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실크로드(Silk Road), 이 얼마나 설레는 말이더냐!

by 박필우입니다


실크로드(Silk Road), 이 얼마나 설레는 말이더냐!


이상은 꿈꾸는 자의 몫이다. 인류 이래 인간의 꿈은 단 한 번도 고여 있지 않았다. 이상은 도전을 낳는다. 도전은 새로운 꿈으로 탄생해 너머의 세상에 대한 동경이 인류문화와 역사를 창조해 왔다. 험준한 산맥도, 메마르고 황량한 죽음의 사막도 막지 못했다. 험하고 거친 만큼 더욱 찬란한 문명이 잉태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길에서 만들어졌다. 그 길은 역사 속에 묻혀버린 단절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장대한 길이며, 역사와 문화, 겨레와 겨레,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화합의 메신저다. 실크로드란,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다. 문화는 전파와 소통이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문명이란 자생적 혹은 모방적인 탄생과 동시에 이동하며 전파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과정이 확장되면서 실크로드가 만들어졌다. 그 기능이 오랜 숙성과 수정의 다양한 단계를 거쳐 동서로 혹은 남북으로 끊임없이 살아 숨 쉬며 이어졌다.


그런 까닭에 실크로드는 인류 문명의 선구자적 자취가 담긴 길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세상을 넓혀 나에서 우리로 확장시켜 겨레의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한 길이다. 동방의 불빛을 따라, 혹은 서방의 이상을 갈망하며 허기를 채웠다. 더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메마른 사막을 지나 황량한 벌판을 내달려 지옥의 산맥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안겨주었다. 구도자가 묵묵히 법法을 구하기 위해 걸었던 길이며, 혹은 더 넓고 새로운 시장개척을 위해, 때론 정복이라는 명목으로, 제국주의의 촉수 선교란 핑계로, 새로운 시장개척과 값싼 원료를 구하고자 식민지 개척이란 욕망으로, 개화란 미명으로 파괴와 폭력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문명의 전파를 동반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연결 단초를 제공하는 전인미답의 쾌거로 이루어진 결과임은 분명하다.



박필우_ 쿠무타크 일출.jpg 쿰타쿠사막 일출




실크로드란 말은 대략 140여 년 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1905)이 1869에서 1872년까지 중국각지를 답사하고, 1877년부터 『중국』(China)이란 책 5권을 저술하게 된다. 그는 이 책 제1권의 후반부에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시르강(Syr)과 아무강(Amu) 두 강 사이에 있는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e) 지역과 서북인도로 수출되는 주요 물품이 비단(silk)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센’((Seiden strassen : Seiden=비단, strassen=길, 영어로 Silk Road)이라고 명명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실크로드란 원래 중국 비단이 유럽으로 수출되는 길에서 연유되어 생긴 말이었다. 차츰 그 개념이 확대되면서 하나의 상징적인 아칭雅稱으로 변했다. 사실상 초원로나 해로海路는 물론, 오아시스로(사막)도 그 길을 따라 비단이 교류품의 주종으로 오고간 것은 역사상 짧은 기간이었을 뿐, 여러 가지 교역품이나 문물이 오랫동안 교류되었다. 다만 비단이 로마제국(특히 말엽)에서 큰 인기를 모은 진귀품으로서 이름이 정착된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실크로드는 유럽 중심주의 문명사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란 이름이 시종 존속되어온 것은 바로 그 상징성 때문이다.


문명의 탄생은 교통의 발달과 불가분 관계에 있다. 교통의 후진은 문명의 고립(후진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는 실크로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고대 오리엔트문명, 황허문명, 인더스문명, 그리스·로마, 스키타이, 불교, 페르시아, 이슬람 등 동서고금을 망라한 전 문명이 모두 실크로드를 동맥으로 하여 싹트기 시작했으며, 이 길을 이어서 꽃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사 역시 마찬가지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전한의 한무제, 당태종, 그리고 이슬람의 칼리파들과 몽골제국의 칭기스칸, 티무르 등 영웅호걸들이 이 길을 통해 역사의 지휘봉을 휘둘렀다.


또 있다. 실크로드는 한민족의 위상을 드높인 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인이라 불리는 계림(신라 경주) 출신의 혜초慧超(704~787)도 빼 놓을 수 없다. 신라 승려 혜초는 구법자求法者의 길을 걸었다. 외롭고 힘든 구법행로를 살펴보면 우연히도 오늘날 실크로드에 해당하는 핵심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죽음의 사막도, 험준한 산맥도 막지 못했다. 동양에서 혜초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선구적 세계인이자, 동양의 걸출한 세계인이었다. 8세기 전반에 동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해로와 오아시스로를 거쳐 인도와 페르시아까지 다녀와 현지 견문록인 『왕오천축국전』(Memoir of the Pilgrimage to the Five Regions of India)을 남겼다. 이 명저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The Description of the World)보다 약 550년 앞서 저술된 세계적 여행기로서 인류 공동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실크로드 중 523.jpg 중국 장이예 칠채산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차가운 바람은 땅이 갈라지듯 매섭다.

넓은 바다마저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물은 벼랑을 깎아만 간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얼어 끊기고 말았으며

우물 가장자리도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불을 들고 땅 끝에 오르며 노래 부르지만

어떻게 저 파밀고원을 넘을 수 있을까.



위의 시는 겨울 어느 날 ‘토화라’라는 나라에서 눈을 만난 소회를 오언시五言詩로 읊은 것이다.

특히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고구려의 후예인 당나라 장수 고선지高仙芝가 바로 그다. 오아시스로의 가장 험난한 구간인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넘나들면서 11년간(740~751년) 5차례나 단행한 서정西征은 세계 전쟁사에 전례 없는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원정에 의한 제지술의 세계적 전파와 중앙아시아 보물의 유입은 중세 문명교류사에 불후의 업적이다. 뼈아픈 현실이지만, 근세에 와서 러시아 이주 한국인들에 의한 벼농사의 중앙아시아 전파는 오아시스로를 통해 한민족이 이루어낸 또 하나의 세계사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크로드가 과연 이스탄불, 혹은 로마에서 시작되어 중국 시안西安이 종착지라는 통념은 정설일까. 실크로드의 개념이나 그 문명교류사적 의미에서 한반도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이 길의 한반도 연장 문제다. 지금까지의 통설에 의하면 구대륙 내에서 전개된 실크로드의 동단(東端)은 일괄해서 중국이다. 즉 초원로는 화북華北이고, 오아시스로는 장안長安(현 시안西安)이며, 해로는 중국 동남해안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서역이나 북방계의 유물들, 그리고 내외의 관련 문헌 기록들은 일찍부터 한반도가 외부 세계와 문물을 교류하고 인적 왕래가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 교류와 왕래는 틀림없이 한반도로 이어진 길,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여러 가지 유물과 기록에 의해 실크로드 3대 간선인 초원로와 오아시스로, 해로의 동단東段은 각각 중국에서 멎은 것이 아니라 한반도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고대에는 우리나라를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나라, 풍족하고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했다. 그들이 동경하는 이상세계 동방의 불빛을 따라 벌판과 사막을 지나 한반도 신라(경주)까지 찾아왔다. 이처럼 우리 선조의 정신과 문화는 세상을 훤히 비추고 보석처럼 빛났지만, 그것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풍부한 물산과 앞선 문화의 바탕 위에 서방의 문화를 수용해 우리 민족 특유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새롭게 서방세계에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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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중 1078.jpg
중국 시안 병마용갱과 칭하이성 문원 백리화해



먼 옛날 바이칼을 중심으로 한 북방 초원지대에서 시원始原한 일군의 조상이 초원실크로드를 따라 아래로 남하를 거듭하다 한반도에 정착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북방계 여러 민족과 체질인류학적 및 문화적 상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 종족별 DNA 분석 자료에 의하면 바이칼 주변의 야쿠트인·부랴트인·아메리카의 인디언, 그리고 한국인의 DNA가 거의 같다는 학계의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한국 무속의 원류는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이며, 이들 북방계 민족들과 한국인은 동물을 시조로 삼는 ‘수조獸祖 전승’까지도 신통하게 같다. 이것이 초원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진 한민족의 북방계 뿌리라면, 해상실크로드를 통한 남방계 뿌리도 그 단서를 찾아보게 된다. 한반도의 거석문화나 농경문화는 태양과 거석을 기리는 양석陽石 문화인 남방 해양문화와 인연이 닿아 있으며, 남인도의 타밀어와 한국어와의 상당한 친연성은 분명 바닷길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경주 괘릉(원성왕릉) 서역 무인석

실크로드는 또한 한반도와 세계를 소통시킨 길이다. 선사시대에 벌써 한반도와 북방 유라시아 사이에는 빗살무늬토기대(帶)가 이루어졌으며,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는 알타이를 중심으로 동서에 형성된 찬란한 황금문화대의 동단(東端)에서 ‘금관의 나라’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길을 타고 그리스-로마문화의 상징인 비천상(飛天像)이나 다채장식기법(多彩裝飾技法, Polychrome), 각종 유리그릇과 뿔잔(각배角杯)이 한반도에 들어왔으며, 중세 아랍 상인들은 신라로부터 11종의 물품을 수입하였다.


또한 석류나 대칭문양, 마상격구(Polo) 같은 페르시아 고유의 문화도 한반도에 전해졌다.

서역인의 한반도 정착을 시사하는 심목고비(深目高鼻)의 무인석상과 토용(土俑)도 이 길을 통한 인적 왕래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2000여 년 전에 해로를 통하여 인도 아유타국 공주와 가락국 김수로왕 간의 첫 국제결혼이 성혼되었으며, 7세기 중엽 초원길을 거쳐 고구려 사절이 멀리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까지 사행(使行)한 바가 있다.


짧게 추가하자면, 서라벌에 유행했던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 역시 서역인이라 생각된다.




* 참조 : 정수일, '실크로드사전', 2013. 10. 31., 경상북도

박필우, '경상북도 실크로드 프로젝트 백서', 2013. 12. 13., 경상북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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