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부터 달마티아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세르비아 사람들은 서부 산악지형의 발칸반도와 남쪽 몬테네그로지역에 퍼져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네만야 왕조를 이어받아 세르비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스테판 듀산, 세르비아 역사에 가장 유명한 군주, 세르비아 최초의 황제로 등극하는 영웅이 등장한다. 국경을 마주한 불가리아제국도 눈치를 보며 숨을 죽여야 했다. 특히 비틀거리는 비잔티움제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내 것으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발칸반도 전역을 장악해 자신의 제국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1331년에는 발칸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로 거듭났다. 그래서 후세 역사가들은 스테판 듀산 앞에 ‘강자强者’라는 별칭을 붙여 이미지를 상승시켰다. 공포에 떨던 비잔티움제국은 장고 끝에 악수를 두고 만다. 호시탐탐 발칸반도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트루크제국에게 SOS를 타전하고 말았다. 오스만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샘이다. 결국 이 잘못된 판단이 세르비아의 네만야 왕조의 멸망과 함께 천년을 넘어 이어오던 비잔티움제국의 종말을 앞당겼다.
훈족에 의해 도망쳐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게르만 일파 서고트족을 연상케 한다. 왕이 귀족의 딸을 욕보이자, 광분한 귀족이 바다 건너 북아프리카에 정착한 이슬람에 도움을 청한다. 불감청고소원이라! 이슬람은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을 파견해 도움을 청한 세력까지 피레네산맥까자 몰아내면서 이베리아 반도가 이슬람의 세력권에 들게 된다.
711년부터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700여 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대부분 이슬람 세력이 지배했던 것이다. 지금의 '지브롤터'가 타리크 장군이 상륙한 곳이라는 아랍어 '자발 알 타리크'(타리크의 언덕)의 발음이 변형되었다.
검은새의 들녘- 코소보 전투
1386년에 불가리아 소피아와 세르비아 니시를 함락한 이슬람은 1389년 6월 28일, 오늘날 세르비아 민족 성지인 ‘검은 새의 들녘’으로 불리는 코소보 대평원에서 세르비아군대와 마주했다. 세르비아 수호신이자 성자 성 비투스의 날,(1914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그날도 성 비투스의 날이었다) 운명을 건 결전이 시작된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일부 군대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이미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세르비아군을 중심으로 자칭 십자연합군 10만, 오스만 6만이 진을 쳤다. 세르비아 농민들까지 동원된, 그야말로 세르비아인의 신화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이 시작된 것이다.
세르비아에서는 귀족들에 의해 떠밀리듯 등극한 라자르가 선두에서 지휘를 맡았다. 오스만트루크 군대는 가운데 무라트 1세가 지휘봉을 휘둘렀고, 오른쪽에는 큰아들이자 훗날 ‘번개왕’으로 등극하는 바예지드가, 왼쪽 날개는 형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작은아들 야쿠브가 지휘했다.
무라트 1세(위키백과)
라자르 신호와 함께 세르비아군 선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투는 밀고 밀리기를 반복하며 꼬박 하루를 넘겨가며 이어졌다. 세르비아 역사상 이토록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는 일찍이 없었다. 점차 세르비아 왼쪽 진영이 무너지면서 전세가 이슬람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이슬람 군대는 기세를 올렸다. 세르비아군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승기를 빼앗긴 세르비아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은 최후의 한 명까지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고 오스만트루크제국이 승리했다. 대신 무라트 1세도 목숨을 잃어야 했다.
후세에 와서 이 전투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세르비아인 가슴에 화석처럼 각인된다. 누구의 도움 없이 발칸반도에서 이슬람제국에 마지막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항전했던 역사적 사실은 전무후무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화적이며 영원한 영웅 밀로슈 오빌리치 영웅담이 탄생되면서 세르비아인 가슴을 덥혔다. 영웅전에 의하면 세르비아 귀족이자 선봉대장 오빌리치는 짐짓 거짓 항복을 해 무라트 1세의 환심을 산다. 그리고 품속에 무기를 숨기고 들어간 오빌리치는 무라트 1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는데 성공하고, 그 역시 오스만 군사들에 의해 장렬하게 죽음을 맞는다. 진실은 무라트 1세가 전장을 돌아보다 전사자 속에 누워있던 오빌리치가 일어나 심장에 칼을 꼽았다는 것이 팩트다.
아들 바예지드는 군사를 물리기는커녕 슬픔을 뒤로 한 채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전술을 가다듬었다. 번개왕 바예지드는 스스로 뛰어난 검투사였다. 그는 이슬람병사들을 향해 복수의 칼날에 살기를 불어 넣는다.
결국 농민군까지 끌어 모아 항전했던 라자르는 바예지드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만다. 바예지드는 라자르의 목을 자르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이로부터 세르비아는 무려 400년 동안 오스만트루크제국 압제아래 들어갔다. 한편 이 싸움을 세르비아가 이겨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강 건너 불구경의 자세를 견지했던 비잔티움제국은 1453년 메메트 2세에 의해 함락당하면서 발칸반도는 이슬람제국으로 오롯이 편입되게 된다.
V. 1919년 세르비아 우로스 프레디치 작. ‘코소보의 처녀’ 그림과 관련된 코소보의 전설이다. 코소보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에겐 결혼을 약속한 연인 밀란 토플리카라는 기사가 오스만제국의 침공으로 연인의 형제와 함께 코소보 전장 터로 나갔다. 그녀도 뒤를 따랐다. 그녀는 연인을 찾아 헤매며 부상자에게 물과 빵을 주었다. 마침내 그녀는 연인을 만난다. 이 그림은 그녀가 죽어가는 밀란 토플리카에게 물을 주는 장면이다. 그는 그녀에게 연인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죽었다고 전하면서 그들이 죽은 곳을 가르치며 죽는다. 이 시의 끝부분이다.
“오 불쌍한 이여, 악마가 그대의 운명이구려! 불쌍한 당신이 그 푸른 소나무를 잡는다면 그것마저 시들어 버릴 것이니!”
세르비아 사람들은 600년을 이어오며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가슴에는 의기가 충만하고, 민족혼이 가슴을 쿵쿵 쳤을 것이다. 코소보는 세르비아인 민족의 성지로 굳어지고 있었다.
오스만트루크제국에 의해 멸망한 세르비아 네마냐 왕조는 역사의 현장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슬람 지배로 세르비아인 정신은 물론 삶 자체도 낡은 흑백사진처럼 정지된다. 어둠의 시간은 약 400여 년을 이어가야 했다.
훗날 희대의 살인마 밀로셰비치가 길들인 '밀로셰비치의 개들'에 의해 코소보는 발칸반도의 판도라상자가 되면서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자신들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민족의 성지 '검은새의 들녘'에 알바니아 무슬림들이 몰려와 살면서 나라를 세우겠다니? 언감생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