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140여년 전

‘300:제국의 부활’, 3차 원정에서 종지부를 찍다

by 박필우입니다

▲ 비밀병기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는 그리스 해군



‘300:제국의 부활’, 3차 원정에서 종지부를 찍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성문을 활짝 열고 항복한 페세르폴리스를 그토록 처절하게 파괴한 원인은 140여년 전에 있었던 크레르크세스 1세의 아테네 침략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기원전 480년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리스 2차 원정에도 실패한 다리우스 1세는 전쟁이 끝나고 만 3년이 넘어서 그리스 원정이라는 원대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한을 남기고 죽는다. 그의 뒤를 이어 아케메네스 왕조 제왕에 오른 크세르크세스 1세(Xerxses) 는 일생의 숙원이었던 아버지 다리우스 1세의 유언을 잊지 않았다. 2차 원정 후 10년이 지난 기원전 480년 봄이 되자 3차 원정에 나선다.

그리스 역시 페르시아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헬레네 동맹을 맺은 이들은 군대를 재정비하고, 해군을 양성하는가 하면, 아테네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이때 빠르고 강력한 3단 노선 380여 척도 준비되어 있었다. 새롭게 개발한 이 그리스 함선은 높고 단단하게 철로 덧댄 뱃머리로 적 함선을 향해 돌진해 침몰시키는데 유용했다.


페르시아군대가 테살로니키로 내려오자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육군은 좁은 협곡 테르모필레를 택해 이들을 맞았다. 그리스 주력 해군이 에우보이아 섬 최북단 아르테미시온만에 정박해 있었고,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130여km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곳을 사수해야 했다.


스파르타군 300명을 비롯해 7천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이 포진된 테르모필레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6일 동안 치열하게 이어졌다. 2014년 노암 머로 감독의 영화 ‘300:제국의 부활’의 무대가 되는 전투다. 죽고 죽이는 상호간 치열하게 전개되던 개전 7일째 되던 날, 영화에서처럼 배신자 에피알데스가 등장한다. 그의 안내로 샛길을 통해 빠져나온 페르시아 군이 스파르타 배후를 공격하면서 전세는 페르시아 편으로 기울고, 결국 스파르타군은 전멸 당한다.


헐리웃 영화 ‘300’에서 크세르크세스는 마치 흑인에 수염도 기르지 않은 채 금장을 두른 인간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페르시아 정예군인 이모탈을 마치 악마의 탈을 쓴 것처럼 표현하면서 야만인으로 그렸다. 이란인들은 하찮은 삼류 만화가 영화화 된 것에 분노보다 씁쓸하게 웃었다. 꼽추에다 괴물처럼 등장하는 배신자 에피알데스가 그리스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그가 병력을 나눠 배치한 덕분에 1천여 명의 병사만 희생되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지연시킨 덕분에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패전한 그리스 해군이 에보이아 섬과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퇴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사상 최대 1천2백 척의 함대를 포함해 군사 16만~20만 명의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의 여세를 몰아 북부 그리스 도시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해 9월이 되면서 아키타반도를 점령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침략해 처절하게 약탈한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신전을 파괴한 것도 이때였다.


한편 그리스 함대는 그리스 역사상 반전의 기회가 된 유명한 해전 살라미스로 향했다. 남은 것이라곤 그리스 함대뿐이었고, 정면 돌파보다 유인책으로 적의 함대를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인다면 승부를 걸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테네의 이순신 쯤 되는 살라미스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다. 그는 정적이자 마라톤 전투 영웅 밀티아데스가 죽자 해군 증강에 집착을 보인 집정관이다. 그의 전략전술은 탁월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물때와 물길, 그리고 시각적으로 계속 이어질 것 같은 바다가 실상은 물길이 막힌 만을 이용한 적의 유인, 그리고 학익진 등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바다를 훤하게 뚫고 있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를 점령하고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김빠지는 소식이었다. 해군과 육군을 비롯해 전 아테네 시민 모두를 살라미스로 옮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에 성공했으나 추위와 굶주림만 가져다 준 텅 빈 도시가 점령자를 반겼을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만 같다. 침략자 페르시아 군대는 텅 빈 아테네 길가에 서서 허탈함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리라. 이들의 분노는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약탈과 파괴로 이어졌다.



살라미스 해전


테미스토클레스로서도 승부를 걸어야 했다.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언젠가 또다시 침략해 올 것이 자명했다. 또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해변이 아니라 살라미스 좁은 해협에서 맞붙어야 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택한 것은 거짓 정보였다. 배신자를 가장한 군사 몇 명을 보내 “그리스 군 병사들은 대왕의 공포에 짓눌려 달아날 생각뿐이다”고 크세르크세스를 부추겼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살라미스에 정박해 있던 그리스 군선들이 철수준비를 마쳤다고도 했다. 그리스 병사의 연기가 어떠했는지, 페르시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사실이라면 크세르크세스로서는 남은 그리스 군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리스 지도



기원전 480년 9월, 날이 밝음과 동시에 해군을 앞세워 공세에 나섰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원하는 대로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섬과 아키타섬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구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가장자리에서 숨죽이던 그리스 해군은 때를 기다렸다. 페르시아 함대가 좁은 해협으로 촘촘히 들어섰다. 크기만 크고 바람의 영향에 크게 의존하는 페르시아 군선은 물길이 막혀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해협은 페르시아 군선으로 메워지면서 전열이 흐트러졌다.


이 틈을 노린 그리스 함선이 공격했다. 3단 노와 돛으로 움직이는 갤리선의 그리스 함대는 노가 1단 뿐인 페르시아 함선 옆구리를 공격해 노를 부러트리고, 함선 좌우를 높고 튼튼한 뱃머리를 이용해 들이박았다. 좌충우돌 페르시아 함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군선에 올라탄 그리스 병사들은 살육전을 펼쳐 전투를 마감했다. 다급해진 페르시아 군사들은 바다로 뛰어내렸지만 물귀신이 되어야 했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함선 400여 척이 난파되거나 그리스 해군에 포획된다. 크세르크세스는 전세가 기울어진 것을 알고 통한의 후퇴를 결정했다. 보급품도 문제였고, 무엇보다 군사들의 사기와 오랜 전쟁에 향수병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해군이 끝까지 추격해 소아시아 지역의 페르시아 함선을 무력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스 해군 3단 노선 복원도


크세르크세스는 이듬해 이른 봄이 되자 마르도니우스 장군에게 10만의 군사를 주고 아테네 인근 플라테이아로 군영을 설치한 후 아테네로 사신을 보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평화로운 자치를 보장하고 파괴된 신전을 재건해주겠다며 화평을 청했다. 돌아온 대답은 ‘노!’였다. 마르도니우스는 또 다시 아테네 공략에 나섰다.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중남부 아테네 인근의 아티카를 점령하자 아테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살라미스섬으로 시민을 대피시키며 아테네를 비워버리는 전술을 택한다.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스파르타의 지원을 얻어낸 아테네는 스파르타, 코린트, 페리오코이 등 그리스 연합군을 형성해 아티카 반도의 트리아 평원에서 일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를 또 한 번 파괴한 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테베로 물러났다.


파우사니아스가 지휘하는 8만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과 플라타이아이 평원에서 오랜 대치상태를 이어갔다. 페르시아 마르도니우스 장군은 그리스 후방을 교란해 보급로를 끊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밤을 틈타 물을 구하려던 그리스 군대가 해가 뜨면서 혼돈에 빠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개시한 페르시아군은 정작 아테네 군대와 코린트군 등 협공으로 몇 번의 밀고 밀리는 전투를 이어가다 마르도니우스 장군까지 전사하고 말았다. 장군의 7천 명의 호위병들까지 끝까지 싸우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나머지 병사들도 패주를 거듭해야했다. 두 국가 간 오랜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파르테논 신전. 압도적인 크기와 장엄함에 시선을 땔 수 없었다. 맑은 날 담은 사진도 있으나 구름에 가린 하늘이 지붕이 뜯겨나간 신전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페르시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페르시아 군대는 개전 초기에는 승승장구했으나 결정적으로 살라미스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대패한 후 전세는 완전히 기울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크세르크세스가 가장 믿었던 마르도니우스 장군마저 전사하자 그리스 정복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크세르크세스 역시 궁정의 내란으로 살해되는 비운을 맞는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sesⅠ) 때 와서 ‘키몬의 평화체결’로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오던 그리스 원정에 포기라는 종지부를 찍는다.


욕망은 본인은 물론 백성마저 고단하게 만들고, 군사 역시 주군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약탈을 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