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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Sep 24. 2023

로마 교회 갈등과 분열

로마교회 갈등과 분열


파라다이스 스토리텔링      


유대인의 죽음도 불사한 믿음은 파라다이스 스토리텔링이 시작된다. 태초에 유일신 하느님께서 낙원을 만들어 그곳에 사랑하는 인간을 살게 했다. 그런데 사랑이 지나쳤던지 인간의 건방이 도를 넘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났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했으나 깨우쳐주려는 뜻에서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도록 했다.


인간에게 땅을 주고,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생계와 생존을 위해 사용을 허락했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의 이용은 하느님의 거룩하고도 성스러운 명에 따라 정당하게 사용할 권리를 쟁취했다. 그런데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힘의 균형에 따라 정의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곧 강한 자가 정의였으며, 더 강한 자의 이익에 따라야 질서가 정해졌다. 하층민은 아우성쳤으나, 하늘은 신의 대리인(교황, 신부, 성직자)을 동원해 폭력으로 답을 대신했다.


중세 기독교에 전해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후 지옥으로 내려가 그곳을 약탈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아담과 하와와 족장들을 낙원으로 데려왔고, 그런 다음, 즉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 날이 세계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Easter day', 부활절이다. 이로써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용서를 받았다. 그리고 인류에게 낙원에서의 영생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가져준다고 해석한다. 참 쉽다. 영생이란 것이 말이다.


기실 부르주아란 말도 여기서 파생되었다.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천국행 티켓, 즉 축복을 받았다는 생각이다. 그 부를 개인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재투자를 해 더욱 많은 부를 쌓고,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느님 나라에도 경제논리가 통용되었고, 면죄부를 파는 교황도 이와 비슷하게 생겨났다.





로마 교회의 갈등과 분열     


갈등이란 증오의 프레임을 만드는 증폭의 마력이다. 콘스탄티누스대제에 의해 로마가 수도를 지금의 이스탄불, 즉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황제가 곧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교회는 갈등의 링에서 본격적으로 맞붙는다.


기독교 정통성 자부심이 충만한 로마 교회와 황제 권위를 유지하려는 콘스탄티노플 간의 대결 구도는 필연이었다. 콘스탄티노플로서 로마교구는 수 많은 교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가 수도를 이전함으로써 교권도 함께 옮겨왔다는 뜻이다.


동서 교회의 갈등은 지리적, 역사적 유래도 무시할 수 없다. 그와 더불어 비잔티움 총대주교의 야심, 세속적 권력의 욕망에 타락한 교황, 황제의 정치적 잣대의 간섭 등 끝없는 소비적 논쟁이 일었다.


수도가 옮겨간 뒤의 이탈리아반도는 폐허에 방치되다시피 했다. 텅 빈 로마는 이민족 침략에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러자 로마 주교는 게르만 장수를 고용해 옛 권위를 부활하려했다. 476년 게르만 장수 오도아케르가 서쪽 로마를 점령하자 결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교권이 차츰 높아진다. 굳이 콘스탄티노플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기독교가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막바지에 몰린 사회는 채찍보다 향수를 불러내 증오심을 자극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경제와 교권마저 동방으로 옮겨간 뒤 이탈리아인들은 경쟁심리가 발동하면서 새로운 지도자를 찾게 되고, 당시 그리스도교 수장 로마 주교를 옹립하여 그에게 영적, 세속적 권위까지 안겨버린다. 이로써 교리논쟁이 본격적으로 링에 오른다.



눈물을 쏙 빼고도 남을 기독교의 성화나 조각 등 아이콘은 성경을 설멍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교리논쟁은 조선시대 이기론理氣論를 두고 죽음도 불사했던 파벌적 논쟁과 비슷하게 닮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기론, 즉 이理(스스로)와 기氣(에너지)의 원리를 통한 세상만물 존재와 움직임에 대한 이론이다. 성리학이 발전되면서 논쟁이 확산되자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정립되면서 유학에 발전을 가져왔다고들 하는데, 장돌뱅이 시각으론 기실 쓸데없이 논쟁으로 국력이 소진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말을 탄 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이때 사람이 간다고 생각하면 주리론, 말이 간다고 생각하면 주기론이다. 간단명료하지 않는가.      






각설하고 800년, 또 하나의 영웅(?)이 등장한다. 샤를대제라 불리는 게르만족 샤를마뉴가 이탈리아를 장악하면서 서유럽에 감히 넘보지 못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로마교황 레오 3세는 이때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부활이 선언되고,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 황제 대관식을 집전하면서 비잔틴제국 황제를 자극했다. 이때부터 동서 로마의 핑퐁대결은 점입가경에 이른다. 로마 교황으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서유럽의 크고 작은 나라 왕에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연결고리라는 지위를 얻어 막강한 중세교황의 시대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각 지역 왕들이 다투어 교황에게 충성을 맹약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당연, 점차 영국과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포르투갈, 에스파냐, 중부유럽에까지 교세를 넓혀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왕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백성에게 정신적으로 통일된 사상인 종교의 힘이 절실했다. 서유럽 로마 교황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된 원초적인 이유는 게르만족 이동에 있었다. 역사를 거스르면, 372년 볼가강 건너 생판 처음 보는 무지막지한 훈족이 침략했다. 이를 피해 세계는 남쪽으로 서쪽으로 대이동이 시작된다. 물론 도미노게임처럼 서양 역사는 변화무쌍하게 진행되면서 각 민족에 의해 나라가 세워지면서부터다.



데이비드 오베르 (1449-79) 작. 4차 십자군 콘스탄티노플 공격


동서로마 분열에 결정적인 원인이 또 있다. 1204년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주민을 살육하고, 약탈과 동시에 도시를 불사르는 등 그들의 만행으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다. 이는 다분히 서로마 교황의 부추김이 한몫을 했다. 십자군전쟁은 신을 빙자한 경제적, 정치적으로 이용된 침략전쟁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벽에 걸린 십자가를 장검으로 사용해 폭력을 가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비잔티움의 동로마는 십자군이 세운 라틴황제시대가 시작된다.


                    기독교 세계로서는 일종의 자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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