주석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자신보다 몇 년 아래인 문안과 응삼 두 승려가 불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처음 남해로 유배되었을 때 현령의 소개로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두 스님과는 뜻과 마음이 통하는 사이기도 했다.
*
약천은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섰으나 오늘의 절집은 유독 정적이 흐른다. 간혹 산새소리 귓전에서 노래하고, 뒤편에 홍매화가 늦은 꽃에 안간힘을 쏟아내며 흩날리고 있었다. 적당한 터에 정면 다섯 칸의 채진루가 조용히 반겼으며, 단촐한 응진전이 부처의 말씀을 경청하듯 조용하다. 이때였다. 손에는 자신의 손보다 너덧 배나 큰 목탁을 움켜쥔 어린 사미승이 엉거주춤 합장을 하며 외로운 객을 받는다. 열 살은 넘어 보였으나 키가 다소 큰 것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두 분 스님께서 어디 계신가요?”
“예, 아침 일찍 산 아래 탁발을 나가셨습니다. 어디서 오신 처사님이신지요?”
“허허~ 이 낭패로구나! 내 그동안 뵙지 못해 안달이나 이리 산길을 올랐거늘 이리도 박자가 맞지 않는단 말이냐! 두 분다 함께 탁발을 할 정도로 절집살림이 어렵지 않을 터인데.”
“탁발이야 수도의 일환인데 하루인들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약천은 또랑또랑한 동자승의 입에서 '수도' 운운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탁발도 수도의 일환인데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이더냐?”
그러나 약천의 물음에 아무 답도 없이 조용하던 산사山寺에 불쑥 찾아온 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약천은 재촉하듯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돌아온 답은 딴판이었다.
“점심 공양 때가 넘었으나 보아하니 아직 공양전인 것 같습니다. 선비님께서는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 말에 약천은 ‘아, 요 녀석 봐라? 자신의 뱃가죽이 등짝에 붙은 지 오래인 것을 어찌 알았을까?’ 하며 너털웃음으로 답을 대신해 버렸다. 하긴 벌써 미시未時① 가 되어 허기가 올 때도 된 것이다.
“스님께서 이몸에게 공양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이리로 오시지요.”
하며 앞장서서 작은 요사채로 안내를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방문을 열어놓고 화사한 꽃들이 피어있는 바깥풍경을 감상하며 있노라니 늙은 공양주 보살이 작은 소반에 된장국과 산에서 나는 봄나물 무침 몇을 올려서 가져왔다. 그 뒤로는 조금 전에 보았던 사미승이 물 대접을 들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약천은 합장을 하며 받았고, 뒤이어 따라 들어온 사미승은 약천과 상을 놓고 마주앉았다. 그 모습에는 어딘가 어엿함이 엿보였다. 약천의 궁금증은 더해갔다. 그러나 먼저 주린 배부터 달래야 했다.
“함께 공양을 하시지 않으시련?”
약천이 혼자 밥숟가락을 가져가기가 뭐해서 물었으나 조금 전에 했다며 어서 드시라고 재촉을 했다. 그제야 약천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담백한 절밥에 향내가 묻어있었다. 한 끼의 공양에도 전생과 이승의 인연이 있는 듯 경건함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채우고 물까지 마시고는 상을 물렸다. 그때 지켜보던 사미승은 당찬 질문을 해 왔다.
“선비님께서는 보아하니 공자와 성리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몸에 밴 듯 보입니다만 어찌하여 경시하는 절집을 찾은 것입니까?”
“허허~ 스님 눈에 그렇게 보입니까?”
“그렇지 않고요! 옷깃에 먹물이 묻어있으며, 두건에 먹향이 진하게 풍기니, ‘내가 냅네 ~’ 하는 지적(知的) 자만의 채취가 묻어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낭패가 있나? 한 끼 공양에 한 갑자의 공력을 들여야 한다더니, 이런 내가 지금 그런가 보구나! 인간이란 배움을 떠나서 어찌 하늘의 이치를 깨달을 것이며, 땅의 순리를 알게 될 것인가? 무릇 배움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이루어져야하는 인간의 본인데, 불교 또한 그 가르침이 그러하니 세상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비록 나쁘게 말하자면 종교란 미래를 팔고, 희망을 팔아 존속하는 집단이지만 그것을 어찌 나쁘게만 보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에 인간이 착하게 살아가도록 교화의 말씀이 들어있어 다들 따르는 것이 아닌지요. 다만 나는 주자의 말씀을 따르며, 세상의 이치와 하늘의 이치를 조화롭게 공존해 진리를 실세상의 정치에 접목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선사님들을 뵈러 온 이유인 것이지요.”
약천은 당돌한 물음에 어찌 대답해야할지 몰라 앞뒤 구분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이어갔다.
“지성적 경건함을 강조하는 성리학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지내는 까닭이 여러 장점만 취득하여 공부하고자 하는 선비님의 생각과 동일한 것입니까?”
남해 망운산
이 말이 진정 저 작은 사미승의 입에서 나온 말이던가? 약천은 귀를 의심했다. 대답을 재촉하듯 빤히 얼굴을 올려다보는 동자승에게 거부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그래, 참 곤혹한 질문이시구나! 내가 여러 학문을 습득하는 것은 아니나, 불가의 가르침은 참으로 유익한 것이며, 제사를 모신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으로써 나의 몸을 있게 해준 부모님께 인륜의 도리를 다한 다는 것인데, 어찌 그 의식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님도 사후세계에 대해서 묻는 제자에게 ‘내일의 이치도 모르는 것인데 어찌 죽은 뒤의 일을 알 수 있겠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상님께 제를 올리는 것은 귀신, 즉 영혼이 있다는 가정 하에서 치르는 의식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유교나 주자학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요?”
“진정으로 내 오늘의 점심공양 한 끼에 정신을 잃게 생겼습니다! 귀신관은 무속의 기본사상인데, 유교란 그러한 기복과 전설 사유체계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은 맞는 말이나, 이것이 유학의 출발 논리라면 처음부터 있어왔던 무속적인 요인을 유교문화에 자연스레 접목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사미승은 약천의 대답에 양이 차지 않았다.
“인간의 희망과 종교적 열정이랄까? 그것은 모두 생략한 채 사회문제에만 치중한 것이 유학이나 주자가 아닐는지요? 사람이란 불로장생은 아니더라도, 건강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을 무시한 것이 일부 양반계층만이 향유하는 논리가 아닙니까?”
사미승에게 핀잔에 가까운 말을 듣자 약천은 열이 올랐다. 요놈에게 오늘 본때를 보여주리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며 몸가짐을 새로이 했다.
“지금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도가의 논리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희망과 종교적 열정이 도교의 형태로 변질된 것인데 ‘사문난적’②의 학문에 심하게 심취한 모양입니다?”
어린 사미승도 지지 않았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심은 선비님께서 남인인 윤휴 선생을 일러 그렇게 타박을 하시지 않습니까? 다만 학자로서 다양한 학문적 개방과 배움에 대한 지적호기심 외에는 그 무엇이 없을 것인데, 유독 송시열 선생께서 적으로 삼자 그 또한 패거리에 함몰되어 함께 난도질 하시는 원인이 아닌지요? 또 선생님께서는 박세당③ 선생님을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스님께서는 윤휴와 박세당까지 알고계십니다. 허허, 윤휴야 학문적 세계에 대해선 나누어야 할 일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제매이기도한 박세당 선생은 반항아적 삶으로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니 참 답답한 인사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학문적 이단은 끝이 없는데, 다만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높이사줄 것입니다. 또한 <사변록>을 지어 유학은 물론 노장사상과 심지어 양명학까지 접목하여 수많은 사상이 순환되게 한 것은 이 필부 같은 존재야 존경보다는 용기가 부러울 뿐입니다. 분명 그 일로 인하여 후일에 사단일 벌어질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훗날 박세당은 노론과의 한판 승부에서 숙종이 노론편을 들어 완전히 사문난적으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러나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은 이 일을 두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대개 죄를 주려는 까닭은 백헌 비문에 있는데
핑계는 <사변록>을 들고 나오니, 이것이야말로
“뜻은 동쪽에 두고, 말은 서쪽에 있다.”는 것으로서
마음과 말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약천집, 권29>―
박세당을 응징하여 자신들이 추증하는 학문과 자신들의 정당성을 우위에 놓으려는 노론의 의도가 빤히 보이는 것을 빗대어 노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야 이 일은 훗날의 일이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미승이 대화를 이어갔다.
“하늘의 뜻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어, 그것이 사회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도가나 유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어린 스님께서 참 많이도 알고 계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 사상에 입각한 세계관은 유가나 도가 모두 그대로 공유하고 있지만, 다만 그것을 인간의 원초적 문제, ‘인생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늘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 등등 개인적 욕망의 열정이 변질되어 재야사상으로 뿌리내린 것이 도가라면, <대학>이나 <중용>같이 하늘의 뜻과 인간의 내면세계가 사회규범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가 하나의 원리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세상의 질서와 원리에 인용하여 구체화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정치라 할 수 있지요!”
“역시 제 기대가 맞았습니다! 하지만 사회 문제에만 너무 치중한다는 것이 유가나 주자를 정치사회적 철학의 원리로 삼으시는 사대부가의 단점이 아닌지요?”
“허허~ 스님께서는 끝까지 그것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십니다. 정치란 하늘의 뜻과 역사가 같은 뜻이라는 ‘천인상관설’을 조화시켜 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유독 유가와 주자에 대해서만 집요하게 원칙을 고수하시려는 것은 다만 자신의 학문적 아집을 굽히지 않으려다 보니 다른 학문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부치게 되는 원인이 아닌지요? 특히 지식이야 그 깊이가 무한하지만 인자함이나 넓은 도량이 부족한 송시열 같으신 분 말입니다. 특유의 흑백논리가 사실 가장 오류를 많이 범할 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송시열의 ‘주자가 옳으냐, 박세당이 옳으냐?’ 이런 대화를 두고 하신 말씀이십니다. 그것이 사실 그분의 맹점이라 할 수 있으며, 젊은 신진사류들이 박세채나 윤증을 따르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때였다. 탁발을 나갔던 문안스님이 돌아왔다. 약천은 문안의 모습을 보자 유난히 반가워했다. 그것은 어린 사미승의 집요한 물음을 그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셨습니까. 선비님 얼굴을 뵈오니 우리 스님께서 또 선비님을 괴롭혀 드린 모양이지요?”
문안의 말에는 사미승에게 잡혀 애를 먹은 선비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약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안과 반갑게 합장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에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문득 혼자 두고 온 덕이놈이 생각나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은 스님 대신 우리 어린스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얼굴이라도 뵙고 가니 서운함이 덜합니다만 다음에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가시려 하십니까? 이 빈승에게는 남는 것이 세월이요, 시간인데 그리 급하게 서두르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 나귀와 덕이놈을 산 위에 올려놓아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곤 어린 사미승을 향해 합장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내 오늘 스님을 만나 세상의 도리와 이치를 좀 더 깊게 생각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또한 학문을 함에 있어 편견과 편율된 마음을 버리고 좀 더 넓은 이유를 찾아 생각하며 깨달아 가도록 힘을 쓸 것입니다. 오늘 참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묘한 미소로 화답한 사미승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합장을 했다. 그리고 못내 서운해 하는 문안의 배웅을 받으며 왔던 산길을 다시 올라갔다.
*
적소로 돌아온 약천은 어린 사미승의 얼굴이 아른거려 몇 날을 그날 이어갔던 대화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문안스님 방문을 받게 되었는데, 대화 도중에 사미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법명은 효정(曉淨)이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는 의문의 아이었다. 또한 지금은 금산(錦山)의 보리암에 들어가 잠시 수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약천은 어린 사미승이 궁금했다.
다음 날 아침 그 사미승을 만나기 위해 적소를 떠나 금산으로 향했다. 떨어진 꽃가지엔 파릇파릇 푸른 잎들이 자연의 생기를 밝혀주고, 편백나무 숲 향기는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었다. 더불어 시원한 바람이 불어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주었다. 이처럼 여유로운 자신이 지난날 주자학의 질서라는 미명아래 고변과 상소로 대궐을 시끄럽게 했던 날들을 되돌아보게 된 사연이었다.
얼마를 올랐을까? 쌍홍문을 지나고, 장군봉을 넘어서 보리암 삼층석탑 앞에 서니 멀리 상주의 바다가 보이고, 구름이 하늘에 걸쳐 긴 띠를 형성하고 있다. 봄날의 햇살과 바다와 하늘과 구름이 장관을 이룬다. 진정 깨달음은 이렇게 찾아오는 것인가? 한 점 티끌이 되어 연약한 들풀 같은 자신을 무엇이 있어 그리 많은 욕심으로 채우려 했는지 지난날의 행동과 생각들이 덧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보리암의 관음전에 들어 관음보살을 배알하고, 유학을 신봉하는 당대의 학자였지만 삼배를 드렸다. 인간사 지혜로 이끌며 믿음을 가지라는 관음보살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불당 안 닫집에는 부처님의 세상은 이러이러하다며 지극한 눈으로 굽어보는 보살상에 악전고투의 세상사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한 참을 앉아 명상에 잠기다 밖으로 나오니 관음전 쪽마루에 다소곳 앉아 찻상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사미승이 반갑다. 둘은 오랜 지기처럼 환하게 합장하며 해후하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며 그렇게 앉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말을 함으로써 통하는 마음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것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줍게 표현 한다는 것도 감동을 반감시키니 진정 침묵으로 일관하게 된 까닭이다. 그렇게 둘은 은은한 차를 나누며 한 시진을 그렇게 보냈다.
이후 자리에서 일어나 금산 정상의 봉수대에 오르고, 멀리 다도해를 바라보며 작은 점이 되어버린 조각배의 지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량한 기운에 마음까지 청량해 지는 까닭이요, 파란 바다가 눈을 맑게 하니 내 마음이 맑아지는 까닭이며, 기암괴석의 산세에 호연지기를 느끼게 되니 장부의 용기와 희망이 새롭게 꿈틀거리며 되살아나는 까닭이었다.
남해 금산
약천은 금산을 이렇게 노래한다.
‘제영등금산’
산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으니
진경에 당도하여 시정마저 잃겠구나.
심산유곡에 있는 암자 구름과 같이 자고
봉화만 타오르니 반달같이 외롭구나.
석굴에는 음률이 흘러나오고
암문에는 박쥐와 왕벌들이 엉켰네.
몇 년을 두고 이 구정을 쪼았으랴
산정에는 염주를 꿰맨 듯 기암괴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렸구나.
약천에게 남해의 산은 모두 바다에 떠 있었다. 금산에 오르나 시를 쓰지도 못할 만큼 경치에 취하고 말았다. 보리암, 정상 봉수대, 음성굴, 용굴, 쌍홍문, 구정암을 비롯한 기암괴석에 이렇게 경탄했다.
이때 노래를 음미하던 사미승이 침묵을 깼다.
“이제 대궐로 다시 돌아가시게 된다면 젊은 인재들을 중시여기며, 개혁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희노(喜怒)가 변죽을 끓는 임금님에 의해 또 한 번 유배되어 가시더라도 희망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특히 보수 기득권의 세력에 당당히 맞서 올곧은 말씀으로 성토하시고, 부디 여린 민초들을 생각하여 권력에 연연한 모습을 보이지 마십시오. 그리하시면 자연과 벗을 삼고, 후대에 이르러도 칭송이 자자한데 생에 있어 무슨 미련이 남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만 있던 약천은 고개를 돌려 사미승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은 조금 전 법당에서 뵈었던 관음보살 모습과 닮아 있다. 약천의 가슴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였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미승의 손을 잡고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내 비록 배움이 모자라지만 권력과 자리에 결단코 연연하지 않으리라. 또한 부와 명성이란 헛되고 헛됨을 이곳에서 알았으니, 그 깨달음이야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겠노라! 좌절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당당히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대변하리라!”
*
그랬다. 남구만은 울릉도와 독도에 혼을 심은 안용복을 사형시키라는 조정의 한심한 판결에 당당히 반대하며, 그를 변호해 살렸다. 또한 녹도만호④ 였던 이대원의 억울한 죽음에 직접 신도비를 지어 안타까워했다.
이듬해 경신환국(1680)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해배되어 도승지로 등용되고, 부제학,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오른다. 한때 김익훈, 즉 김만기(훈련대장)의 삼촌이자 김장생의 손자였던 그가 어영대장으로 있으면서 김훈 등을 역모로 모는 사건이 있었다. 결국 무고로 밝혀지자, 그의 처벌을 주장하는 남인과 소론 등에 맛선 송시열은 자신의 스승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로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남구만 박세채 등은 소장파를 주도하며 송시열을 공격하기도 했다. 즉 송시열은 남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었으나, 약천은 선과 악의 구분에 당파를 초월하였
다.
송시열이 사약을 받게 되는 기사환국(1689)으로 강릉으로 유배되고, 또다시 갑술옥사(1694) 때 서인이 집권하자 영의정에 재기용된다. 유배지 지금의 동해시 약천마을에서 유명한 시조<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지방자치단체에서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러나 권농가로만 보기엔 당쟁에 날을 보냈던 숙종 당대를 생각하면 단순히 그렇게만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부처와 파직을 되풀이 하며, 자신의 정치철학에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궐을 하지 않고, 아차산 약수암이나, 광나루의 별서에 칩거하기를 반복했다고 하며, 지나친 상소로 숙종의 진노를 사서 경흥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의 고집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나 1711년 세상과의 이별을 고했다.
질곡의 역사 중심에 서있었던 노 정객을 그렇게 사라져 갔다. 필자는 그의 시조를 대할 때마다 머릿속에는 남해의 가천 다랭이 마을의 층층 논이 떠오른다. 약천에게 있어 몸은 동해에 있었지만, 마음 깊은 한 구석에는 남해의 유배시절이 떠올랐던 것은 아닐까? ♠
東方明否동방명부 / 동방이 밝았느냐
鸕鴣已鳴로고이명 / 노고지리 우지진다
飯牛兒胡爲眠在房반우아호위면재방/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山外有田壟畝闊산외유전롱무활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今猶不起何時耕금유불기하시경 / 언제 갈려 하느니.
-번방곡飜方曲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① 미시/ 하루를 십이시로 나눈 것 중. 오후 1시~2시. 계절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② 사문난적斯文亂賊/ 주자학적 사고로 주자학을 벗어나 학문을 문란하게 만든 도적이란 뜻이다. 즉 인간적 말살을 뜻했으며, 학문의 폐기를 뜻했다.
③ 박세당朴世堂, 1629~1703/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서계西溪이다. <금오신화>를 지은 김시습을 매우 존경했다. 그와 비슷한 주변인으로 두루 여러 학문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송시열을 논박하는 제문을 짓기도 하였으나 결국, 박세당이 지은 <사변록思辨錄>은 송시열 사후 그의 제자들과의 한 판 승부에서 숙종에 의해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처음 젊어서 관직에 나갔으나 정치적 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은 후 여러 번 출사의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시골에 박혀 농사와 학문에만 몰두했다.
④ 녹도만호 이대원李大源, 1566~1587/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 배 20여 척을 파괴하고, 적장까지 사로잡아 좌수사 심암에게 바쳤으나, 그의 전공을 빼앗으려는 심암의 계략에 걸려 고흥 손죽도 해상에서 왜구에게 사로잡혀 죽고 만다. 남구만이 쓴 신도비문에는 '적들이 공을 돛대에 묶어 놓고 때렸으나 죽는 순간까지 꾸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뒤늦게 죄상이 들통 나 심암은 처형되고 이대원이 좌수사를 임명받았지만 이미 그는 죽은 후였다.
⑤ 번방곡飜方曲/ 우리나라 노랫말을 한문으로 번역을 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