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을 앞둔 날에는 여지없이 재앙이 예견된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도 그랬다. “달은 밝고 별은 성글고 까마귀와 까치는 남쪽으로 날아가서 나무에 세 번 둘러싸여 의지할 가지가 없네”라고 조조가 시를 읊자 옆에서 유복이 시 구절이 불길하다며 간언하자 조조는 도취된 흥을 깬다며 죽여 버렸다. 정말 유복의 한이 통했는지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완패를 면치 못하고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채 도망쳐야 했다.
조조
콘스탄티노플 마지막 날, 불길한 조짐이 연이어 나타났다. 1453년 5월 22일 밤 월식이 있었다. 다음날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날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었다. 황제가 기도를 올리던 중 성상이 떨어지자 따르던 기도행렬이 공포에 휩싸이며 흩어졌다. 짙은 안개가 성을 감싸고 성소피아 성당 돔 지붕에 붉은 기운이 흘러 아래까지 훑고 사라졌다.
이 모습을 본 메메트 2세도 두려움에 움찔했다. 그러나 꿈보다 해몽이었다. 소피아 성당이 참되고 올바른 신앙의 성지로 빛날 것이라는 점성가들의 해석은 그에게 쾌재를 부르게 했다. 이슬람 군대는사기가 올랐지만, 비잔티움 황제와 병사들에게는 신에게 버림받는, 절망을 부르는 조짐이었다.
배를 산으로 옮긴 메메트2세
1451년 메메트 2세(Mehmed Ⅱ, 1432~1481), 19세의 나이로 제7대 술탄에 등극한 그는 야심도 당찼다. 이슬람 정벌의 마침표, 천년 제국 비잔티움에 사활을 걸었다.
1453년 5월 6일 15만의 대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며 공격이 시작되었다. 비잔티움에는 1,123년을 지탱한 제국의 에너지,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겹겹의 성벽으로 둘러쳐진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었다. 길이 20km, 넓이 대략 70m의 3중 성벽의 이름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그리고 바다 골든혼(황금뿔)쪽에 비록 한 겹의 성벽이었으나 매우 견고했다. 무엇보다 골든혼 어귀에는 굵은 쇠사슬을 물아래 가로로 걸쳐놓아 어떤 배도 드나들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공이 많았다.
메메트는 사전에 기술자를 보내 골든혼에 닿는 도로를 닦아 놓았다. 또한 쇠로 바퀴를 만들고 철길도 완성했다. 목수를 동원해 중형선박 운반용 거대한 나무 받침대도 제작했다. 4월 22일 아침이 되자 수십 마리 황소와 군사가 이끄는 70척 함선이 언덕을 넘어 골든혼으로 내려왔다. 이를 본 콘스탄티누스 11세와 비잔티움 병사들은 경악했다.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아침, 에니체리 부대가 진군하기 시작했다. 나팔과 북소리가 진동하며 죽음의 향연을 펼치려는 군사들의 함성이 저승사자들을 불러내는 의식 같았다. 전투 중 이슬람 병사 몇 명이 반쯤 열린 작은 쪽문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 오스만제국 깃발을 올려버렸다. 이슬람 군사들이 물결치듯 밀려들었다. 아뿔싸! 바늘구멍이 거대한 둑을 무너뜨린 형국이었다.
비잔티움 최후의 날
천년의 로마는 막을 내리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메메트 2세는 처음에는 의례 3일 동안 약탈을 허용했다. 살육, 강간, 방화와 파괴가 이어졌고 도시는 죽어갔다. 그러나 당일 약탈을 중지시켰다. 이미 죽은 자가 태반이요, 죽어가는 자가 남은 반이고,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아이들은 머리가 깨어지고, 성당은 무너지고 불에 탔다. 황궁은 빈껍데기만 남았고, 성모상은 조각조각 흩어졌다. 더 약탈할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후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메메트 2세는 에니체리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성소피아 성당으로 갔다. 화려하면서 장중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간, 믿음의 방식이 다를 뿐인, 같은 하늘을 모신 성스러운 곳에 들자 파괴가 최선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부하들에게 건물파괴행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알라께 감사기도를 올릴 때 가톨릭 아이콘을 천으로 덮은 채 진행했다. 술탄 메메트 2세는 이곳 성소피아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선포함으로써 화려했던 성당은 이슬람의 모스크로 변했다. 밤하늘에는 어둠 속에서 그믐달이 패망한 천년 제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의 트뤼키에 국기 모습이다.
성소피아 성당이 이제 이슬람 모스크가 되었다. 그래서 서구 사가들은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 희망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도시가 불타고 소피아성당에서 최후의 미사가 일어나던 날, 이슬람군의 살육과 약탈은 이어졌다. 그런데 신앙이 독실했던 일부 성직자들이 성반과 성배들을 챙겨 연기와 함께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그들로서는 미사는 진행 중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채로 남았다는 스토리텔링을 마련해두었다. 언젠가는 중단된 미사시점부터 개재되리라는 그들만의 믿음이다. 하나의 하느님이 어느 편을 들어주실까. 관전자로선 자못 궁금하다.
성당을 벗어난 메메트 2세는 황궁으로 향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는 궁이었다. 황궁입성! 인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궁전 내부를 돌아다니며 감회와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옛날 알렉산더가 페르세폴리스를 불 지르며 감상하던 것처럼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이 역사를 품은 채 침묵으로 말을 건네는 도시, 천년을 이어오며 영고성쇠를 거듭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당당했던 황제가 머물던 궁이 초라한 모습을 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고 한다.
“궁전에는 거미줄만 무성하고 아프라시아브 탑에서 부엉이만 우는구나!”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제국의 수도로 화려하게 부상했던 비잔티움이, 아이러니하게도 콘스탄티누스 11세에 멸하게 되니 역사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성소피아 성당은 이를 기점으로 비잔틴 양식에 오리엔트 양식,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첨탑이 어우러져 곡선과 직선의 조화, 아치와 각짐이 마치 공존이 삶의 최선이라고 하느님이자 알라께서 간곡히 전하고 있었다.
메메트 2세
정복자 메메트 2세는 오스만제국의 수도를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그 도시’, 혹은 ‘큰 도시’라는 뜻을 지닌 ‘이스탄불’로 바꿨다. 주인이 떠나고 없는 오래 버려진 허물어져가는 빈집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메메트 2세는 그 옛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탄불에 제국의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메메트 2세는 만족하지 않았다. 마치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사방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지라 이집트 정복길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