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종교든 태생기에는 이단이다. 시대에서 파생된 의붓자식일 수밖에 없다. 이슬람이 순식간에 퍼진 것은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비잔티움과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영향이 컸다. 배척만 당하던 무함마드는 622년 추종자들을 데리고 메디나로 이주해 그곳에서 절치부심 초석을 다진다. 이때를 헤지라(Hegira-이동), 즉 ‘이주의 날’로 정해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한다.
이곳에서 부족 간 분쟁을 평정하고 이슬람 공동체로 결속을 다진 무함마드는 세 번의 공격 끝에 메카를 정복해 교세 확장에 획기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전쟁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첨가해 이슬람을 형성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 지하드로 인식하게 했고, 결국 지금까지 그 정신이 내려오고 있어 성공한 것은 분명하다.
무함마드는 632년 메카로 순례하러 가던 도중 열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러나 예수처럼 3일이 지나도 부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 순식간에 급속도로 번져나간 것은 시대적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그러나 이 말은 서구 시각에서 조작한 것이다. 이슬람은 강제로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만약 비잔티움을 정복한 메메트 2세가 그곳 사람들을 이슬람으로서의 개종을 강행했다면, 터키제국이 발칸을 지배했을 때 동방정교를 믿던 사람들에게 교회를 파괴하고 개종을 강요했다면, 훗날 발칸의 비극은 얼마만큼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디든 토착종교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에 관대하면서 포용정책을 펼쳤다. 무함마드는 용기와 공평함으로 점령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의 이런 행동은 훗날 무슬림에게 덕성을 간직한 모범으로 이어진다.
그는 입상진의立像盡意, 형상을 만들어 뜻을 강조해 전달하는 로마 가톨릭과는 경계를 분명히 했다. 이슬람 포교를 위한 아이콘을 만들 수 없어 무함마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경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사촌 이슬람은 이제 전성기를 맞는다. 사촌이라 함은 이슬람 역시 히브리 성서에 근거한 종교란 뜻이다. 기독교의 사상과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다. 같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심판, 종말론 등 기본적 종교관의 골격을 공유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탄생
동방 제국 오리엔트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다. 최근 세계 갈등의 불씨를 끊임없이 일으키는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는 주지하다시피 하나의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7세기 초,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육로와 해로의 실크로드가 사실상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대신 문화란 물과 같아서 막히면 돌아가고, 팬 곳은 채운 후 흐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전쟁터를 피해 아라비아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로가 개발되자 메카와 메디나가 중심도시로 주목받는다.
이때 무함마드가 등장했다. 570년 그는 메카의 명문가 쿠레이시 가문에서 태어나 623년까지 62년을 살았다. 유복자로 태어나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곁을 떠났고,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를 다니며 힘겹게 대상 활동을 했다. 당시 혼란한 사회와 처한 삶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그 덕분에 기독교와 유대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늘 명상에 잠겼다. 붓다가 그랬듯 고집멸도苦集滅道, 즉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과 번뇌 등 인간 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에 몰두했을 법하다.
나이 40세가 되던 해인 610년에 하느님(알라)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 메카의 히라 동굴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났다. 이후 그는 예언자가 된다. 예언자, 즉 유대교 전통에서 나온 개념으로 신의 뜻을 전달하는 대변인, ‘신의 입’을 뜻한다. 이로써 하늘, 즉 절대적인 신을 인간 세상의 잣대로 표현하는 우상숭배의 타파, 평등과 평화를 강조하는 이슬람교를 완성한다.
예수가 30세에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시작했고(누가복음 3장), 부처는 35세에 정각正覺, 즉 깨달음을 얻었다면, 무함마드는 40세에 계시를 받았다. 이 일련의 간격, 5년이란 숫자가 어떤 의미일까. 장돌벵이 시각이지만, 세속에서 풀 수 없는 형이상形而上의 의미가 있을 법하다.
이슬람이란 말뜻은 ‘복종하겠나이다’이다.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가톨릭의 아리우스파와 맥을 같이하면서, 더 나아가 철저한 일원론적 유일신 사상을 확립했다. 삼위일체가 가톨릭, 정교, 개신교의 기본 교리라면 이슬람교는 아담에서 아브라함, 다윗,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의 선지자는 신이 보낸 인간 예언자일 뿐이며, 무함마드는 ‘봉인’ 곧 마지막예언자라고 한다. 때문에 복음을 완성하는 사명을 지녔다고 보는 시각이다. 로마 가톨릭과 달리 인간은 신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 예수나 성직자 등과 같은 신과 인간 사이 어떠한 중재자도 없다. 예수를 통한 구원이란 어림없다. 특히 정명사상正名思想, 즉 현세에서 선악의 행위에 따라 최후의 날 신의 심판을 받는다. 구원과 응징으로 나누는 내세관은 천국의 법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이다.
보스니아 사라예보 이슬람사원
성서종교(아브라함)의 개념 자체가 유대교의 야훼, 기독교의 하느님, 이슬람의 알라는 같은 창조주 하느님을 지칭한다. 다만 하나의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개념과 종말론, 메시아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다음에 올 메시아가 누구냐 하는 데 대한 해석에 따라서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나뉜다.
단언컨대 현세에 일어나는 종교 갈등은 인류욕망의 찌꺼기다. 2000년이 훌쩍 넘거나, 1400년 전의 생각, 생활환경, 정치적이고 복합적 사상이 집대성된 교리가 미련스럽고 강직한 종교인으로 인해 고스란히 내려오거나, 혹은 필요에 의해 첨삭되면서 갈등의 불씨를 살려내 건재함을 자랑하는 중이다.
인간과 민족, 국가의 이해에 따라 폭력을 생산하고, 스스로 희생당하기도 한다. 또 오랜 세월이 삭아 문드러졌어도 그때의 잣대로 오늘을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일부다처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고, 천국행 티켓을 당당하게 팔아먹던 때를 잊었던가? 마녀사냥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빼앗았던가. 이교도에 대한 정당한 살육행위는 지금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의 구한말 자생적 기독교도에 전통적 미풍양속인 조상의 제례 행위를 종교 의례라 판단했던 당당한 오류의 전달은 순박하기만 했던 극동의 작은 나라에 얼마나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던가.
죽음 앞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에 의해 태어난 종교는 구원을 통한 내세관이 가장 큰 매력이다. 천국이란 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희망을 뿌려대며 거품 물고 사정한다. 믿으면 천국, 부정하거나 믿지 않으면 지옥의 불길로 내던져진다고 미천하고 무식하기 짝이없는 평범한 인간을 향해 따발총처럼 쏘아댄다.
중국 서쪽 끄트머리 고창에서 만난 회교도 노인. 그는 전쟁으로 한쪽 팔을 잃었다
봄여름가을겨울,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천국에 대한 미련이 넘쳐 안달복달이다. 하긴 죄악을 저지르는 인간들을 생각하면 지옥은 있어야 마땅하다.
정작 천국으로 가자고 군중 속 외롭고 공허한 외침을 반복하는 유는 막상 천국에 가더라도 행복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또 다음 세상을 위해 천국에 가자고 저리 떠돌고 있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다음 생을 위해 현생을 허비하며 이를 반복하는 미련하고 가련한 인생이다. 속된 말로 그렇게 좋으면 먼저 가든가.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대사다.
“인간은 생을 살려고 태어난 것이지 다음 생을 준비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미뤄야 할 행복은 없다”