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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Sep 19. 2023

알렉산드로스의 최후

그들도 인간이었다

Alexander Mosaic (detail), House of the Faun, 폼페이(위키백과)



다리우스 3세의 최후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양 진영은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또다시 대치했다. 페르시아군(軍) 약 20만 명, 알렉산드로스의 헬라스 동맹군 약 4만7000명이었다.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다리우스 3세는 패전을 면치 못한다. 앞선 전투와 비슷하게 페르시아 군단을 양분하는 전략으로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중앙으로 돌격했다. 선두에 흑마를 타고 달려오는 알렉산드로스를 보자 기겁한 다리우스 3세는 허겁지겁 마차에서 내려 말로 갈아타고 도망치고 말았다. 중앙군이 무너졌다. 그러나 페르시아 좌우익의 군대가 협공해 다리우스 3세는 살아서 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 총독 베소스의 계략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치명적인 적이 가까이에 존재했던 것이다. 충성을 맹세하면서 권력을 이용해 위세를 떨치던 자, 다리우스 3세는 그들을 솎아낼 안목을 가지지 못했던 까닭이다.


고대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를 향유했던 페르시아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의 이란 지역인 고대 페르시아에서 융성한 문명은 서구 문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르시아를 계승한 파르티아 문명과 그리스 문명이 만나 헬레니즘 문명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사에서는 페르시아를 유럽을 침략한 이민족으로 기억하려 애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교습하는 아리스토텔레스 , by 장 레옹 제롬므 페리(출처 위키백과)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동안 강행군에 지칠 대로 지친 군사들이 문제였다. 많은 전리품도 챙겼겠다. 고향에 돌아가 행복하고 평범한 삶을 살 것이라 믿었다. 다리우스 3세가 죽었으므로 더는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부하들의 바람대로 진군을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 치세를 쌓던, 악정을 펼쳤던,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통일 왕국, 페르시아 왕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동방의 먼 나라, 이상향이라 꿈꾸어오던 아시아의 왕이 되고자 했다.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말이 없었다. 싸움터 구석에서 몸을 사리리라 자독自督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쉽지 않음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기원전 327년, 이란 북부 지방의 유목민 저항세력의 기를 어느 정도 다스린 알렉산드로스는 드디어 카이바르 고개를 넘어 인도 정복에 나선다. 인도 펀자브 지방에 들어서면서 인더스강 지류인 히다스페스강에서 그를 가로막는 포로스 왕과 일전을 치른다. 포로스는 키가 210cm가 넘는 거구였고, 기병과 보병, 코끼리 200마리 등 군사력에선 알렉산드로스가 열세였다. 그러나 적을 속이는 전략으로 강을 건너 기습과 그리고 적의 힘을 역이용하는 전술로 열세를 극복해 결국 포로스를 포로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의 명마 동갑내기 부케팔라스가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기원전 326년 6월, 태어난 지 서른 해, 알렉산드로스와 함께한 지 18년이 되었을 때 죽고 말았다.           




기원전 335년 트라키아인들을 정벌하는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출처 위키피디아)



신의 피가 흐른다는 알렉산드로스의 최후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알렉산드로스가 정벌한 길이를 직선으로 대충 그었을 때 장장 18,000km다. 가로막는 자 모두 발아래 무릎 꿇린 무적의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런 그가 갠지스강 계곡에 진입하기 전이었다. 병사들에겐 끝없고 낯설기만 한 곳,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는 데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들은 지쳐 있었다. 이보다 더한 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가슴에 벌집처럼 숭숭 구멍을 내버린 향수병이었다.


“나를 따르라!”, 알렉산드로스 외로운 외침은 그 의미를 잃었다. 결국 대단원의 원정을 마쳐야 했다. 선택! 병사들에겐 귀향이란 정곡을 찌르는 판단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지금까지 내쳐왔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도중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고향을 향한다는 마음이 들뜬 부하들과 달리, 신의 피가 흐른다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지금까지의 탐욕적인 생각은 어둠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피를 부르며 질풍노도처럼 밀고 왔던 그 길을 고개를 숙인 채 내려 걷는 길은 허무 그 자체였다.


정신력이 시들하면 체력도 동반하락 한다. 신의 피가 흐른다는 것에 자라꼬리 만큼 의구심이 자랄 무렵 한계에 다다랐다. 그의 신은 신으로서의 영역을 딱 거기까지만 허락했다. 회향을 거듭하던 군사는 바빌론에 도착했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알렉산드로스는 자신과 하나가 되어 전장을 누볐던 부케팔라스가 죽은 3년 뒤 기원전 323년, 33살의 나이로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려 그곳에서 객사한다.


메타인지, 즉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과 소중한 대화를 통한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진적에 신의 영역으로 자신을 가둠으로써 기능을 잃었다. 풍토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애마 부케팔라스가 죽었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신의 아들이라 자처했던 알렉산드로스의 욕망은 그것을 가렸다.


만약 부하들을 독려해 인도 깊숙이 들어갔다면 단언컨대 그곳에서 장열하게 혹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을 것이다. 기병 하나가 보병 열둘과 맞먹는데, 도무지 코끼리는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할까. 그것보다 인도의 드넓은 땅에 고립되어 사방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콧물핏물 범벅되어 지질하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 정벌로드(   )안은 전투(기원전) 및 사건 년도 / 일러스트 박진서(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정벌로드Conquest Road’, 세계사에 남긴 업적


‘헬레니즘’이란 말은 넓게는 그리스 정신과 문화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다. 역사상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시작으로 로마가 지중해 주변을 점령하기까지 대략 300년의 기간을 가리킨다. 서구중심의 학자들 사이에 그리스 문화가 동방의 문화를 만나 퇴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소아시아, 페르시아, 인도 문화가 당시 그리스문화에 뒤졌다는 일방적 논리다. 문화의 차이는 있어도 높낮이를 구분한다는 것은 우월성이 지나친 몽매한 발상이다


물론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원정은 문화, 예술, 종교, 생활, 정치 등 동서 문화를 맺어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전쟁으로 인한 무기와 전술도 함께였다. ‘정벌로드’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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