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필우입니다 Oct 12. 2023

오스만투르크

드디어 세계사에 오스만투르크가 등장하다

V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    




영어의 표현은 오토만, 이슬람언어인 아랍어로 오스만이다. 압바스 제국이 막을 내리고 이슬람의 주도권은 투르크인 중심의 오스만제국으로 이동된다. 


13세기 말, 소아시아와 그 주변은 투르크족의 소부족들의 군웅할거시대를 맞았다. 셀주크 투르크는 당시 이즈닉(니케아)에서 남쪽 소아시아의 작은 도시 수구트 등 한 공국을 거느리고 있던 부족장 오스만 베이(Osman Bey)로부터다. 1299년부터 비잔틴 영토에 대한 잠식으로 시작된 오스만 베이의 정복사업은 아들 오르한(Orhan) 시대에 와서 유럽의 발칸반도까지 진출했다. 1361년 발칸의 아드리아노플의 정복,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발칸반도의 공략이 마무리된다.     


오스만 트루크란 말도 오스만 1세에서 유래한다. 이들은 지리적 여건상 부르사와 인근인 마르마라해로 진출할 수 있었고, 과거 유목민의 피를 이어받은 투르크 전사들인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셀주크시대에 술탄의 기병으로 활약할 만큼 강한 기동력을 보유했던 이들이었다.     


정확히 623년이란 긴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던 오스만제국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었다. 투르크족이 몽골군의 무자비한 침탈을 피해 아나톨리아로 끊임없이 밀려들던 때였다. 이때 오스만은 피난민을 성심으로 품어주게 된다.     


오스만은 몽골군을 피해 내려온 투르크인들을 규합해 세력을 불리기 시작하면서 영토를 서쪽으로 넓혀가는 데 성공하자 응당 유럽의 관문 비잔티움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에 의해 풍비박산 난 비잔티움 제국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채로 만만한 상대였다. 더구나 비잔티움제국의 말기적 현상인 민심이반이 심각했다. 허리를 졸라야 맞출 수 있는 세금과 부역은 늘 하층민을 괴롭혔다.     


이때 오스만이 나타나 세금을 대폭 줄여주었고, 점령지 주민에게도 이슬람의 형제로 취급해 똑같이 대접했다. 하늘이 감동할법한 일이었다. 종교의 자유, 언어와 문화 역시 관대했다. 오스만을 지지하는 소리가 하늘에 퍼졌고 백성의 찬사가 이어지며 더 광대한 영토가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절대적인 것은 이슬람교의 힘이었다. 각각의 민족이 혼재된 상태에서 종교의 무리한 포교와 강요는 역효과를 낼 수 있었다. 제국의 정신적 구심점을 삼기 위해 하나의 종교로 뭉치려 하기보다 믿음을 인정함으로써 세수 확보와 징병 등 제국의 안정을 꾀했다. 이슬람교도가 아니더라도 점령지 사람들의 생명과 안정을 보장해주었다. 즉 파괴와 살육보다 회유와 평화의 정책을 펼쳤다. 사유재산을 인정했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리스 아테네의 초라한 정교회 건물이 지면에서 1m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어서 드나들 수 없어서 땅을 아래로 낮춰 교회를 올렸던 까닭이다. 2m의 출입문을 만든 나름의 지혜였다.     


아테네 대성당 / 지면보다 1m 낮게 파서 교회를 올렸다. 드나드는 문을 2m로 만들기 위한 나름의 지혜였다.




물론 타종교에 관대했다곤 하나 세금은 더 내야 했고, 교회도 화려하게 짓지 못하게 했다. 출입구도 지상에서 1m를 넘지 못했다. 개처럼 기어서 드나들게 한 것은 이들 최소한 폭력의 도출이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초라한 정교회 건물이 지면에서 1m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어서 드나들 수 없어서 땅을 아래로 낮춰 교회를 올렸던 까닭이다. 2m의 출입문을 만든 나름의 지혜였다.     


이렇게 승승장구하자 오스만제국을 본 토후국들은 스스로 오스만의 깃발아래 몰려들었다. 여기에 죽음을 두려워 않는 투르크 전사들의 집결도 이어졌다. 급작스레 소아시아 세력균형이 무너지면서 투르크족은 자신들의 이상인 무슬림의 의무 ‘지하드’를 성취할 조건을 갖춘 나라를 선호했다. 물질적 보상은 덤이었다.     

     



지중해의 새로운 패자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국은 1인 지배체제보다 가족지배체제에 의존했다. 남을 믿기보다 형제간의 믿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래로 이어온 체제 방식이다. 전통적 정치적인 힘은 가족지배체제에 있었지만, 단점도 있었다. 왕이 죽으면 아들들에게 똑같은 영토를 분배했는데, 이는 가족 간 내분으로 이어져 늘 형제간 피 흘리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오스만 1세는 유언으로 장자상속을 정해버렸고, 남은 아들들은 죽거나 혹은 감금상태로 살아야 했으며, 일체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는 이상 태생적 불행은 어린 시절부터 포기라는 절망의 멍에를 짊어진 채 살아야 했다. 이나마도 거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제국의 번영을 위한 비정한 선택, 이슬람의 교리 뒤에 감추어진 번영을 위한 살기殺氣를 보는 듯하다.     


오스만  1세. 유언으로 장자상속을 정해버렸고, 남은 아들들은 죽거나 혹은 감금상태로 살아야 했으며, 일체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다 .     


오스만 1세는 장자상속과 함께 미래를 위한 나름 지혜로운 유언을 남겼다.     


“종교를 가장 중심에 두고 조심해 다루라. 이슬람의 가르침에 따라야 나라가 부강할 수 있다. 지혜롭지 못한 자에게 권력을 나누지 말라. 학자와 기술자, 예술가, 문필가들이 힘의 원천이니 명예롭게 대하라!”     

20대 초반의 나이에 부족장이 된 이래 30여년을 정복전쟁으로 날밤을 지새웠던 인물다운 유언이다. 이것이 제국을 오랜 세월동안 존재케 하는 에너지원이었다.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고, 타 종교에 대해서도 너그럽고 포용적인 제도가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리고 학자와 기술자, 예술가들이 힘의 원천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스만 1세(위키백과)

그리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가지스(Ghazis)’, 즉 투르크말로 전사의 원정대이자 약탈원정대가 발전해 주군을 모시는 구성원으로 탄탄한 결속력을 자랑했다. 전쟁이 곧 생업인 이들에게 종교적 동기가 작용하면서 더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가지스는 비잔티움 제국은 물론 발칸반도와 지중해 기독교도와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종교적 의무를 다한다는 초기의 정신으로 무장해 흔들림이 없이 전쟁을 수행했다. ‘성전’을 수행하는데 있어 생계와 생활공간이 따로 없었다. 밥 먹다가 싸우고, 싸우다가 잠들곤 했던 당시의 청춘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 2대 오르한(Orhan) 1세(1281~1362)에 이르러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그의 발아래 두고, 발칸반도를 침략해 유럽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세력형성에 성공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