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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Oct 14. 2023

처절한 멍에를 뒤집어 쓴 슬픈 피해자 에니체리

에니체리(Yeniceri)의 탄생과 몰락

V 이스탄불 톱카프궁전(톱:대포, 카프:문, 즉 골든 혼을 향한 대포문). 처음에는 ‘예니 사라이(Yeni Sarayı)’라고 불렸으며, 문에 대포가 설치되면서 톱카프로 불리게 된다. 에니체리에 의해 술탄이 이곳에 감금되어 죽은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



        


에니체리


오스만트루크, 이슬람제국을 강성하게 만든 원인이자, 이슬람제국이 하향곡선을 그리게 한 가장 큰 요인, 폭력의 시대 한가운데를 장식했던 그 이름 ‘에니체리’다. 어느 사학자의 표현처럼 그들도 어찌 보면 가혹하고도 슬픈 피해자다. 무라트 1세는 발칸반도에 진출하고 난 후 술탄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정예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무라트 1세에 의해 창설된 에니체리는 1363년 이슬람의 종교적 사상과 시대적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탄생에 박차를 가했다.


이슬람제국은 군인징집에 있어 까다로운 규칙이 있었다. 일단 외아들은 제외됐다. 대를 잇는 것이 우리 조선이란 나라만큼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트루크인을 비롯해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 역시 강제징집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한 종교 아래 연결된 같은 형제라는 이유다. 정체성 등 뿌리를 알 수 없는 고아와 떠돌이로 살아간다고 해서 하류민족 취급을 당했던 집시, 전과자, 그리고 절대로 복종을 모르는 유대인 역시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다 보니 충당요건은 한계에 다다랐다. 때마침 제국이 전쟁에 연승을 거듭하면서 전쟁포로가 많았다. 데브시르메(Devsirme), 즉 전쟁포로 중 소년징발과 공납이란 방식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있었다.     


무라트 1세는 기독교인 중 건강한 혈통과 몸, 영민함을 두루 지닌, 14세에서 20세 사이의 청소년을 뽑아 훈련시켰다. 주로 발칸반도에서 차출했는데 이들이 바로 에니체리다. 이렇게 부모에게서 강제로 떨어져나온 이들은 특별한 장소에 흩어져 가장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 그런 후 고된 훈련으로 몸과 마음을 담금질 당했다. 투르크 말을 익히고, 정해진 기간에 무슬림 전사로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런 후에 이스탄불 궁정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마쳐야 온전한 에니체리가 될 수 있었다.     




에니체리는 술탄의 노예로 길들어졌다. 술탄의 명령에만 절대복종했으며, 황제의 친위대를 겸하며 궁정 수비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렇게 잘 훈련된 에니체리는 술탄의 노예로 길들어졌다. 술탄에 무한충성, 술탄의 명령에만 절대복종했으며, 황제의 친위대를 겸하며 궁정 수비는 물론 국경의 수비도 이들 임무 중 하나였다. 엄격한 규율 속에 군영에서 독신으로 생활하며 사치는커녕 경제활동 또한 금지됐다. 대신 최정예부대였던 만큼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고, 술탄 이외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    

 


나날이 발전한 에니체리 부대는 무라트 3세에 이르러 10만의 에니체리가 활동했으며, 18세기에는 쿠르드족 출신도 에니체리 신분이 될 수 있었기에 기독교도 청소년은 제외된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에니체리는 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정치에 깊게 관여하면서 골칫덩이로 떠올랐다. 이들은 훗날 장군과 재상의 지위에 오를 만큼 막강한 권한을 누리고, 술탄의 약점을 잡아 위협과 공포정치를 일삼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의 뜻에 맞지 않을 경우 황제를 암살하는 등 국정농락에 앞장서면서 제국의 세기말적 현상을 두드러지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이 집중되면 초심은 사라지고 부와 함께 쾌락을 따른다. 이것이 반복되면 이물질이 스며들며 고이게 되고 반드시 썩는다.     


무라트 1세

이들에게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1826년 마흐무트 2세는 새로운 질서를 위해 개혁에 성공하면서 이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천애 고아를 만드는 반인륜적인 방법으로 모집해 양육한 전쟁의 소모품이자, 용감한 군인들이었고, 500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폭력의 한 가운데 자발적 희생양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의무라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처절한 멍에를 뒤집어쓴 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다음 편에는 세르비아의 성지  '코소보 전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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