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이집트, 잉카, 무굴, 오스만트루크, 몽골 등 무작위로 떠오른 제국 중에서도 로마가 앞서는 것은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온 제국, ‘세계의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정복지라 해도 도로와 수로를 만들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혜택을 골고루 부여했던 그들만의 지배방식이었다.
도로란 반란에 대비해 정벌을 위한 것일 수도 있었고, 변방 민족이 침략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기반이기도 했다. 반대로 훗날 로마가 그들이 야만이라 부르는 민족에게 유린당할 때 이용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우리네 조선시대 당시 ‘무도안전無道安全’이란 말이 있었다. 도로가 없어야 오랑캐와 왜구를 방어하기 용이하고 침략을 늦출 수 있다는 사고와 비교하면 들숨 날숨이 가빠진다. 약탈에 무방비로 노출된 변방의 하층민을 구해 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치열하게 페르시아와 전쟁을 이어갔던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본토를 비롯해 각 점령지역을 분할해 그의 휘하 장수들이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흩어지면 반목과 갈등은 경쟁으로 이어지고, 긴장으로 인한 이상한 평화가 이어지면서 힘이 고갈되어가던 중 로마라는 거대한 쓰나미를 만난다.
로마는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대략 1세기 동안 포에니전쟁을 치르면서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지중해를 비롯해 오리엔트지역에까지 위세를 떨쳤다. 남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반도 깊숙하게 쳐들어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명성도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만나고 나서 막을 내렸다. 한니발 전술을 고스란히 벤치마킹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카르타고의 허락 없이는 바닷물에 손도 담글 수 없다’며 서쪽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그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린다.
로마는 동서남북으로 넓혀가던 제국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충분한 자원이 필요했다. 이때 로마가 눈을 돌린 것이 발칸반도다. 쉬운 일은 없었다. 때마침 발칸반도의 첫 정복자들인 일리리언이 해적단을 조직해 로마 상선을 털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말이 해적이지 일리리언인 눈에 로마상선은 우리 바다를 휘젓는 침략자일 뿐이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부조
로마는 제국에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소탕코자 본격적으로 발칸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지금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지역에 해상무역으로 살아가던 발칸의 원주민격인 일리리언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하지만 세계 최상의 군사력과 살상력이 뛰어난 무기로 무장한 로마군을 막을 수 없었다. 로마는 아드리아해 서쪽 해상로를 쉽게 장악했다. 마케도니아마저 굴복시킨 로마는 기원전 146년에는 비실대는 스파르타를 마지막으로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하고 도나우강 남쪽 영역 발칸반도는 거대한 로마 우산 속에 들게 된다.
연이어 동쪽으로 정벌을 이어가던 로마는 기원전 28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제정시대가 열리고, 발칸반도에 속주 도시들이 생겨난다. 산발적으로 끝까지 항전을 이어갔던 일리리언은 철저하게 응징을 당하면서 서기 9년 드디어 발칸 전 지역이 로마 제국에 완전히 무릎을 꿇는다. 이어서 5백여 년 동안 로마의 철권통치를 받아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그곳에 사는 사람 스스로도 로마와 그리스 역사가 뒤섞이는 경험을 이상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신들의 땅 그리스가 곧 로마고 로마가 곧 그리스였다. 그리고 정령숭배, 숲의 신과 나무의 신, 주피터(Jupiter), 태양신 등 다양한 신이 판치던 로마종교가 그리스신화를 만나면서 일취월장(?) 재창조된다. 정령숭배는 인간이 신의 형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었지만,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 신들은 시기와 질투, 폭력, 사랑 등 인성을 갖춘, 인간보다 조금 더 크고 잘생기고 아름다운 신일뿐이었다. 로마인은 감히 신을 인간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에 묘한 쾌감을 느끼면서 훨씬 가깝게 다가왔을 것이다.
발칸반도 출신 로마황제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면서 서기 3세기 말이 되자 드디어 발칸반도에서 황제가 나온다. 첫 번째 인물이 디오클레티아누스(244~311, 재위 285~305)다. 지금의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땅에서 태어난 그는 태생적 하층민 자손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스타는 군인인 것처럼 그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황제 친위대장에 올랐다. 그리고 진정 일국의 왕도 하늘이 내리는 것처럼 운도 따랐다. 누메리아누스 황제가 암살되면서 군인들 추대로 황제에 등극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면서 전임 황제의 암살에 관련된 자들은 색출해 처형하고 반란을 잠재운다. 그리고 발칸반도 판노니아 출신 동료 막시미아누스를 또 한 명의 황제에 올려 로마를 동서로 구분해 서쪽을 맡긴다.
혹자들에 의하면 이때를 20세기 발칸반도의 불행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 순간이라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를 동서로 양분하고부터란 뜻이다. 물론 그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20세기 가장 원시적이며 더러운 유고내전의 폭력의 선이라고 못 박는다. 후세들에 의해 독박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어쨌거나 황제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각각의 정부에 부제를 두어 통치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4두 정치(4분치제도四分治制度)에 돌입한다. 이때 막시미아누스 부제 중 한 명이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였다. 그는 이베리아반도 에스파냐에서 현재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 오늘날 영국의 그레이트브리튼섬인 브리타니아를 맡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말년을 보낸 궁전(스플리트 달마티아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동료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황제 자리를 부제에게 물려준 후 달마티아의 살로네(Salonae)에서 죽을 때까지 여생을 보낸다.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우리나라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아름다움을 보는 듯하다. 당시 로마사회로서도 자진 퇴임이라는 미증유의 일대 사건이었다.
‘4두정치체제’는 군인황제를 종식시키는 토대로 작용했다. 이러한 정치적 결단이 또 한명의 발칸반도 출신황제에게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제국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기독교 공인 등 로마 역사에 있어 황제 중 가장 큰 획을 그은 콘스탄티누스대제 등극에(물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큰 영향을 끼친다.
콘스탄티누스대제, 그는 발칸반도 세르비아 동남부 로마의 정복기지였던 지금의 니슈 지방에서 태어났다. 니슈는 동쪽 변방 국경을 노략질하는 고트족을 방어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고트족을 물리치기 위해 이곳을 지나다 여관집 딸이었던 헬레나와 사랑은 나눠서 태어난 아들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어린 시절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인질 신분이 되어 니코메디아 궁전에서 보내야 했다.
로마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어머니 헬레나의 양향을 받아 ‘밀라노칙령’을 반포해 기독교를 정식으로 공인했다. 330년에는 발칸반도 서쪽 끝자락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로마의 신권과 왕권을 모두 가져왔다. 이때 60여 년간 버려진 듯 남겨진 서로마 사람들과 갈등의 불씨를 묻어두게 된다. 물론 새로운 수도 비잔티움이라는 걸출한 도시를 건설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진일보된 부활을 꿈꿨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비잔티움으로 이동하면서 로마에는 교황이라는 교권을 시민 위에 두는 권위적이면서 현실적이자 개인적인, 신과 인간세계의 구분이 확연하게 진화, 혹은 퇴화된 가톨릭이 자리 잡게 된다. 반면 그리스와 발칸반도에는 신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는 없는 원리주의적이며, 성직자 삶 자체가 아이콘이라는 원칙을 고수한 동방정교가 뿌리내리면서 또 하나 종교 갈등이라는 뇌관을 묻어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