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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Oct 01. 2023

가톨릭 성상파괴 운동

종교의 아이콘 성상을 파괴하다

▲ 헝가리 부다페스트 성이슈트반대성당 중앙 천장



초기 기독교는 아이콘에 대한 숭배 자체가 없었다. 유일신 신앙에 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2~4세기 성상숭배는 성당을 비롯해 다양한 양식으로 자유의 날개를 달고 유행을 일으켰다. 초자연적 믿음의 연결고리, 바라볼수록 감미로운 감동, 절대적 탐닉의 대상, 원인도 출처도 알 수 없는 눈물을 쏙 뽑아내고도 미련에 고개 돌리게 만드는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은 도무지 말로서 설명되지 않는 인류가 만든 최대의 걸작이다.


사건은 비잔틴 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1)에 의해 일어난다. 그는 십계명 중 둘째,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며, 또 하늘과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 이것들을 섬기며 절하지 말라!”이 내용을 성상파괴에 적용했다. 이력서에 한 줄 더 넣으려는 절박함과 다를 바 없는, 주위에서 잘한다며 추켜세우자 자신의 업적을 하나 보태려는 욕심의 발로였다.      






로마 가톨릭에 있어서 교회란 구원의 장소다. 성직자는 구원을 실현하는 막강하고도 이상적인 영적 영역을 부여받는다.(체코 프라하 성비투스대성당)

사실 인도의 간다라양식 역시 성스러운 존재인 부처를 형상화하지 않은 데서 나온 양식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동방원정에서 성상 전통이 화려한 그리스 문화가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상이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본 군중의 반응은 격했다. 그동안 화려한, 기도처로서 심취의 역할이던 성상이 파괴되자 시민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파괴를 총지휘하던 감독관은 성난 군중에게 맞아죽는 등 폭동이 일어났다. 


성상파괴에 적극 반대하고 나선 로마교황으로서는 성상을 비롯한 아이콘이 절실했다. 게르만 등 로마를 점령한 이교도에 대한 포교에 도구로써 필요했기 때문이다. 글자는 성직자와 귀족들만이 통용되어 하층민에게 라틴어로 된 성경이란 하등 쓸모가 없었다. 샤를대제조차 글을 몰랐다고 하니 얼추 이해가 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무엇을? 왜 믿어야 하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묘연했다. 따라서 포교에 성상만큼 유용한 것이 없었다. 그림과 조각을 교본삼아 입으로 전달하면서 가톨릭의 아이콘이 곧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교황이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훗날 동로마의 성상은 서로마보다 더 찬란했다. 훈족의 침입으로 슬라브족이 발칸반도 전 지역은 물론 비잔틴까지 몰려들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비잔틴 제국의 힘이 사양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이때 야만인 슬라브족에게 선진종교로서 본격적인 포교에 아이콘이 이용되면서 아이콘 숭배가 본격적으로 유행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몬테네그로 포도고리차 성당

서유럽에서 시작된 성화, 아이콘 등이 서유럽에 본격 유행하게 된 동기는 아이러니하게도 11세기 그들의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일으킨 십자군 원정에서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십자군에 의해 화려한 성화와 아이콘이 서방에 전해졌던 것이다. 이로써 서구 유럽에 성화와 조각 등 서양예술이 한층 더 발전하게 되고, 르네상스 운동의 발판이 마련된다. 이슬람 역시 신을 형상화하는 데 반대하면서 파생된 종교다. 인간이 감히 눈에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한 신을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경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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