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남긴 정벌로드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아테네를 중점으로 하는 ‘델로스동맹’과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레폰네소스동맹’간에 치러진 길고도 긴 펠레폰네소스전쟁이라는 내분이 일어난다. 스파르타가 승리했다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리스 세계는 에너지 고갈이라는 쓴맛을 보면서 이민족으로 설움을 받던 마케도니아 성장을 지켜봐야 했다.
마케도니아는 필립 2세에 와서 발칸반도 맹주로 등장한다. 그러다 기원전 338년 희대의 걸출한 영웅 알렉산드로스를 탄생시킨 마케도니아 지배에 들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1년 페르시아와의 지긋지긋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페르시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우리나라 속담에 ‘친아버지 도끼질할 때 가지 말고, 의붓아버지 떡 치는 데 가라’란 말이 있다.
아내를 의심하게 되면 그의 아들 역시 눈 밖에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버지 사랑을 벗어난 알렉산드로스 옆에는 야심찬 어머니가 있었다. 강한 남성성을 지닌 아버지를 따라 아비규환의 전장을 전전하는 것보다 차라리 더 잘된 일이었다. 섬세하고도 집요한, 그러면서 감히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그녀만의 대담한 접목은 아들을 더 빠른 속도로 성장시켰다.
그녀는 가장 먼저 알렉산드로스에게 신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필리포스 2세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은유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아들을 신을 반열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아버지로 인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당대의 석학이자, 그리스를 대표하는 인물이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승과 제자로서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들 만남은 3년간 이어졌다.
각설, 멋지게 장성한 알렉산드로스는 명장과 명마는 세계정벌이라는 야망을 위해 수많은 전투를 함께 겪는다. 바로 명마 부케팔로스와의 만남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 2세가 급작스레 죽자 군부의 강력한 지지와 시민들의 환호로 왕위에 올랐다. 스스로 ‘알렉산드로스 3세’라 칭하고 정식으로 즉위식을 치른 후 명실공히 그리스 권력을 거머쥔다.
그리스를 통일한 22세의 알렉산드로스. 왕위에 오른 지 2년, 기원전 334년이 되자 그동안 꿈꾸던 동방으로 눈을 돌린다.
이것이 당대의 최고 엘리트 지식인이자 석학의 시대적 사고다. 로마를 비롯해 서유럽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려진 시기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12세기의 아랍 철학자 이븐 루슈드(라틴식이름 아베로스)의 저서가 이슬람화되어 있던 것을 에스파냐를 통해 전달된 때부터란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라니코스강 전투를 시작으로, 미트레스 전투에서 멤논을 몰아냈고, 사르디스와 리키아의 북쪽 지방 판퓨리아, 프리기아 등을 차례로 정복한다. 현재 터키 관광명소 카파도키아를 점령하면서 아나톨리아를 완전정복한 뒤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해군 본거지 키리키아를 향해 진군하는 도중에도 저항 없이 수도 타르소스에 도착하였다. 적국의 수도에 진입했으나 이미 수비병들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후였다.
타르소스애 도착한 천하의 알렉산드로스지만, 이곳 풍토병인 키리키아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름이 지나면서 회복의 기미를 보였지만, 수많은 병사는 그렇지가 못했다. 더 큰 위기가 닥쳤다. 다리우스 3세가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소스를 향했다. 다리우스 3세는 풍토병으로 남아 있던 마케도니아군을 학살하면서 이소스로 향하는 연락망을 차단했다.
기원전 333년, 드디어 유명한 이소스 전투가 벌어졌다. 군사력에선 우위에 선 다리우스 3세였으나 전술 전략 면에서 알렉산드로스가 한수 위였다. 다리우스는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 티루스를 7개월이나 걸려 힘들게 점령하고, 기원전 332년 가을, 남쪽으로 내려가 이집트의 나일강 어구에 자기 이름을 붙인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운다. 그가 정복한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우는 시초다. 이를 계기로 훗날 이집트의 수도가 된 알렉산드리아는 ‘눈雪 빼고는 다 있다’고 할 만큼 번성하게 된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로 향했다. 지금의 이란 남서부 팔스지방 페르세폴리스는 수사에 이어 건설된 도시이자 이전의 페르시아 수도였다. 이곳 역시 알렉산드로스에게 성문을 활짝 열며 항복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너무나 잔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했다. 약탈은 살육, 강간, 방화를 동반한다. 재물은 당연히 덤이다. 하루 꼬박 약탈이 이어졌으니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죽음을 부르는 비명은 검은 연기와 함께 페르세폴리스 하늘을 메웠다.
알렉산드로스가 이곳만 약탈을 허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의 몸에 신의 피가 흐른다고 믿었던 그는 100여 년 전, 신성한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의해 화마에 휩싸였던 역사를 떠올렸다. 악순환의 연결고리, 보복은 더 잔인한 보복을 낳고, 피는 피를 불렀다. 페르세폴리스 왕궁에 불을 질렀다.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예술의 결정체라고 불리는, 화려하면서 페르시아 왕권의 상징성을 드높인 왕궁, 알렉산드로스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즐겼다. 장엄한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함으로써 자신이 지켜온 신성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그도 3천 톤(?)에 달하는 엄청난 금은보화를 손에 넣는다.
기원전 331년, 현실을 절감했던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를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했을 법했다. 그는 3만 달란트 금과 페르시아 제국의 절반, 제국의 공주를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무슨 심보에선지 알렉산드로스가 거절한다. 당시 시세로 1달란트를 34kg정도로 계산한다고 해도 3만 달란트의 금이라니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러다 결국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 총독 베소스의 계략에 의해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다. 치명적인 적이 가까이에 존재했던 것이다.
배신자 베소스는 스스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라 칭하고 페르시아 왕으로 자처했으나, 다리우스 3세의 시체를 확인한 알렉산드로스 분노를 샀다. 현재 시각으론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다리우스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힌두쿠시산맥을 넘어서까지 베소스를 추적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도망친 베소스 역시 그가 그랬듯 동맹을 맹세했던 스피타메네스 배신으로 사로잡혔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코와 귀가 잘려나가고, 다리우스 3세가 죽은 장소에서 처형된다.
이후 나머지 알렉산드로스 동방정벌 과정은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